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엔 카메라, 한 손엔 기저귀 가방
아이를 업고 레디고를 외쳤던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이야기

 

32세.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영화 제작에 들어간 감독이 있다. 등에 갓난아기를 업은 채 한 손엔 카메라 한 손엔 기저귀 가방을 들고 매일 레디고를 외친, 아침마다 장을 봐 스태프 밥을 지어 먹인, 치맛단이 해어지는 줄도 모르며 녹음실 계단을 오르내린, 영화를 배급하기 위해 아이를 업고 팔도를 돌아다닌 감독.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의 이야기다.
‘최초’는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쉽다는 특점이 있지만, ‘최초의 여성’까지 사람들이 기억해주는지는 알 수 없다. 단 한 편의 영화 <미망인>을 남기고 사라진 이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은, 1997년까지 그 존재가 잊혔다가 서울여성영화제가 그의 존재를 추적해 <미망인>을 재개봉하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그후 임순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에서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는 그의 모습이 공개됐지만 관심은 잠시였고, 그의 삶과 예술은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는 올해 2017년 4월 LA에서 아흔다섯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책 『박남옥』은 박남옥 감독이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며 쓴 자필 원고를 그 딸 이경주가 매일 밤 컴퓨터로 옮겨 저장해두었다가 올해 글의 순서와 사실 관계를 또 한 번 정리해 세상에 내보인 것이다. 당대 영화계의 분위기와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사와 현대사의 소중한 사료이나, 비범한 필력과 삶을 돌아보는 애수 짙은 시선은 한 편의 곡진한 문학작품에 가깝기도 하다.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가 추천사를 쓰고, 소설가이자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이었던 조선희가 서문을 썼다.
마음산책은 ‘우리 여성의 앞걸음’이란 카테고리 아래 앞으로 각계각층 여성의 인생사와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길 예정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이 직접 인생을 회고하며 쓴 『박남옥』과 한국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의 평전, 『노라노』가 그 첫걸음이다.


이 자서전은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아무런 인프라가 없는 1950년대 영화판에서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며 악전고투했던 영화 <미망인>의 메이킹 다큐다. 또한 동시에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50년의 한국 현대사를 투포환 선수답게 거침없이 가로지르며 질주하는 씩씩하고 도전적이고 재능 있는 한 여성의 연대기다.
―조선희(소설가, 전 한국영상자료원장), 「서문」에서


 

 

‘너무 일찍 영화계를 방문해
시대적 한계에 등 떠밀려 사라졌던’

 

박남옥 감독이 1999년에서 2002년까지 여든을 즈음하여 약 3년에 걸쳐 쓴 이 책은 유년부터 노년까지 다사다난했던 인생을 회고한다. 학창 시절 운동에 재능이 있어 투포환 선수로 활약, 3년 연속 한국 기록을 갱신한 이야기부터 이화여전 가정과에 들어갔다 중퇴하고 도쿄에 미술 유학을 가겠다고 밀항선을 탔다가 배가 좌초하는 바람에 일본의 수용소에 있다가 돌아오는 이야기, 신문사에 취직해 문화부에서 영화평을 쓰던 이야기, 영화 촬영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영화 일을 배우고 영화계 사람들과 밤을 지새며 나눈 추억, 배우 김신재를 향한 연모, 그녀와의 첫 만남과 우정, 늦은 결혼…… 등등이 그녀의 개인사라면, 영화계가 좌익과 우익으로 분열하던 양상, 한국전쟁으로 인한 가족의 이산, 폐허 속에서 동생들을 수소문하는 과정, 4·19 때 다치고 온 동생을 나무라는 이야기, 박정희 대통령의 각국 순방을 책으로 만들던 출판사 재직 시절 이야기 등은 현대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한편 1954년 출산 직후 남편 이보라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전쟁의 미망인을 다룬 영화 <미망인>을 촬영, 제작하는 과정 또한 진진하다. 매일 장을 봐 십여 명의 스태프들 밥을 먹이는 일에 힘겨워 하다 하루 중국 음식을 시키는 날 내심 안도하고, 자동차가 지나가는 장면을 찍기 위해 종일 기다리는가 하면, 다른 이에게 빌려준 촬영기가 돌아오지 않아 애를 태우다 직접 아기를 업고 진주를 향한다. 인파를 피해 가덕도에서 촬영을 하다 미끄러져 다리를 심하게 다쳤으나 아무에게도 내색을 못하고 혼자 앓은 일화, 한겨울 빈집에서 필름을 편집하다 아이가 폐렴 걸리기 직전까지 가 병원을 전전하는 모습, 녹음을 해야 하는데 연초부터 여자 작품을 녹음할 수 없다며 박대당하는 것까지 이 한 편의 영화를 찍기 위해 박남옥 감독이 거친 고생이 담담히 펼쳐진다. 영화 제작이 끝나고 나서야 녹음실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갈가리 해어진 치마가 눈에 들어왔다는 에피소드를 통해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영화를 찍고 전국을 헤맸던 박남옥 감독의 본인조차 설명하기 어려운 열정을 가늠해볼 수 있다.


