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를 살아 고맙고 오래 아로새겨질” 서른다섯 명의 부고
그들의 뜨거운 생애와 근대적 가치를 이룬 순간의 포착

 

『가만한 당신』은 2014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동명의 기획물 중 서른다섯 편을 선별, 개작하여 묶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한국일보 선임기자인 최윤필은 현 시점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논의되고 있는 사안들, 인권과 자유, 차별 철폐와 페미니즘, 조력 자살과 동성혼 법제화 등을 위해 우리보다 앞서 헌신했던 이들을 환기하고자 국내 최초로 부고 기사 연재를 시작했다. 저자는 “떠난 자리에 잔물결도 일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을 편파적으로 주목”했고 “그들 중 특히 기억하고 싶은 이들의 이야기를 어렵게 골라”서 이 책을 엮었다. 덜 알려졌기에 더 알려져야만 하는 사람들. 이들이 겪은 억압과 불합리한 삶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생을 거의 완전연소한” 서른다섯 명을 추모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저자의 아름답고도 담담한 문체는 ‘부고’라는 형식을 넘어 따스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세상을 뜬 이들을 추억하려고 한다. 동시대를 살아 든든했고 또 내내 고마울 이들을 기억하자는 취지다. 문패는 김완수 시인의 시 '들꽃'에서 얻어왔다.
“꽃을 꺾어내면 / 들 한쪽이 가만히 빈다 / 아무도 모르게 저를 키워와선 이렇게 꺾인다 / 어쨌든 이렇게 꺾어지고 나면 / 애초에 없던 약속마저 애처롭다.”
그렇게 빈자리에 또 아름다운 것들이 '가만히' 자리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 ‘가만한 당신’ 연재를 시작하며

 

 

인권, 페미니즘, 표현의 자유, 존엄사 옹호……
덜 알려졌기에 더 알려져야 할, 가만한 당신

 

『가만한 당신』은 전쟁의 무참함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한 ‘콩고의 마마’ 레베카 마시카 카추바로 시작, 모성 신화의 허구성을 지적한 바버라 아몬드, 여성 할례 금지 운동에 앞장선 에푸아 도케누, 뉴욕 중심부에서 최초의 여성 전용 섹스토이숍을 연 델 윌리엄스 같은 인물을 통해 페미니즘의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페미니즘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사랑에 빠지듯 여성운동에 매료됐고, 페미니즘은 내 생애의 퍼즐을 풀어주었다. 나는 민권운동, 반전운동 등등을 해왔지만 내게 그것들은 의무감과 분노의 소산이었지 내 자신의 싸움은 아니었다.
-172쪽

 

또한 1960년대 흑인 인권 투쟁 현장을 누빈 존 마이클 도어, 개인 프라이버시의 중요성을 언급한 카스파 보든, 군대 민주화 운동의 기점인 앤드루 딘 스태프 등을 통해서는 인권과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재현하기도 한다.

 

당시 우리는 혁명이나 전쟁이 아니라 법적 절차를 통해 카스트제도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항상 느꼈던바, 당시 현장에는 언제나 강하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미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법에 근거한 민주적이고 헌법적인 절차들을 완성해냈다.
-139쪽

 

뿐만 아니라 장애 편견과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스텔라 영, 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동성혼 법제화 문제에 직접 맞선 니키 콰스니, 문학작품의 외설성 논란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언급한 앨버트 모리스 벤디크처럼 경직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남몰래 애쓴 이들의 삶도 담겨 있다.

 

저는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침대에서 일어나 제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칭찬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저는 장애인이 지닌 참된 성취로 평가받는 세상, 휠체어를 탄 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왔다고 해서 멜버른의 고등학생들이 조금도 놀라지 않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33쪽

 

그리고 마리화나 합법화를 위해 잡지를 발행한 마이클 존 케네디, 세계적인 군비경쟁 실태를 폭로한 루스 레거 시버드, 삶에 대한 결정권은 본인에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엘리자베스 리비 윌슨을 통해서는 근래에 비로소 논의가 시작된, 앞으로 신중히 검토하고 결정해야 할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 고민해볼 기회를 준다. 

 

나는 윤리적 관점에서 내 입장에 반대하는 이들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왜 그들은 내 생각을 짓밟으려고만 하느냐는 거다. 사람은 삶을 어떻게 끝맺을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340쪽

 
 

“부고는 끊임없이 새로 쓰여야 한다”
결코 잊지 않겠다는 뜨거운 마음을 담은 기록

 

2016년 6월, 저자 최윤필은 그의 오랜 독자이자 번역가인 김명남을 만나 신문 연재와 책 출간에 관하여 「가만한 대화」(전자책 수록)를 나누었다. 저자는 먼 이국에서 살다 간, 이름도 생소한 이들의 부고를 한국 독자들이 읽어야 할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최윤필  예전의 어떤 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그게 부고는 끊임없이 새로 쓰여야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잘 알지 못하더라도 얘기를 해야 할 때가 있고, 잘못 얘기할 때가 있으니까 그것들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거였지요. 그래서 여기 있는 이분들도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냥 이런 일을 했던 사람들로서, 또 다른 어떤 의미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언급될 때마다 다시 환기되어야 할 분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죠. 그럼 매번 새로운 맥락에서 다른 의미들이 나올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는 부고의 기능이 ‘환기’이며, 우리는 반복을 통해 그들의 삶을 매번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보았다. 말 그대로 잊지 않는 것, 중요한 가치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을 거듭 추모하는 행위만으로도 사회적 퇴행을 막고 미약하나마 진보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이다.

 

김명남  그 말씀을 들으니까 전체를 관통하는 콘셉트가 머리에 들어오는 느낌이에요. 정말 그런 근대적 가치에 하나씩 돌을 놓았던 분들이잖아요. 어떻게 그 시대에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운동을 하셨을지 놀라운 부분이 많아요. 지금의 저한테는 너무 당연하지만 그때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을 가치들, 하나를 얻어내려면 정말이지 폭력적인 수준에 가까운 투쟁을 해야만 했던 시기.

 

이처럼 『가만한 당신』은 상식이어야 할, 그러나 여전히 상식으로 자리 잡지 못한 가치를 위해 온몸으로 투쟁했고 스러져간 이들의 삶을 오롯이 담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도 우리를 뜨겁게 흔드는, 가만한 서른다섯 명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기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