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 권장도서 선정

 

일본, 독일, 스페인, 한국 정착,

한 코즈모폴리탄의 건강한 에너지가 넘치는 이야기

 

나카가와 히데코. 일본 태생의 귀화 한국인으로 한국 이름은 중천수자中川秀子. 일본 이름의 한자 독음을 땄다. 프랑스 요리 셰프인 아버지와 플로리스트인 어머니 곁에서 어릴 적부터 요리, 꽃꽂이, 테이블 코디네이트를 배웠다. 아버지가 서독의 일본대사관 전속 요리장으로 파견되면서 일곱 살 때 서독으로 이주했다. 3년 뒤 일본으로 돌아와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 입학 후 동독으로 유학을 떠났다. 졸업하고는 홀연히 스페인으로 떠났다.
1994년 한국에 왔다.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연구평가원과 육군사관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쳤다. 궁중음식연구원에서 3년간 공부한 최초의 일본인 수강생이었다.
한눈에 봐도 흥미로운 이력이다. 『셰프의 딸』은 여러 나라를 삶의 무대로 삼은 한 코즈모폴리탄의 특별한 이야기를 담았다. 다양한 갈림길 앞에서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마음이 이끄는 곳을 택했던 사람. 그는 일상에 파묻혀 꿈을 접어둔 이들에게 ‘안주’와 ‘정체’ 대신 스스로 찾아가는 삶의 기쁨, 또 다른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언어와 문화는 달라져도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아버지의 요리가 언제나 마음에 있다

 

그가 세계를 누빈 데 진로나 자기계발 같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 시절 동기들이 서독 유학을 선택할 때 ‘서독에 살았던 어린 시절, 장벽 너머의 사람들이 궁금했다’라는 이유 하나로 동독 유학을 결정했다. 동독에서 사랑에 빠졌던 스페인 남학생의 나라가 궁금해, 모두가 취업 준비를 할 때 훌쩍 스페인으로 떠났다. ‘서울에서 살아보고 싶은걸’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연희동에 하숙을 구한 뒤였다. 이렇듯 강한 추진력과 기동력은 ‘이곳이 아닌 곳’에 대한 열망과 호기심에서 나왔다. 앞날을 미리 걱정하지 않고, 마음이 동動하면 몸도 동動하는 성격도 한몫했다.
이국에서의 삶은 그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어린 시절 서독의 숲속에서 함께 뛰놀던 친구들, 동독 유학 시절 배급소에서 어렵게 구한 토마토로 다 함께 토마토소스 파스타를 만든 기억, 바르셀로나 올림픽 시절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며 바쁘게 살았던 날들, 서울에 와 학교에 다니고 일본어를 가르치며 정착하기까지의 시간들. 떠나고, 만나고, 살고, 사랑하고,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마치 일생의 과업인 듯 그는 건강한 에너지로 삶을 풍성하게 채웠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요리가 있었다.

 

“국제결혼 정도로 국적까지 바꿀 필요 있어?” 하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지만, 내심 코즈모폴리탄으로 살아가기를 바랐던 내게 국적은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다. 다만 어릴 적부터 언어도 문화도 다른 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뿌리 없는 풀처럼은 살지 말아야지’ 하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한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해왔다.
이런 나에게 아버지가 프랑스 요리 셰프라는 사실은 든든한 정신적 기둥이었다. 어디를 가든 마음 한구석에는 아버지의 요리가 있었다. 아버지의 레시피와 함께. 그 덕분에 나는 뿌리 없는 풀이 아닌, 보잘것없긴 하지만 코즈모폴리탄으로서 여러 나라를 오갈 수 있었다.

-6쪽, 「책을 내면서」에서


 

셰프가 된 ‘셰프의 딸’의 철학,
특별한 순간에는 언제나 요리가 있었다

 

저자의 아버지는 도쿄 임페리얼 호텔 셰프였다. 서독 일본대사관 전속 요리장을 지낸 뒤 고향인 사도섬에 내려가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60년 가까이 요리사로서 외길을 걸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우며 자연스레 요리와 가까워졌다.

 

커다란 도마를 앞에 두고 정신을 집중하여 사과 껍질을 벗기고 은행잎 모양으로 썰 때면 학교에서 있었던 싫었던 일, 괴로운 일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런 일들을 잊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평온해지며 이제부터 즐거운 날들이 펼쳐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셰프의 조수’ 역할을 통해 요리를 만드는 즐거움, 누군가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기쁨에 눈떴다.

-94~95쪽, 「마법의 애플파이」에서

 

그러나 처음부터 요리의 길을 꿈꾼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하얀 요리사복을 싫어했고, ‘전문가의 맛’이 나는 요리가 지겹다고 반항했다. 온 가족이 외식을 하거나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을 함께 보낸 기억이 없었다. 어린 그에게 아버지가 셰프라는 사실은 결핍과 충족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부모님은 그가 요리의 길을 가길 바랐지만, 고집을 부려 대학에서 언어학과 국제관계론을 공부했다. 그리고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났다.

 

대성공이었다. 소스 가쓰돈이나 우동을 만들었을 때처럼 모두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없이 접시를 비웠다. 요리를 만드는 사람에게 이 이상의 칭찬은 없다. 동독까지 독일어 공부를 하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매일의 생활 중 배급소에서 구한 약간의 재료를 어떻게 잘 살려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가 최우선 과제였다. 대학 과제는 그 다음 문제. 배가 고프면 요리를 했고, 먹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었다.

-143~144쪽, 「배급소 순회로 구한 토마토」에서

 

저자는 이국에서의 삶을 회상하면 가장 먼저 요리가 떠오르고, 그 요리를 누구와 어디에서 먹었는지 차례로 생각난다고 한다. 서독에서 배운 우유죽, 어른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준 와인젤리, 동독 유학 시절 룸메이트와 아펠쿠헨(사과 케이크)을 먹은 추억, 열심히 막자를 저어 만드는 알리올리 소스와 입에서 사르르 녹는 햄 하몬의 맛으로 기억되는 스페인, 한국인 남편과의 사랑에 큐피드 역할을 한 카르보나라. 그는 언제 어디서건 아버지의 레시피 노트를 보물처럼 간직했고, 아버지의 요리와 어머니의 손맛을 이국의 친구들에게 전했다. “‘食’은 최고의 휴식이자 소통, 그리고 행복”이라는 그의 신념은, 기자와 번역가 생활을 거쳐

 

 

매일매일 맛있는 삶, 맛있는 사람 관계
우연이 운명이 되고, 떠남이 시작이 되었다

 

한국 생활 17년째. 나카가와 히데코는 연희동 자택에서 요리 교실 ‘Gourmet Lebkuchen(구르메 레브쿠헨)’을 운영하고 있다. 매달 60~70명이 그에게 요리를 배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떠났고, 오픈 마인드로 ‘다른 나라’ ‘다른 삶’을 흡수해온 사람. 우연한 선택은 기회를 만들고 운명이 되었다. 떠남은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그는 오늘도 소중한 사람과 마주한 요리의 기억들, 맛있는 시간들로 인생을 채운다.

 

아버지가 만든 요리 한 접시에 기뻐하던 나는 그 기쁨을 내 가족들에게도 맛보여주기 위해 요리를 만든다. 한 접시 한 접시를 요리 교실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또 그 행복이 다음 사람들에게로 전해진다. 요리를 통해 사슬처럼 연결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이 책은 탄생했다. 요리하고, 먹고, 마시고, 수다를 떨고, 웃고, 때로는 눈물도 흘려가며 쓴 이 책은 한국 생활에서 얻은 귀중한 만남 덕분에 나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