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 록의 살아 있는 전설, 에릭 클랩튼의 자서전 출간
그 누구보다 솔직하다! 누구도 저항하지 못할 만큼 감동적이다!


소설가 김중혁이 “〈원더풀 투나이트Wonderful Tonight〉라는 곡 역시 전혀 다른 노래처럼 들렸다. ……첫 부분의 기타 소리를 듣는 순간 내 눈에는 꿈결 같은 세상이 펼쳐진다. 끝없이 길게 이어진 하얀 천이 부드럽게 바닥을 쓸며 지나가는 모습이 잡힐 것처럼 그려진다”라며 극찬한 뮤지션, 〈레일라Layla〉 등의 명곡으로 한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는 기타의 신, 에릭 클랩튼의 자서전이 출간되었다. 그는 10대 시절 놀라운 재능 덕분에 일약 영국 클럽 씬의 영웅으로 부상했고, 세계 최초의 슈퍼그룹 ‘크림’을 결성하면서 월드스타가 되었다. 이후 ‘블라인드 페이스’ ‘데릭 앤 더 노미노스’ 등 유수의 밴드를 거치며 기타 하나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하지만 반짝이던 시절도 잠시, 알코올과 마약 중독,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와의 사랑과 결별, 아들 코너의 죽음 등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에릭 클랩튼』에서 클랩튼은 성공과 비극이 변주를 거듭했던 자신의 삶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솔직하게 들려준다. 사생아로 태어난 어린 시절과 스캔들로 가득했던 한 개인으로서의 삶, 또한 기타를 잡기 시작한 순간부터 롤링 스톤스, 비틀스 등 록 스타들과 교류하며 자신만의 음악 세계에 다다르기까지 뮤지션으로서의 삶 전체가 담담히 펼쳐진다. 이미 환갑을 넘겼기 때문일까. 그는 전설적인 록 스타의 정체를 기꺼이 발가벗기고 화려한 삶 뒤에 숨은 실상을 드러내기에 주저치 않는다. 이 책은 클랩튼의 가장 개인적인 성장담이자, 20세기 후반의 가장 역동적이며 가감 없는 록 음악사라 할 만하다.



화려한 삶 뒤에 숨겨진 자연인 에릭 클랩튼의 삶
Sex and Drug and Rock ’N’ Roll


클랩튼의 삶을 요약하면 한마디로 ‘Sex and Drug and Rock ’N’ Roll’이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그의 삶은 소설로도 못 쓸 한 편의 대 서사시다. 에릭은 1945년 영국 서리 주 노동자 계급 집안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조부모의 손에 자라 아홉 살이 될 때까지 엄마를 누나로 알고 지냈으며, 이로써 평생 지우지 못할 트라우마를 입는다. 또 1960년대 밴드 활동 시기에는 멤버들과 끊임없는 갈등에 시달렸고, 패티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자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복용과 금단 증상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갔던 그 시절, 그는 자주 약에 취해 무대에 올랐고 음주 운전, 공연 중단 등의 사건사고로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1970년대 초반, 마약 중독을 극복하고 빅셀러 앨범 《오션 블러바드 461번지461 Ocean Boulevard》와 《슬로 핸드Slowhand》로 건재함을 과시하는 듯했지만, 이번에는 알코올 중독의 수렁에 빠진다. 이후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활원에 입소한 그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과 직면해야 했다.


나와 같은 방을 쓴 친구는 토미라는 뉴욕 소방관으로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기타의 신 클랩튼’으로 존경을 받으며 남들 위에 군림할 줄만 알았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고, 기타를 빼앗기고 음악을 할 수 없게 된 나는 한심한 존재였던 것이다. 정체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랬기에 내가 일차적으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이고 남들처럼 병으로 고생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을 때, 내가 느낀 상실감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_265∼266쪽


롤러코스터 같은 그의 삶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80년대 아버지가 되어 평탄한 삶의 궤도에 오르자마자, 네 살 난 아들 코너가 황당한 사건(아파트 추락사)으로 죽는 비극이 닥친다. 예전이었다면 슬픔을 견디기 위해 중독의 세계로 도피했겠지만 이제 그는 음악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또 하나의 명곡이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이다.


