|자료방|

2004/10/28 (16:46) from 211.217.236.156' of 211.217.236.156' Article Number : 19
Delete Modify 마음산책 Access : 5613 , Lines : 56
"세상을 편집하고 책으로 진화한다"


“세상을 편집하고 책으로 진화한다”
- 살아 숨쉬는 자, 그대 이름은 편집자


《편집자 분투기》 펴낸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

‘뒤안’에 있다 하여 책과 저자의 부속물로 여긴다면 서운해할 일이다. 모름지기 출판사 편집자란 저자와 심정적으로 동고동락하며 파트너로서의 임무에 충실해야 하는 책의 모태다. 저자와 산고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그들은 자신만의 안테나를 세워 세상과 주파수를 맞춘다. 좋건 싫건 세상을 바지런히 관찰하고 톺아보려는 의지가 있어야만 자격이 주어지는 까닭이다. ‘세상을 편집하는 자’로서의 자격이다.


“인간관계도 만만찮게 중요합니다. 필자를 설득하고 필자에게 지지 않는 방법을 알아야지요.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고 그래서 술도 많이 먹게 되는 게 출판사 편집자입니다.”


편집자로 20년차, 출판사 사장으로 4년차가 된다는 마음산책 대표 정은숙(42) 씨는 필자에게 지지 않기 위해 메모벽을 갖게 된 경험부터 꺼내놓는다. 오늘 만난 사람, 주요전화, 특기사항만 기록한 건 아니다. 필자와 의견이 엇갈려 갈등하던 때의 기억, 처음으로 편집한 책이 나왔을 때의 즐거움 등을 오직 자신만 알아볼 수 있게 기록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단다. 필자가 미워서가 아니라 더 좋은 책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분투기’라!? 단순히 편집자 가이드북이었다면 꺼내놓기 민망했을 말이다. 정은숙 씨가 20년 전부터 써놓았던 편집일기를 바탕으로 한 《편집자 분투기》는 일단 제목에서부터 편집자로서 최선을 다한 이만의 성실함이 느껴진다.    
“4년 동안 한겨레문화센터 강의를 하면서 편집자가 되려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편집자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얼마만큼의 확신을 가져야 하고, 자기갱신이 필요한가를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이 책엔 편집자 존재 자체에 대한 고민들부터 업무에서 느끼는 고민들, 편집자가 되려는 분들과 함께 참고했던 책 얘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제 경험의 총체라고 할 수 있죠. 출판인생의 매듭이면서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될 응어리까지 담은 책입니다.”


1985년 출판계의 거목이었던 홍성사에 발을 들인 후 고려원, 삼성출판사, 세계사 등 굵직한 출판사에서 일하며 ‘명편집자’로 이력을 남긴 정씨다. 맨 땅에 헤딩하듯 교정 보는 일부터 시작했으니 분투기도 ‘기본’부터다. 행여 ‘쉽게 대박 터뜨리기 비법’이라도 있을거란 오해로 책을 펼쳤다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지금까지 온 정씨의 출판인생에 고개 숙일 게 분명하다.


"확인 또 확인”이란 교정 구호를 외쳐가며 오탈자를 열심히 잡아내는 데 열중했던 1년차부터 편집자와 영업자의 영역을 모두 아우르는 출판사 사장이 되기까지. 시절을 거스르는 정씨는 “나는 이 시간에도 책을 만들고 있다”며 자신의 직업을 향한 끝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또한 편집자의 책무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바까지 차분하게 적어 내려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왜 편집자가 돼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입니다. 편집자에게 가장 많이 요구되는 조건은 원고를 바로 읽고 이해하는 눈이거든요. 여기서 평소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고, 편집자란 직업에 애정을 갖고 있는지를 말해주지요. 학벌, 토익점수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편집자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뭔가가 있어야 하고 그 분야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책을 구상할 수 있어야 하지요.”


