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에 이은 『함께 가만한 당신』
기록과 증언을 넘어 ‘맵시’까지 담으려는 부고


『함께 가만한 당신』은 전작인 『가만한 당신』에 이은 책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다 조용히 떠난, 그러나 거대한 동공처럼 큰 빈자리를 남긴 서른다섯 명의 삶을 담담하게 써내린 부고. 한국일보 선임기자인 저자는 지금 우리가 상식으로 여기는 가치들을 일구려고 노력했던 사람들, 그러나 떠난 뒤 기억에서 사라져 “잔물결도 일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을 편파적으로 주목했다. 그들의 덜 알려진 삶을 애정을 담아, 영웅주의로 쉽게 재단하지 않고, 그 삶의 결대로 곱씹는다. 억압과 불평등과 편견에 맞섰던 삶 또는 자유와 해방을 추구했던 삶의 복잡다단한 맥락과 질감이 선명하다. 저자는 열띤 삶 뒤에 큰 영예와 주목을 누리지 않고 사라져간 인물들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그들의 소소한 면면, 그 ‘맵시’까지 담으려 노력했다.


서른다섯 명으로 인해 누군가는 힘을 얻고 누군가는 위로받고 누군가는 낭떠러지까지 갔던 발걸음을 되돌릴 것이다. 한 사람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것은 다른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이다. 『함께 가만한 당신』의 저자는 바로 이 일에 용맹정진하고 있다. (…) 학자나 작가라면 저서나 작품을 통해 사상과 개성을 가늠할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그의 걸음걸이나 잠버릇 혹은 즐기는 달빛의 세기와 술잔의 크기는 파악하기 어렵다. 『함께 가만한 당신』을 읽고 있노라면, 나는 저자의 눈길이 자꾸 그 어려운 사소함들로 향하는 것 같아 흥미진진하다. 남겨진 기록과 증언을 넘어 한 인간의 맵시까지 담으려는 걸까. 죽음이 만든 불가능에 도전하는 글쓰기는 하루를 가꾸며 영원을 바라본 자의 눈망울처럼 맑고 아득하다.
-김탁환(소설가)


『함께 가만한 당신』에 수록한 서른다섯 명은 전작의 인물들과 비슷한 결을 띠지만 이번에는 분야가 조금 더 두드러지거나, 조금 더 통쾌한 삶이거나, 조금 더 대중에 익숙한 인물들이 더해졌다. ‘동물권’의 수호자로 야생동물 복지 시설 ‘티기윙클스’를 설립한 레스 스토커, 잡지 <맥심>의 발행인으로 여러 매체를 거느리다 전 재산을 숲 재단에 기부하고 떠난 펠릭스 데니스, 힐튼호텔 창립자 콘래드 힐튼과 자자 가보의 딸로 홈리스인 채 숨졌으나 자기 삶을 스탠딩코미디로 승화했던 프란체스카 힐튼, 귀족에 대한 통념을 비웃고 여든 넘어 새 결혼을 할 만큼 자신에게 충실했던 알바 여공작, 애완 돌 ‘펫록’을 대유행시켜 웃음을 주고 무용함의 유용함을 돌아보게 만든 게리 달 등, 다른 지면들에서 가십처럼 다루어지기도 했지만 분명 세상을 더 살 만하고 즐겁게 만든 인물들이 책 곳곳에 포진해 있다. 세상을 바꿔나가는 데는 투지와 저항 말고도 여러 수단과 방식이 있음을 알려준 사람들. 저자는 이들의 삶을 급히 지나치지 않고, 인생의 순간순간에 있었을 체념과 오기, 안도와 웃음까지 느리고 깊은 눈길로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편견, 차별, 억압, 소외, 쉽지 않은 삶에
함께 있어 든든했던 사람들


