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를 잘하려면 모국어부터 제대로 공부해야”
그의 뛰어난 필력과 입담, 언어 감각은 어디서 오는가

 

일본의 러시아어 통역사이자 작가, 요네하라 마리(1950~2006)의 열다섯 번째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독특한 이력과 방대한 지식을 유쾌하게 풀어낸 그의 필력은, 국내에도 ‘마리 마니아’층을 형성할 정도로 정평이 나 있다. 사실 일본에서 그는 필력 못지않게 직설적이면서 유머러스한 입담으로도 유명하다. 그 필력과 입담, ‘언어 감각’은 어디서 비롯했을까.
『언어 감각 기르기』는 요네하라 마리가 일본의 명사 11인과 나눈 대화를 담았다. 과학, 문학, 정치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대담으로, 그가 뛰어난 통역사이자 작가로서 입지를 굳힌 비결을 확인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원점’이라 밝히는 프라하 소비에트 학교에서의 수업은 우리 교육 방식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30년 가까운 통역 경험을 바탕으로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하는지를 손에 잡힐 듯 그려 보인다. 이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요네하라 특유의 비판의식과 재치다. 때로는 진지한 어조로, 때로는 농담과 유머로 받아치는 자유분방한 대화. 그 가운데 요네하라 마리의 언어관, 인간관, 세계관, 심지어 이성관까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관료의 사죄가 와 닿지 않는 이유”
말보다 의미, 나열보다 종합이 중요하다

 

“요네하라 씨는 뇌 속에 틀림없이 두 사람을 동거시키고 있고, 그 두 사람 사이에서 대화가 오가도록 하고 있는 것 같군요.”
“청자와 화자 두 사람, 그리고 그것을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신과 같은 자기 자신. 그렇게 적어도 세 사람이 있지요.”

 

이 책에서 많은 대담자들은 동시통역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해한다. 화자의 발언 속도에 맞춰 옮겨서 전달하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요네하라 역시 처음엔 못하겠다며 헤드폰을 내팽개치고 부스를 뛰쳐나왔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스승이 해준, “이해한 부분만 통역하면 된다”란 말을 듣고 돌아왔다고. 그러면서 점차 깨달아간다. “말이 아닌 의미, 정보를 전달한다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며, 단어 수(정보)가 많다고 청자에게 잘 전달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무엇보다 소리로 들린다고 해서 의미가 머리에 들어오는 건 아니란 것을 말이다.
말보다 ‘의미’가 중요하다. 이는 통역뿐 아닌 모든 언어생활에 적용된다는 게 요네하라의 관점이다. 많은 학자들의 발언이 지루하고 인상에 남지 않는 이유 역시 “지식을 나열”만 할 뿐 단어 사이의 연관성이 약하기 때문이라며, “객관성과 나열을 착각”하는 게 아니냐고 꼬집는다. 일례로, 러시아어를 조금밖에 못하는 사람이 요네하라의 통역을 듣고는 일본어 그대로 듣는 것보다 오히려 이해하기 쉬웠다고 말한 일도 같은 맥락이다. 지식을 종합, 소화해서 자기 말로 표현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는 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다. 눈은 나열된 것을 받아들여도 귀는 논리적이지 않은 건 듣지 못하기 쉬워, 써놓은 것을 보고 읽기만 하면 청자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한다.
관료가 공식 석상에서 사과를 해도 대개는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기분을 어떻게든 전달하려고 짜내서 나온 말이 아니라, 단순히 그 상황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상투적인 문구를 안이하게 내뱉을 뿐”이기 때문이라고 요네하라 마리는 말한다. “마음과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은 마음과 머리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 다른 나라 장관이 파티에서 말을 걸었는데 메모를 지닌 비서관이 곁에 없어 허둥지둥한 일본 장관의 일화라든가, 관료가 즉흥적으로 한 말의 수준이 형편없어 차마 그대로 통역할 수가 없었다는 경험담은 비단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매번 평생 잊지 못할 수업을 한다”
언어의 달인을 키운 학교

 

“우리가 체험한 소비에트 학교에서는 적어도 말과 인간의 관계가 좀 더 행복했는데. 영혼의 자유를 위해서는 자신과 말의 관계, 말을 매개체로 한 타자와의 관계가 중요한 법이지.”