한편 자신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여자관계에 집착했던 클랩튼은 지속적인 상담으로 자기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쓴 일기를 이 책에 공개한다. 그는 파국으로 치닫던 그간의 관계가, 어머니에게 거부당한 경험과 닿아 있으며 ‘나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재연해줄 여자를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라고 고백한다. 가족관계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숨기고 싶은 가장 내밀한 상처―막막했던 재활원 시절, 그를 지배한 성적 수치심―등을 회고하는 장면은 여느 자서전보다 용기 있다.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이 단순한 자서전을 넘어, 악마가 부리는 시기심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삶을 견뎌낸 생존자의 기록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상담 때 크리스가 처음으로 건넨 질문은 이러했다. “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봐.” 대단히 간단한 질문이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머리 위로 피가 솟구쳐 그녀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대체 왜 이래! 내가 누군지 몰라서 물어?” 물론 나는 내가 누군지 몰랐고 그래서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부끄러웠다. 나는 10년째 술을 끊고 완전히 성숙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정신적 나이 열 살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중이었다. _341쪽



눈앞에 펼쳐지는 20세기 후반 록 음악사
그의 음악적 동료와 스승들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클랩튼은 자연인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뮤지션이다. 당연히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사랑한 음악과 동료 뮤지션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게다가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록 음악을 비롯 온갖 문화적 실험이 만개하던 시기가 아니던가.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의 멤버들, 지미 헨드릭스, 밥 딜런, 트래픽의 스티브 윈우드, 더 후의 피트 타운센드, 듀언 올맨, 더 밴드, 제네시스의 필 콜린스 등등 기라성 같은 뮤지션들에 대한 이야기를 묶으면 그 자체가 바로 생생한 20세기 후반 록 음악사다. 여기에 로버트 존슨, 머디 워터스, 버디 가이 같은 블루스 선배들과 애틀랜틱 레코드의 아메트 어티건, 매니저 로버트 스티그우드 등 당대에 록 음악계의 패트런들과 함께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록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참신한 음악이던 시절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다. 에릭 클랩튼은 그 흐름의 한복판에서 뮤지션이자 디자이너로서(그는 킹스턴 아트스쿨 출신이다) 당대 유행에 상당히 민감했으며, 그 모든 관심사는 무대와 의상과 음악적 실험에 반영되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음악계 동료들에게 보내는 존경과 찬사의 고백이다. 특히 자신을 성장시킨 뮤지션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그리움을 표현한 마지막 장 「에필로그」 는 그의 인간적인 성숙과 뮤지션으로서의 철학을 엿보게 한다. 음악평론가 임진모가 클랩튼의 최근 트리뷰트 앨범―블루스의 거장 비비 킹, 로버트 존슨, 제이제이 케일과 함께한 세 장의 음반, 《라이딩 위드 더 킹Riding with the King》 《미 앤 미스터 존슨Me and Mr. Johnson》 《더 로드 투 에스콘디도The Road to Escondido》―을 가리켜 “가히 염화미소라 할 만한 노장의 근래 면모를 압축한다”고 평한 것처럼 말이다. 모든 음악이 뮤지션의 삶으로 설명될 수만은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 음악으로 승화시킨 삶에 대한 기록은 확실히 남다른 울림을 전한다. 『에릭 클랩튼』 또한 그 감동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오랫동안 내가 무대와 스튜디오에서 함께 연주하면서 영광스러워하고 기뻐한 음악가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지만, 모두들 이런저런 이유에서 잊을 수 없다. 대부분의 뮤지션들은 무언의 철학자다. 연주자들 사이에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영혼을 치유해주는 사람이라는 공감대가 암묵적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이런 책무를 다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모두가 이를 인식하고 있다. _4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