『함께 가만한 당신』이 다루는 건 드러나지 않아 조용하고 은은했던 인물들의 완결된 삶이다. 살았을 때보다 난 자리가 크고, 모르고 지냈어도 돌아보면 동료이자 친구 같았던 사람들이 저마다의 영역에서 ‘같은 목적’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흔적들을 좇는다. 진실이 중요하고 상식이 바탕에 깔린,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 예컨대 억울한 사람을 사형대에 보냈다고 비난받았으나 40여 년 만에 진실을 인정받은 강간살인미수 피해자 발레리 스토리, 시골 의사처럼 송사를 가리지 않고 빈민 곁에서 권력기관과 싸운 ‘루저들의 변호사’ 마이런 벨덕, “사제니까 현실에 등 돌릴 수 없다”라며 독재에 저항하고 빈민 구제에 몸 바친 신부 페르난도 카르데날 같은 인물들이 삶을 바쳐 지키려던 것이 그런 삶이었다.


2013년, 84세의 벨덕은 암 진단을 받았다. 당시 그는 열여섯 살 소녀를 유괴 살해한 혐의로 1992년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은 에버턴 웩스태프의 무료 변론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사건 당시 스물세 살이던 웩스태프는 제대로 읽고 쓸 줄도 몰랐지만 감옥에서 혼자 글을 익히고 법을 독학해 직접 재심 청구 서류를 작성할 만큼 죽을힘 다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가석방 기회조차 죄를 인정하는 꼴이라며 거부한 채 각계에 탄원서를 썼다. 거기 응답한 이가 벨덕이었고, 뉴욕의 공익 법률 단체들을 설득해 그의 변론에 가세토록 한 것도 벨덕이었다. 벨덕은 공판을 앞두고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도록 항암 진통제까지 끊은 채 재판에 매달렸다. 2014년 9월 항소법원은 경찰과 핵심 증인이 거짓말을 했다는 정황증거를 검찰이 감춘 사실을 들어 원심 판결을 기각했다.
-122쪽, 「루저들의 변호사」


이 밖에도 『함께 가만한 당신』에는 그 자신이 힘겹게 누명에서 풀려나 오심변호협회의 창립 멤버가 된 권투 선수 ‘허리케인’ 카터, 인권 사각지대인 관타나모 수용소와 미국의 야만을 폭로한 인권운동가 마이클 래트너, 이윤과 거리가 먼 고집스러운 출판으로 출판업의 본령과 지조를 지킨 피터 오언 등 때로는 낯설고 때로는 익숙한 인물들의 삶이 담겨 있다. 사회운동, 정치, 종교, 출판, 학문, 예술 등 저마다 분야는 다르지만 함께 있어 든든했던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었음을 이 책은 말한다.


적의 전투원은 기소나 재판 절차 없이 무한정 구금될 수 있고, 국제법과 미국 헌법이 보장한 변호사 선임권 등 어떤 권리와 법익도 누릴 수 없었다. 전쟁 포로가 아니기 때문에 유엔 제네바협약(고문 금지 등)의 보호도 받을 수 없고, 가족에게 소재와 생사조차 알릴 수 없었다. 그들이 수감된 곳이 법과 인권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쿠바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수감 시설이다. 아프가니스탄 고아를 돕는 단체로 위장한 알카에다 지원 단체에 후원금을 낸 스위스의 노파도, 알카에다 요원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준 청년도, 취재원을 보호하기 위해 알카에다 요원의 소재를 밝히지 않는 기자도 적 전투원으로 분류될 수 있고 당연히 관타나모에 수감될 수 있다. (…) 관타나모의 야만, 미국의 야만을 폭로하고 수감자들의 인권과 헌법적 권리를 되찾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권 단체 헌법적권리센터의 의장 마이클 래트너가 2016년 5월 11일 별세했다.
-77~78쪽, 「관타나모의 인권운동가」