 

아홉 살에서 열네 살까지 5년 동안, 프라하에 있는 소비에트 학교에 다닌 요네하라 마리. 초반에는 말이 안 통해 어깨 결림까지 왔지만 러시아어로 된 책의 줄거리에 이끌려 읽다 보니 어느새 유창해졌고, 이과나 사회 과목도 ‘국어’ 수업의 일환으로 흥미진진하게 진행된 덕분에 언어의 힘을 키울 수 있었다. 교과서도 읽을거리로서 무척 재미있을뿐더러 그저 읽게 하는 게 아닌 내용을 요약하는 훈련, 작품의 구조를 철저히 분석한 뒤 쓰는 작문 수업은 일본에서의 수업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일본으로 돌아와 ○×와 사지선다형 시험을 접했을 때 “체코에 가서 말이 통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괴로웠”던 그는, 선생님께 항의한 끝에 “나는 일본 사회에 영원히 적응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획일적인 잣대로 단편적인 지식만 테스트하는 방식에 적응하지 않았기에, 요네하라만의 사고방식과 표현력을 갖추게 된 셈이다.
외국어 습득에 관한 힌트도 있다. 50여 개국의 학생들이 함께 러시아어를 배워나갈 때, 모국어가 러시아어와 거리가 먼 아이들일수록 결국엔 더 완벽하게 익혔다고 한다. 모국어가 외국어와 비슷할수록 빨리 배우기는 하지만 그 억양과 패턴이 닮은 탓에 ‘이미 갖고 있는 것으로 적당히 때우려는’ 뇌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요네하라는 외국어 습득에 재능은 관계가 없다고 말하며, 외국어를 익히기 어려운 건 모국어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러시아인들은 언어가 모든 학문의 기초 체력이란 생각으로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거리를 두고 문법 교육을 했다. 이과나 사회 과목도 국어(문학)의 텍스트인 것은 그 때문이다.
‘열등감’이란 단어도, 우열의 개념도 없는 학교. 못하는 아이도 개성으로 인정하고 잘하는 것도 여러 가지가 있어 비교가 불가능한 곳. (인간의 본질과 무관한) 외모상의 별명을 부르는 일 따윈 없는 학교. 우리에겐 여전히 ‘미래’의 학교다.


 

“내 독설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내 주위에 남는다”
요네하라 마리의 모든 것!

 

이 책은 ‘요네하라 마리의 에센스’라 할 만큼 그의 삶, 성격, 가치관, 생활 방식까지 두루 담았다. 대화라는 특성상, 다른 사람과 그 스스로 말하는 ‘인간 요네하라 마리’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기존 저서를 통해 그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이 생긴 독자라면 특히 반가울 것이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요네하라 씨만큼 상하 관계에 무심한 사람도 없을 거예요. 아랫사람에게는 사랑받지만, 윗사람에게는 빈축을 사고 있죠. 절대로 윗사람에게 아첨을 안 하잖아요. 호불호가 극명해, 싫어하는 사람에겐 전화도 안 하죠.” (26쪽)

 

“전 이렇게 생각해요. 내 독설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내 주위에 남는 거라고.” (29쪽)

 

“요네하라 씨는 바보하곤 친해지지 못하는 타입이죠?”
“그렇다기보다 대화를 하며 재미없는 사람하고는 자연히 멀어지지 않나요? 시간이 아깝잖아요. 그리고 차별하는 사람도 싫어요. 가령 얼굴이 예쁜지 못생겼는지로 여자를 차별하는 남자, 신분 차별을 하는 녀석, 집안을 내세우는 녀석, 학력을 따지는 사람도 그중 하나지만, 인간으로서의 매력이 결여된 녀석일수록 그런 비본질적인 요소로 남을 차별하는 법이죠.” (30~31쪽)

 

“혹시 그게 결혼 안 하는 이유 중 하나인가요?”
“그것보다도 괜찮다고 생각한 사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데 뭔가 부탁을 받으면 나는 도망치는 타입이거든요. (중략) 하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차인 것도 내가 매달렸기 때문인가?”
“요네하라 씨를 설득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스스로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이 없으면 좀처럼 접근 못할 것 같아요.”
“아니, 그 반대예요. 저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았어요.”
“요네하라 씨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면 야단맞을 것 같은데…….” (145쪽)

 

“좋은 면과 나쁜 면을 전부 합하면, 인간은 좋은 면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중략) 이면을 들여다보면, 싫다고 생각했던 정치가에게 제법 귀여운 면이 있기도 하고, 좋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오히려 한심하기도 하고.” (147~148쪽)

 

“일본적인 권모술수하고는 거리가 먼 분. 우직하고 긍정적이며 대범하지요. 같이 얘기하고 있으면 정말 즐거운 분이에요. 일반적인 일본 여성을 대할 때와 같은 쓸데없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돼요. 이쪽에서 솔직하게 말을 던지면 그대로 되돌아오죠. 입에 발린 말은 전혀 못하는 사람.” (152쪽)

 

“이상형은 나무꾼 타입.” (220쪽)

 

한편, 대담 뒤에 실린 「해설을 대신하여」는 그간의 어떤 해설보다 요네하라 마리를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요네하라의 독자라면, 웃다가 울컥하게 되는 이 글을 놓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