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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1 (17:12) from 61.73.20.61' of 61.73.20.61' Article Number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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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서 남 주자!

[출판가 쟁점/19] 배워서 남 주자!


변정수



한겨레문화센터에서 1년 넘게 '예비 출판편집자 과정'의 강의를 진행하면서 늘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은, 막 출판에 입문하고자 하는 이들이나 출판편집자의 길에 들어서 걸음마를 떼고 있는 이들에게 이 일에 관한 길잡이로 마땅히 읽힐 만한 책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어차피 출판 편집자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을 '인문적 균형감각'이라고 생각하는 터이고 보면, 읽힐 만한 책이 왜 없겠는가.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 주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책이 다 '출판편집자'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연하게 인문적인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면 그게 다 자신의 정신적 자산으로 축적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 자체야 지당하지만, 도대체 출판편집자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며 또 그 일이 어떤 성격의 일인지 감을 잡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하나마나한 말이다.


인터넷 서점의 목록을 아무리 뒤져도 '편집'이라는 검색어로 잡히는 책이라 봐야 매우 기능적인 영역의 접근뿐이며 게디가 쿼크익스프레스 같은 전산 조판기를 다루는 방법을 소개한 매뉴얼류를 제외하면 대부분 오래 전에 절판이 된 책들이기 일쑤이다. 한 마디로 이른바 '에디터십(editorship)'의 정체에 접근할 수 있는 책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쉬운 대로 10여 년 전에 번역 출간된 도로시 커민즈의 {편집자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대충 감이라도 잡아 보기를 권하기는 했지만, 삭스 커민즈가 편집자로 살았던 미국의 출판 현실이 '지금 여기'에서 요구되는 출판편집자의 모습과 괴리될 수밖에 없는 부분은 여전히 의문 부호로 남겨 둔 채 장님 코끼리 만지듯 미루어 가늠해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출판 역사를 몸으로 써내려온 선배 출판인들의 자취를 정리하는 가운데 그들의 편집자로서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풍부하게 제시한 그런 책에 목이 말랐다.


그래서 얼마 전 출간된 마음산책의 정은숙 대표의 {편집자 분투기}를 마주했을 때, 그 내용을 미처 살펴보기도 전에 이 책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세라도 부르고 싶을 만큼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출판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은퇴한 원로급의 회고록이나 평전조차도 아쉬운 판국에, 지금 이 순간에도 동시대를 호흡하고 있는 선배 편집자의 생생한 육성이어서 반가운 마음은 훨씬 더 컸다. 내가 그 동안 그토록 목마르게 찾던 또는 기다리던 책이 바로 이런 책이었다. 내가 이 책에 담긴 내용, 즉 저자의 편집관 또는 편집자관에 한 사람의 편집자로서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차라리 나중 문제였다. 설령 꽤 성공한 편에 속하는 편집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저자가 들려 주는 내용이 편집자로서의 성공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보잘 것 없는 길을 걸어왔던 내게(또는 나와 다르지 않은 처지의 동료들에게) 이를테면 '배부른 자랑'이나 '교과서적인 모범답안' 이상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내용이었다 할지라도,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의 교훈을 떠올리자면 그 자체로 후배 편집자들의 거울의 역할에 값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니 반갑지 않을 이유란 당췌 없었다.


하지만 책갈피를 넘기면서 내가 확인한 바는 새삼스럽게 놀라운 것이었다. 실망스럽기는커녕 이렇다할 참고 교재 하나 없이 나 자신의 매우 편협한 경험만을 밑천삼아(말이 나온 김에 솔직히 털어놓자면, 강의를 진행하면서도 내가 강의하는 내용이 과연 얼마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내용일까 또는 좀더 구체적으로는 과연 내 강의를 들은 이들을 현장에서 지휘하게 될 편집자들에게 지지받을 수 있는 내용일까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강의해 왔던 내용의 대부분이 고스란히 이 책 안에 활자화되어 있었다. 그것을 하나하나 발견해 가는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작 한 사람의 지지자를 확인했다고 해서 편집 일에 대한 내 입장(또는 거꾸로 저자의 입장)이 보편적이라는 확증을 잡았다는 듯이 들뜨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백 권의 책에는 백 개의 관점이 있다"는 저자의 말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따지고 보면 '보편적인 편집관'이라는 것이 어디 있으랴. 설령 나와는 달리 저자가 이 책에 펼쳐 보이고 있는 편집관에 동의할 수 없는 편집자라 할지라도, 그렇다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한 자신의 관점을 대중 앞에 펼쳐 놓을 이유가 충분하다. 바로 그 점을 자극하고 고무한다는 측면 하나만으로도 이 책의 출간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를 평가하기에 주저해서는 안 된다.


요컨대 나는 정은숙 대표만이 아니라 그와는 자못 다른 생각을 가진 다양한 편집자들이 이런 종류의 책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편집관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기를 바란다. 편집자의 길에 정해진 모범답안이 있을 수 없다면, 다양한 관점을 가진 선배 편집자들의 삶에서 우러나온 현장감 넘치는 육성만큼 소중한 길잡이는 없을 것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편집일을 선배의 '어깨너머'로 요령껏 배워나갈 수밖에 없는 영역에 방치해 둘 작정이란 말인가. 이렇게 말하면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편집자들조차도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예술가스러운 언설을 방패삼아 겸양하곤 하지만, 출판 편집은 체계화된 언어로 다 담아낼 수 없는 '예술'이 아닐뿐더러(물론 그런 측면도 분명히 없지 않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의 에디터십이 실은 애당초 일관성 있는 서술로 표현될 수 없는 '주먹구구'에 지나지 않음을 그럴듯하게 감추려는 변설은 아닌지도 곰곰이 되짚어 보아야 할 대목이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다 떠나서라도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겸양의 말로 한사코 글쓰기는 물론이려니와 인터뷰조차 거절하는 예술가들을 저자나 인터뷰이로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이 어떤 말로 설득을 했던가를 되돌아 보았으면 좋겠다.


책이 보편적 가치를 지닌 문화적 생산물이라면, 당연히 그 책을 만든 편집자의 숨결 또한 무형의 문화재일 것이다. 그리고 굳이 출판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편집자의 숨결까지도 그가 만든 책과 함께 문화적 자산으로 갈무리해 두어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출판 종사자라면 더더욱 그것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요구가 된다. 기실 모든 창조적인 저작물은, 자신은 비록 선배의 어깨 너머로 체득한 것일지라도 후배들에게는 체계적으로 전수해 주려는 노력과 의지의 소산으로 태어났다. 그만큼 출판 종사자는 "배워서 남 주자"는 정신에 빚지고 있다. 이제 조금씩이라도 그 빚을 갚아도 될 때가 되었다. 오랜 경험 속에서 몸으로 체화되어 있는 자신만의 고유한 '편집론'을 더 많은 사람들이 따라 배우며 길잡이로 삼을 수 있도록 언어화해 주기를 출판 편집의 '백전노장'들께 감히 요구한다. 그리고 그 소중한 물꼬를 틔운 정은숙 '선배'께 다시 한 번 진심어린 경의를 표한다.


(*기획회의 20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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