책과 저자는 빛이 나지만 편집자에겐 그늘이 드리워질 때가 많다. 때론 저자보다 더 혹독한 산고를 겪지만 대중들은 낳은 공을 저자에게 돌리는 문화에 익숙해 있다. ‘초짜 편집자’ 시절의 정씨 역시 저자와 편집자 사이를 무조건적인 수직관계로 오해한 적이 많았다. 텍스트와의 싸움에 인간관계의 어려움까지 겹치니 출판편집은 그야말로 ‘도道 닦는 일’에 가까울 때가 많단다. 이때다 싶어 기자의 꿈을 이루지 않고 편집자가 된 게 후회되진 않느냐고 운을 띄웠지만 그는 전혀 동요치 않고 응수한다.


 "저자와 원고를 놓고 토론하는 일이 이처럼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사실 편집자로 일하면서 많이 변했고 깨달았습니다. 예전엔 글과 사람을 무조건 일치시키려고만 했는데 이젠 저자 손을 떠난 원고는 그냥 생명으로 본다는 것이지요. 저자 것도 아니고, 제 것도 아닌 제3의 생명이 건강하게 잘 태어나도록 돕고 성장시키는 인물로서 제 직업에 무척 만족합니다.”


 정씨는 도닦으며 저자와 벌인 한판승은 편집자가 책을 잘 만들어 주었을 때 모두 ‘무無’가 된다 말한다. 이를 ‘아름다운 복수’라 일컫는데, 힘들고 지칠 때마다 ‘아름다운 복수’를 생각한다는 게 그의 고충 극복 방법 중 하나다.

한편 《편집자 분투기》엔 자식처럼 귀한 책들의 성패 요인을 냉정하게 가리는 지면도 마련했다. ‘글빨’로는 결코 뒤지지 않으나 대중에게 비교적 덜 알려져 있던 박영택(경기대 교수) 씨를 섭외해 전작으로 완성한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2002년 한국출판문화상 편집상을 수상한 수작. ‘예술’이 아니라 ‘예술가’의 인생에 초점을 두었다는 신선미부터 인문학적 글쓰기를 발견하는 것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반면 《우리 집은 어디인가 1,2》는 독자 대상, 제목 설정 등 기획초반부터 실패 여지를 남겼던 책. 정씨는 연륜이 축적된 후 돌아보면 매양 같은 실수가 반복된다는 걸 자책할 때가 있으니 창피하더라도 실패사례를 늘 떠올려야 한다고 충고한다.


 "2000년에 출판사를 차리면서 문학출판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굴지의 출판사들이 있어서 우리 몫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 제가 사진을 좋아한다는 걸 염두에 두고 ‘읽는 책에서 보는 책으로’란 컨셉트를 잡았지요. 제겐 편집자로서의 임무도 있고, 장부를 펼쳐보며 부담을 가져야 하는 사장으로서의 임무도 있습니다. 지금 이 방향은 그대로 가겠지만 어느 날 마음산책과는 다른 컨셉트라도 좋은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편집자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수렴할 생각입니다. 편집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믿습니다.”


 누구보다 바지런히, 열정적으로 움직이고, 필자 선택부터 서체 결정까지를 고민하는 선택의 기로에 살다 보니 몸도 마음도 살아 있지 않고선 해낼 수 없다. 그러니 《편집자 분투기》를 덮으면서 “편집자, 당신은 지상 최고의 라이브한 인간”이란 말이 안 나올 수 없겠다.


 "왜 힘들지 않겠습니까. 소극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전 출판 자체를 즐겼어요. 글을 읽고 문화에 민감해지면서 나 자신을 성숙시킬 기회가 많죠. 공부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자유로움이 주어지지요.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들과 비교될 때도 있겠지만 끊임없이 지식가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저자와 그의 세계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유일한 산물. 책이 소멸할 일은 없을 것이고 편집자도 마찬가집니다. 저는 이번 책을 쓰면서 10년 후엔 ‘경영자 분투기’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새로운 소망도 갖게 됐습니다.”


 정은숙 씨는 “책을 잘 만들자고 말하는 책이라 부담이 크다”며 괜한 짓을 한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겸연쩍음은 잠시 접는 게 좋겠다. 그의 책을 정독해 오자를 잡아준 편집자부터 독후감을 써 보낸 편집자까지 대화 나눌 편집자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이 책으로 이 땅의 편집자들과 두런두런 대화하고프다”란 정씨의 바람은 이미 반 이상 이룬 셈이다.  


(2004. 출판저널 10월호,김청연 기자)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