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숨결을 허락한 긴장감 어린 텍스트
‘정치적인 것’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마지막 인터뷰


독일 태생의 유대계 미국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글은 철학과 정치에서 수없이 인용되지만 정작 그 사상이 발원한 아렌트 자신은 선동가나 연설가 체질이 아니었다. 책보다 앞서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고, 그 자신이 ‘공공 영역’의 중요성을 일깨웠음에도 모든 이즘(ism)에 대해서, 즉 국가나 민족 혹은 특정 집합 단위로 주창되는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늘 냉철한 입장을 지켰다. 이를테면 한나 아렌트에게는 실리보다 그에 대한 사유(思惟)가, 달리 말하면 ‘정치’보다 ‘정치적인 것’이 중요했는데, 그것은 민족이든 이익이든 맹목을 강요하는 모든 것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뜻이었다.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
-179~180쪽

 

그렇기에 한나 아렌트의 궤적은 더더욱 학자로서의 지조를 방증하지만, 긴 맥락과 반어 등으로 긴장감을 띤 그의 텍스트들은 그 자체로, 그리고 인간 한나 아렌트에 관해서 많은 오해와 오독을 남겼다.
『한나 아렌트의 말』은 『수전 손택의 말』 『보르헤스의 말』에 이은, ‘말에 지성이 실린 책’의 세 번째 책이다. 시대를 풍미한 지성의 구술된 텍스트에서 고유한 현장감과 깊이 있는 사유를 읽는 기획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등 명저를 남긴 20세기의 탁월한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인터뷰집이다. 주요작들을 출간하고 사상적 체계를 확립한 뒤인 1964년부터 말년인 1973년까지, 한나 아렌트의 지성적 행보를 보여줄 네 편의 굵직한 인터뷰를 엮었다. 인터뷰에서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저서에 관한 질문에 꼼꼼히 각주를 달고 오독된 것을 바로잡으며, 두 번의 망명과 그 뒤의 삶 속에서 자신이 보아온 세계와 인간을 말한다. ‘공공 영역과 사적 영역’ ‘악의 평범성’ 등 한나 아렌트가 낳은 20세기의 주요 개념들이 어떤 배경 속에서 구축되었는지 왜곡되지 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특히 1973년의 인터뷰는 한나 아렌트가 세상을 뜨기 이태 전에 가진 생전 마지막 인터뷰다. 이 대화에서 한나 아렌트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문제,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정체성 문제, 유대교와 기독교라는 종교의 문제, 그리고 저서들에 관한 뒷이야기 등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들에 관해 학자로서, 인간으로서 깊은 말을 전한다.

 

나는 이제 바깥에서 상황을 봐요. 내가 그 시절의 나보다 상황에 훨씬 덜 관여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15년이 아무 가치도 없는 세월은 아니잖아요?
-54쪽

 

기독교라는 특별하고 구체적인 의미에서 볼 때 유대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생활 방식에 더 가까워요. 내가 유대식 가르침을 받고 종교적 가르침을 받은 게 기억나요. 열네 살쯤이었는데, 나는 물론 선생님한테 반항하고 싶었고 선생님한테 뭔가 끔찍한 짓을 하고 싶었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저는 하느님을 믿지 않아요” 하고 말했죠. 그랬더니 선생님이 이러더군요. “누가 너한테 믿으라든?”
-187~188쪽 