영화가 아무리 좋고 중요하다 해도 이렇게까지 목숨 건 용사처럼 투쟁해야 하나.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시작했으면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은 지금도 변치 않는 나의 신념이지만, 이때부터 나는 상처로 인한 중병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171쪽


이렇게 해서 우리는, 너무 일찍 영화계를 방문했고 마치 ‘1인 군대’처럼 분투하다가 시대적 한계에 등 떠밀려 사라졌던 한 ‘신여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이제, 젊은 엄마 등에 업혀 있던 아기가 어른이 되어 그 엄마,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의 일생에 걸친 분투기를 전해주는 것이다.
―조선희(소설가, 전 한국영상자료원장), 「서문」에서


 

 

등에 업혀 있던 아기가 어른이 되어 건넨 분투기
딸 이경주의 에필로그

 

책을 읽으면 후반부부터는 박남옥 감독의 외동딸 이경주가 아기에서 아이가 되고 어른으로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딸 이경주가 작고한 어머니의 글을 정리하며 느낀 감회를 토로하는 에필로그는 흘러간 삶 면면을 그대로 들려준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항상 듣는 얘기는 내가 엄마 얼굴을 많이 닮았다는 얘기. 그 말은 언제나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우리 엄마는 못생기고 주책스럽고 과격한데,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엄마가 창피했고 엄마처럼 되지 않으리라 굳건히 다짐하며 컸다. 한데 그건 주제넘은 걱정이었다는 것을 엄마가 간 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남기고 간 원고를 다시 읽으며 깨달은 건, 나는 엄마를 닮기는커녕 비슷한 거리도 근접하지 못한다는 것. 얼굴 생김은 어떤지 몰라도 인간 구성에 있어서 나는 비슷하지도 않은, 흉내도 못 내는 소인배인 것이다.


그녀는 멋진 인간이었다. 용기와 신의가 있는, 통이 크고 인간미가 있는, 성실한 노동 철학을 가진, 그리고 사랑이 있는 그런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이 철없는 딸은 그런 그녀에게 걸맞은 대우를 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야 미안하고 보고 싶다.
―딸 이경주, 「에필로그」에서


『박남옥』은 최초의 여성 감독이 남긴 한 시대의 기록이었다는 점에서 사료의 가치도 충분하지만, 의도하지 않았으나 사람들을 웃게 또 울게 만드는, 삶에 대한 단순하고도 진솔한 시선 및 고백을 통해 문학으로서도 그 가치가 충분함을 보여준다. 이는 아마 좋아하는 일에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들고 그 일에 열정을 불사르던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삶에 대한 애정과 애수일 것이다. 그 애정과 애수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그 어떤 본질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추천사

 

한복 치마저고리 차림에 갓난아기를 포대기로 들쳐 업은 채 영화 현장에 서 있던 박남옥 감독의 흑백사진 한 장을 처음 봤던 20년 전, 나는 놀라움과 뭉클함을 함께 느꼈다. 스태프와 배우 들의 밥을 직접 해 먹이며 레디고를 외치고 한 손엔 촬영기를, 또 한 손엔 기저귀 가방을 들고 아기를 업고 기차를 탔던 여성. 치마 끝이 갈래갈래 찢어지는 것도 모른 채 녹음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영화를 만들었던 여성. 그의 뜨거운 열정이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은 임순례 감독과 함께 2001년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에서 처음으로 그의 육성을 담은 바 있다. 한국 영화 최초의 여성 감독으로, 단 한 편의 영화를 남겼지만 “영화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했던 그 이유를 이 책으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뜬 지 채 1년이 안 돼 나온 『박남옥』을 읽으며 나는 다시 한 번 뜨겁고 절실하게 살았던, 나아가 자신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관조할 줄 알았던 한 영화인의 삶을, 한 여성의 삶을 돌아본다. 일상의 소묘 속에 담긴 근현대사 풍속은 덤으로 누릴 수 있는 재미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