결론 내지 않는 긴 부고
타인의 삶을 돌아보는 가장 존중 어린 방식


누군가의 삶을 쉽게 요약하려면 그를 영웅으로 만들면 된다. 하지만 그러면 정작 그의 삶보다 그 삶을 대하는 이의 편견 또는 욕망이 앞서기 쉽다. 부고란 한 사람이 일구었던 고유한 세계, 다시없을 그 세계를 닫는 글이고, 그래서 존중이라는 문법이 필요하다. 함부로 결론 내지 않고 당사자가 살아온 길을 그 결대로 더듬어보는 것. 『함께 가만한 당신』은 서른다섯 명의 삶을 느린 호흡으로, 쉽게 휘발될 추측과 판단과 미사여구를 보내기보다는 있는 대로 섬세하게 짚어나가려 한다. 누군가의 삶이 큰 울림을 준다면 그것은 그가 무결점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결점을 딛고서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임을, 진정한 ‘영웅성’은 인생의 단면이 아니라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 수록된 서른다섯 개의 긴 부고가 좇는 것은, 영웅보다는 진솔한 인간으로 남길 원했던, 그러기 위해 끝까지 무기력하지 않았던 그 비범함이다.


“삶의 원칙은 돈과 직장 생활의 매트릭스 속으로 사라졌다.” (…) 하지만 그는 “그래도 우리는 ‘오늘’을 잃었을 뿐 모든 걸 잃지는 않았다”라고, “40주년을 기념하는 까닭도 지금 우리가 여기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선은, 뭔가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선이기에 좇을 가치가 있다. (…) 성경이 선의 결실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오직 내가 믿는바 선을 능력껏, 조심스럽게, 비폭력적으로 실천하는 것에만 마음을 썼고, 그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왔다.”
-55쪽, 「형제는 용감했다」



문고본 <번외 편> 동시 출간
일곱 명의 ‘그늘을 남기고 간 사람들’


『함께 가만한 당신』과 함께 <번외 편>도 출간되었다. 해석이 분분한 삶을 산 사람들, 그래서 완벽한 비난도 완벽한 지지도 보낼 수 없기에 본편에 싣지 못한 일곱 사람을 따로 묶었다. 킬링필드의 학살자로 말년에 치매에 걸려 제 과오를 머리에서 지우고 간 이엥 티릿, 폭군과 애국자로 의견이 갈리는 군인정치가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순수한 호기심으로 마약을 연구한 ‘엑스터시의 대부’ 알렉산더 슐긴, 전쟁과 도덕 사이에서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임무를 수행한 테오도어 반 커크, 전과 누범의 범죄자로 무용담을 팔아 엔터테이너로 변신한 프랭키 프레이저, 인종 혐오를 조장한 극우 인종주의 전도사 윌리스 카토, 그리고 매너와 교양을 갖춘 거물 마약상 하워드 마크스. 이렇게 일곱 명을 수록한 <번외 편>은 112쪽의 문고본 비매품이다.



추천사


살아 있어도 관계가 끊겨 죽은 자로 취급되는 이도 많고, 죽었어도 계속 책이든 영상이든 다양한 형태로 곁에 남아 삶을 이어가는 이도 적지 않다. 『함께 가만한 당신』의 도움으로 서른다섯 명을 기억한 사람들도 언젠가는 죽거나 흩어진다. 그러나 두 번째 망각이 찾아들 때까지, 서른다섯 명으로 인해 누군가는 힘을 얻고 누군가는 위로받고 누군가는 낭떠러지까지 갔던 발걸음을 되돌릴 것이다. 한 사람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것은 다른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이다.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동일하진 않다. 한 인간의 죽음은 곧바로 망각과 상실로 이어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눈앞에 살아 있을 때처럼 생생하진 않다. 그 인간을 글로 옮기려 할 때, 이 차이는 사소한 듯해도 무척 크다. 그가 학자나 작가라면 저서나 작품을 통해 사상과 개성을 가늠할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그의 걸음걸이나 잠버릇 혹은 즐기는 달빛의 세기와 술잔의 크기는 파악하기 어렵다. 『함께 가만한 당신』을 읽고 있노라면, 나는 저자의 눈길이 자꾸 그 어려운 사소함들로 향하는 것 같아 흥미진진하다. 남겨진 기록과 증언을 넘어 한 인간의 맵시까지 담으려는 걸까. 죽음이 만든 불가능에 도전하는 글쓰기는 하루를 가꾸며 영원을 바라본 자의 눈망울처럼 맑고 아득하다. 이 서른다섯 명은 우리가 딛는 땅이자 우러르는 별빛인 셈이다.

김탁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