사유의 이음매를 메우는 인터뷰
책에서 못다 건넨 한나 아렌트의 말


『한나 아렌트의 말』에 실린 인터뷰 네 편 중 두 편은 1964년에, 나머지는 1970년과 1973년에 각각 이루어졌다. 이 시기들은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같은 초기 저작의 의의를 되살리고, 대단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해명하고 첨언하며, 후기작 『공화국의 위기』를 예고하기에 중요했던 때다. 시의가 뚜렷한 이 인터뷰들에서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화두를 상세히 설명할 뿐 아니라, 젊은 시절 나치에 곤욕을 치르고 망명길에 올랐던 이야기며 유대인적 정체성에 매몰되지 않았던 가족 이야기, ‘철학자’이기를 거부하고 ‘이론가’이기를 자처하는 이유, 스승인 카를 야스퍼스에 관한 이야기, 모국어인 독일어에 느끼는 향수와 글쓰기 등, 자신의 ‘공공 영역’과 ‘사적 영역’에 관해 책에서는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 이야기들은 한나 아렌트의 사유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인간 한나 아렌트의 토대와 깊이를 알기에 더없는 텍스트다.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정확히 알아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는 쓰지 않아요. 보통은 앉은자리에서 단번에 쓰는 편이에요. 글 쓰는 속도가 비교적 빨라요. 타자 치는 속도가 내 집필 시간을 좌우하죠.
-25~26쪽

 

그[나치 전범 아이히만]가 권력에서 특별한 쾌감을 얻었느냐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전형적인 공무원이에요. 그런데 공무원은 공무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때 정말이지 대단히 위험한 신사예요. 여기에서 이데올로기는 그다지 큰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봐요.
-77쪽

 

긴 문맥이 특징인 한나 아렌트의 글쓰기에서 길을 잃지 않고 조소와 반어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한 저서와 대비적으로 ‘말’로써 풀어낸 『한나 아렌트의 말』은 ‘한나 아렌트 읽기’의 재미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따금씩 튀어나오는 격앙된 말투와 반문, 세월이 어린 체념과 애수 등 감정적인 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한나 아렌트의 말에서 그의 사상의 진위를 들을 수 있으며, 좀처럼 보기 힘든 한나 아렌트의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반어법에 대한 모든 비판이, 정말이지 취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대단히 불쾌해요. 그건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거든요. 매우 많은 사람의 눈에 나는 분명히 무척 불쾌한 존재예요.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내가 뭘 어쩌겠어요? 그들은 그냥 내가 마뜩지 않은 거예요.
-108쪽

 

혁명가는 혁명을 만들어내지 않아요! 혁명가는 길거리에 권력이 떨어져 있는 것이 언제인지를 알고, 그걸 집어 들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사람이에요. 무장봉기가 그대로 혁명으로 이어진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어요.
-118쪽



공정한 사유로 무장한
녹슬지 않는 철학


누군가 자기 민족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척하며 민족에게 경의를 표하는 양 알랑방귀를 줄곧 뀌어대는 바람에 이런 공명정대함을 실행에 옮길 수 없다면, 그렇다면 세상에는 실행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 거예요. 나는 그런 사람들이 애국자라고는 믿지 않아요.
-65쪽

 

예컨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유대인의 견고한 민족감정을 배반하고 나치 전범 재판 과정을 조소했을 만큼 한나 아렌트의 사유는 공명정대함이 뼈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유대인적 정체성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현상을 본질대로 보는 공정함은 그의 학자적 양심이자 좌우명이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바른말을 하는 소신이 종종 ‘자유주의자’라는 오해를 부르기도 했는데,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해명한다.

 

나 자신이 내가 자유주의자라는 걸 전혀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말할 때 당신이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있잖아요, 나는 결코 자유주의자가 아니에요. 그리고 나는 이런 의미에서는 어떤 신조도 갖고 있지 않아요. 나는 하나의 주의(ism)라고 부를 수 있는 명확한 정치철학이 없어요.
-177~178쪽

 

우리가 동화된 유대인에 관해 말할 때 그건 주위를 에워싼 문화에 동화되는 것을 뜻하는데,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요. 이 나라에 있는 유대인들이 어디에 동화돼야 마땅한지에 관해 친절하게 설명 좀 해줄래요? 아일랜드인의 문화에? 독일인의 문화에? 프랑스인의 문화에? 이 나라에 온 사람들…… 제각각의 문화에?
-185쪽

 

1975년 세상을 떠난 한나 아렌트의 말이 지금도 유효한 것은 특정 슬로건에 기대지 않는 공정한 사유 때문이다. 나치와 침묵으로 공모했던 수많은 독일인부터 책임 없는 열정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외치다 망각된 자유주의 운동들까지, 세계를 보는 한나 아렌트의 시각에는 허위를 벗어낸, 지독하다고 할 균형감이 배어 있다. 『한나 아렌트의 말』은 사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달라지지 않을 세상에 한나 아렌트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그 숨결을 되살려 읽는다.

