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서울시교육청 중고등추천도서


' 카이로의 넝마주이'로 불리는 한 수녀의 행복론


전세계 수많은 인도주의적 단체 중에 <엠마뉘엘 수녀를 지지하는 협회>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단체가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자리한 ‘엠마뉘엘 수녀’는 평범한 수녀의 신분으로 이 단체와 회원들을 결속시키는 구심점으로서 이 단체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한 수녀의 이름으로 단체가 만들어질 수 있으며, 또한 어떤 뜻을 가지고 어떤 활동을 펼쳤기에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는가.


『풍요로운 가난』이라는 책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엠마뉘엘 수녀는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빈민구호단체 <엠마우스> 창시자인 피에르 신부와 더불어 프랑스인들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피에르 신부가 ‘파리의 넝마주이’로 불리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빈민가 속으로 뛰어들어 ‘가난’이라는 추한 현실을 몰아내기 위해 평생을 바친 엠마뉘엘 수녀는 ‘카이로의 넝마주이’로 불리며 특히 이집트(카이로, 아즈벳-엘-나클, 모카탐), 수단(카르툼), 터키, 튀니지 등 소외되어 있는 나라와 지역을 중심으로 빈민가 사람들과 동고동락한다. 그들을 돕되 무조건적인 원조에 그치지 않고, 그들과 함께하는 겸손한 자세로 그들이 진정 스스로 가난을 떨치고 일어설 수 있도록 엠마뉘엘 수녀는 그 나라의 현실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불평등과 빈곤과 불행에 맞서 싸웠으며, 아흔을 넘긴 현재까지도 프랑스에 머물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검은 수녀복과 커다란 안경, 쓰레기산을 뒤지고 다니느라 닳아빠진 운동화, 호탕한 웃음으로 인해 깊게 팬 주름살, 보자마자 반말을 하는 친근한 태도, 교회가 재산을 팔고 가난해져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교황에게 직접 전달하는 거침없고 솔직한 언행으로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그녀는,『풍요로운 가난』(원제 Richesse De La Pauvrete , 2001, 플라마리옹) 에서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은 왜 불평등한지, 왜 어떤 나라는 가난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그 가난과 맞서 싸웠는지, 한편 풍요로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왜 불만에 가득 차 있는지, 물질적 풍요가 과연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묻고 있으며, 나눔, 사랑, 자발적인 가난을 통해 행복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가난, 추문인가 행복한 삶의 원천인가?


1908년 브뤼셀에서 태어난 그녀는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맞게 된 아버지의 죽음과, 그해 성탄절, 구유 속에 누운 아기예수를 통해 세상의 불공평함에 눈뜨게 된다. 스무 살에 수녀가 된 그녀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인 ‘엠마뉘엘’이라는 이름처럼, 그후 프랑스를 떠나 전세계의 가난한 나라의 빈민가를 떠돌며, 헐벗고 굶주린 이들과 함께하는 사람이 된다.


그곳에서 90평생을 보내고 1993년 프랑스로 돌아온 그녀는 큰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이 혼란이 그녀로 하여금 이 책을 쓰도록 종용한다. 이제껏 제3세계, 즉 개발도상국들을 비롯 소위 후진국들이 가난이라는 추한 현실에서 벗어나 선진국들처럼 살 수 있도록 열심히 싸워왔는데, 부유한 나라에 돌아와 보니 그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풍요를 누리고 있는 곳에서 오히려 가난한 나라에서는 생각해보지 못한 갖가지 심각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음을 목격한 그녀는, 이 역설적인 제목의 책을 써나가면서 가난이라는 추문, 그러나 가난이 지닌 긍적적인 측면을 물질적 풍요의 폐해를 줄일 수 있는 처방전 혹은 행복한 삶의 원천으로 전환시키고야 만다.


‘나는 패러독스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가난이라는 불의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뿌리뽑고 싶을 만큼 나는 분노하게 만드는 이 악이 어떻게 풍요로움의 원천일 수 있단 말인가?’라고 외치는 그녀는 물질적 풍요의 파괴적인 면모와 가난이 가져다줄 수 있는 풍요로움이라는 패러독스 한가운데서, 그것을 넘어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이 궁핍과 구분되듯이, 가난의 풍요로움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가난을 찬미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그녀는 얘기하고 있다. 가난은 반드시 추방되어야 할 추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엠마뉘엘 수녀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가난’은 이를테면 ‘가난의 정신’일 것이다. 따라서 엠마뉘엘 수녀가 궁극적으로 얘기하고 싶은 건 물질적 풍요를 완전히 포기하고 가난한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조금만 덜 소유하고, 조금만 더 함께 나눔으로써 물질적인 가난에서 오는 정신적인 풍요와 행복의 향유일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귀기울여 할 때


‘풍요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미명 아래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 또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가? 물질적으로는 다소 풍요로워졌을지 모르나, 빈익빈부익부, 이유 모를 공허와 결핍, 나날이 수위를 높여가는 범죄 등 경제발전에 따르는 폐단들이 차츰차츰 파고들어와 우리 삶을 황폐화시켜온 게 사실이다. 우리는 너무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가? 오직 경제적 능력과 물질적 풍요만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면 소유함으로써 오히려 소유당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물론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력이란 무시할 수 없는 행복의 수단이자 지름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이 행복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물질이 모든 걸 해결해줄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정신과 마음에 공허감을 유발시키는 주요 원인인 것이다. 그러면 이 정신적 심리적 공허를 무엇으로 예방하고 메워 행복에 이를 수 있을까? 이해인 수녀는『풍요로운 가난』이 ‘어떤 소설보다도 흥미롭고, 어떤 도덕서보다도 생생하고 유익한 교훈을 주며, 어떤 신학서적보다도 신의 존재를 기쁜 확신으로 전하는’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도 이제 ‘앞으로!’라는 말을 즐겨 외치는 엠마뉘엘 수녀의 매운 질정과 절절한 호소, 그리고 비워냄으로써 채우는 지혜에 귀를 기울여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