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서울시교육청 중고등추천도서


이순 맞는 이해인 수녀의 신작 산문집


내년이면 이해인 수녀는 이순耳順을 맞이한다. 1964년 ‘풋풋한 설렘과 뜻 모를 두려움을 안고’ 수도원에 입회한 지 어느덧 40년이 되었다. 모든 것을 순리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이순을 앞두고 있어서일까. 『기쁨이 열리는 창』에 실린 수녀의 글에는 세월이 주는 넉넉함이 배어 있다.


퍽도 낯설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너무 익숙하고 친숙해졌다고 수녀는 고백한다.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서도 수도원 종소리가 고운 환청으로 들리고, 처음엔 사귀기 힘들었던 수도원 식구들도 이제는 혈연 이상으로 느껴져 떨어져 있으면 안부가 궁금해 견딜 수 없다 한다. 어쩌다 모르는 이웃을 만나도 어디선가 한 번 본 듯 정겹고 반가운 느낌이 드는 것은 오랜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들을 통해 쌓은 수도 연륜이 주는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말한다.

『기쁨이 열리는 창』은 2002년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출간 이후 펴내는 다섯번째 신작 산문집이다. 95편의 글이 실린 이 책은 ‘시의 창’, ‘기도의 창’, ‘명상의 창’, ‘독서의 창’ 이상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수도원의 이곳저곳, 이해인 수녀의 소지품, 지인들로부터 받은 선물 등 사진작가 박인숙 씨가 찍은 43컷의 사진을 통해 그동안 완전히 공개하지 않았던 수도원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수도생활 초기에는 체험할 수 없던 담백하고 수수한 빛깔의 기쁨을 새롭게 고마워하며 나는 다시 사랑의 좁은 길을 가렵니다. 넓은 마음으로 행복하게!” ─책머리에서



“함께 우는 법을 알아야만 행복해져요”


공소한 명분을 앞세우는 자들의 양심은 자꾸만 무뎌져가고 전쟁과 테러의 공방전은 날이 갈수록 극한으로 치달아간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슬픔과 분노가 쌓여가고 허무와 체념 또한 자꾸만 두터워져간다. 바깥의 날씨는 어둡고, 세상을 향해 열린 창 또한 맑지 못할 때, 사람들의 영혼은 지향을 잃고 헤매게 된다. 슬픔이 짙게 밴 이 시대에 수도자들은 어떤 기도를 할까. 이해인 수녀는 “눈물만이 기도”라고 답한다. 그리고 “함께 우는 법을 알아야만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절체절명 속에서 나아갈 길은 오직 하나. 주어진 시간 속에서 최대한 사랑하며 사는 일이다. 근심, 불안, 슬픔마저 숨기고 사랑하는 일에만 마음을 쓰자고,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조금만 더 사랑하자는 수녀의 호소는 우리를 ‘기쁨이 열리는 창’ 앞으로 안내한다.

“미움과 전쟁으로 얼룩진 / 슬픈 세상을 봅니다 / 무서운 태풍이 할퀴고 간 / 슬픈 들판을 봅니다 / 꿈과 기대가 무너져 / 폐허가 된 마음들을 봅니다 // 사는 게 힘들수록 원망이 앞서고 / 한숨만 늘어가는 우리에게 요즘은 오히려 눈물만이 기도입니다 // 끊이지 않는 근심 속에 할말을 잊은 / 우리에게 조금의 희망을 주십시오 / 서로 먼저 위로하고 받쳐주는 / 사랑이 있어야만 슬픔이 줄어들고 / 기도 또한 살아 있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십시오.
.─ 시 「슬픈 기도」 중에서


“세상이 전쟁 중일 때 / 피묻은 슬픔으로 괴로웠다는 / 나무들도 곁에서 거들었어요 // 함께 우는 법을 알아야만 행복해져요 / 잘 모르면 / 파도치는 바다에 나가 배워오세요”
.─ 시 「초록빛 편지」 중에서


“오늘만이 나의 전생애라고 근심 불안 슬픔마저 숨기고 사랑하는 일에만 마음을 쓰겠다고 자연스럽게 기도해 보세요.”
.─ 시 「단순하게 사는 법」 중에서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 // 그가 지닌 향기를 /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 되새기며 설렐 수 있다면 // 어쩌면 마지막으로 /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 우리의 삶 자체가 / 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 시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중에서



참된 기쁨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무거운 슬픔 속에서 허우적대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인 수녀는 단순한 기쁨을 가르친다. 수녀의 글은 소박하지만, 읽다보면 어느덧 잔잔한 평화가 스며들고, 충전의 힘이 솟아난다. 그는 우리에게 참된 기쁨은 저절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력해서 구해야 할 덕목’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예민한 정신으로 깨어 마음의 얼룩을 들여다보고 나와 이웃, 일상에 대한 성찰을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기쁨을 향한 창이 활짝 열린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기쁨의 발견법


‘신발을 신는 것은 / 삶을 신는 것이겠지 // 나보다 먼저 저세상으로 건너간 내 친구는 / 얼마나 신발이 신고 싶을까 // 살아서 다시 신는 나의 신발은 / 오늘도 희망을 재촉한다’


시 「신발의 이름」은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신발을 챙겨 신고 학교로, 직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작은 행동조차 살아 있기에 누릴 수 있는 기쁨임을 일깨워준다.


“날마다 새롭게 감사하며 사세요” “더 기쁘게 걸어가세요” 이제 다시는 신발을 신을 수 없는, 죽은 이들의 입을 통해 듣는 메시지는 살아 있는 우리들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울림을 전달해준다.



기쁨의 되새김


기쁨의 발견 못지않게 기쁨을 되새김하는 것도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된다. 어느 날 택시를 탄 수녀는 운전대 앞에 염주나 묵주도 아닌 붉은 장식품이 걸려 있는 것이 궁금하여 그 까닭을 묻는다. “술 담배도 못하는 내 유일한 취미는 낚시인데요. 일하다 지치면 미리 기뻐하며 웃어보려고 이렇게 ‘찌’를 달아둔 거죠” 하고 운전사는 답한다. ‘수도자의 기도생활에도 늘 기쁨의 되새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는 가끔 삶이 메마르고 힘들 적엔 ‘찌’를 바라보며 씨익 웃는 순박한 그 얼굴이 생각나 함께 웃어본다고 쓰고 있다.



기쁨을 향한 노력


기쁨은 때로 노력과 결단을 요구하기도 한다.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내내 궁리만 하지 말고, 자꾸 결심만 키우며 안된다고 안달하지 말고, 눈꽃처럼 순결하고 서늘한 결단을 내려야 함을 일깨운다. 말로써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는 단호한 노력을 멈추지 말고, ‘마음은 그게 아닌데 말이 그만…’ 하는 변명을 자주 하지 않도록 조금만 더 깨어 있자고 말한다. 사랑의 의무에 소홀했던 날들과 결별하고 좀더 구체적인 결단을 하자고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