 

나는 우리가 역사로부터 대단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는 확신하지 않아요.
-126쪽



바뀐 세기에도 유효한 이야기
‘악의 평범함’에 관한 아렌트의 예지


한나 아렌트의 화두 중 가장 큰 논의를 불러일으켰고 새로운 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 더욱 적실해진 화두는 나치 독일이 선보인 전체주의, 그리고 거기서 불거진 ‘악의 평범성’이다. 이제 악은 신화적인 깊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저 시스템 속에서 자기 행동을 보통이라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는 이 개념으로 한나 아렌트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사유’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한나 아렌트의 말』에서는 이전의 저서에서 완전히 매듭짓지 못한, 평범함과 무감함과 익명성에 깃든 악에 관한 논의를 이어나간다.

 

그들은 망설임을 가진 공무원들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의 망설임은 인간이라면 그저 한 사람의 공무원으로 존재하기를 멈춰야 하는 한계가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명확히 보여줄 정도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어요. 그들이 자기 자리를 떠나 “맙소사, 추악한 일들은 다른 누군가 하게끔 합시다!” 하고 말했다면, 그랬다면 그들은 어느새 다시금 인간이 됐을 거예요. 공무원으로 존재하는 대신에 말이에요.
-95쪽

 

이게 이른바 살인자들 사이에서 나타난다는 내면적 이민이에요. (…) 내 말은, 그런 건 없다는 거예요. 세상에는 외면적 저항만 있을 뿐이에요. 인간의 내면에는 기껏해야 심리 유보만 있어요. (…) 관료제는 대량 학살을 행정적으로 자행했고, 그런 상황은 여느 관료제가 그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익명성의 느낌을 창출해냈어요. 개별적인 인간은 사라졌어요.
-99~100쪽

 

『한나 아렌트의 말』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바로 ‘사유하기’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사유, 자신과 자기 행위에 대한 사유가 없는 ‘체제와 기능’ 위주의 사회에서는 20세기를 뒤흔든 만행이 언제라도 다시 벌어질 수 있다고 한나 아렌트는 이야기한다. 그가 마지막에 과거형으로 건네는 이 말이 왜 그가 그토록 사유를 강조했는지 설명해주는 듯하다.

 

세상은 폭군이 폭군으로 변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도 막지 못했어요. 세상은 네로를 막지 못했고 칼리굴라도 막지 못했어요. 그리고 네로와 칼리굴라의 경우는, 정치 과정에 범죄가 대규모로 침범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주는 훨씬 상세한 예시를 막지 못했죠.
-195쪽



추천사


상당히 오랫동안 아렌트의 저술들을 손에서 놓지 않고 지냈지만 그녀의 책은 항상 긴장감을 갖고 읽어야 하는 난해한 텍스트였다. 내로라하는 영어 실력자들도 종종 오역을 만들어내는 그녀의 길고 정교한 문장들은 그녀의 숨결을 느끼도록 결코 허락하진 않았다. 이렇게 묶여 출판되는 네 편의 인터뷰는 비록 글로 이루어진 것이긴 해도 마치 아렌트와 직접 대화를 나누듯 그녀의 사상 속에 담긴 숨결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 무척 반갑다. 아렌트 생각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명하고 또 새로운 면을 드러내고 있어서, 아렌트를 보다 생생하게 그리고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해준다.

김선욱 숭실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