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을 선택한 작가


남들처럼 낮에 일하고 밤에 쉬는 시간표를 지킬 수 없었던 작가 원재길은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서울 생활에 길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시골 생활을 택했다.


이 책엔 빈틈없이 짜여진 기계적 일상에서 벗어난 느긋하고 운치 있는 삶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1년에 두 달 가까이 여행을 다니며, 명산의 약수터를 찾아 돌아다니고, 그리움을 간직한 채 어딘가에서 올 엽서를 기다리고, 집에 나무를 키워 그들과 대화하고, 추억만이 아닌 현실 속에 자기만의 소중한 공간을 확보했다. 그리고 소소로운 대상에 대해 명상할 수 있는 기회도 얻어, 냉장고를 이용한 다이어트 방법, 냉장고를 음식물 보관 외에 달리 사용하는 방법, 풍선껌 멋지게 부는 방법, 남자에 대한 고정 관념 깨기, 자전거에 대한 예찬 등의 기발하지만 엉뚱한 착상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원재길은 “무조건 빠른 걸 좋아하며 속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현대 문명 속의 속도광들에게 느림의 미학”을 예찬한다. 그러다가 느림과 게으름의 구분이 모호해져서 자일리톨 껌과 치실을 이용한 구강 청소로 양치를 대신하는 베짱이가 되기도 했지만, 결국 그의 글에서 느낄 수 있는 건 게으름이 아니라 삶의 여유로움에서 묻어나오는 웃음이다. 



오래 전 추억 더듬기


이 책은 새로 시골 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변에서 겪게 된 풋풋한 이야기들을 주로 담았지만, 먼 과거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도 했다. 동전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다가, 지금 손바닥 위에 놓인 동전의 발행 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막내 동생의 뱃속을 거쳐 다시 옆집 똥개 메리의 뱃속으로 들어간 10원짜리 동전, 그것이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작가의 손에 놓인 그 동전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어차피 돈이란 돌고 도는 것이니까. 그리고 어린 시절의 먹을거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들판에 널린 까마중, ‘마’라는 식물 뿌리, 불에 구워 먹던 개구리 뒷다리, 삼촌이 덜덜 떨며 사다리를 올라가 잡아주던 참새 등, 작가의 별명 ‘원시인’(‘원’이라는 성씨에 시인이라는 호칭을 붙인 별명. 그의 고향 암사동의 대표 명물인 선사 시대 유적지에 어울리는 별명이기도 하다)에 걸맞게 주로 채취를 통해 얻은 먹을거리 들이다. 동네에서 놀이를 할 때 작가 원재길의 주된 간식거리는 바로 아침식사 콩밥에서 혀를 굴려 솜씨 좋게 발라낸 콩.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말을 더듬던 작가의 말더듬이 말투를 놀리다가 결국 성인이 된 뒤 자신이 말더듬증에 걸려버린 친구 ‘메기’, 한 우물을 파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얼마 전까지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우는 데 매진했던 친구 ‘까마귀’ 등 추억 속의 인물들을 현재 속에서 만난다.


기억 저편에 있는 소중한 친구가 또 하나 있다. 17년 전에 잃어버린 수첩. 그러나 신촌 어느 카페 화장실 변기에 빠뜨린 그 수첩은 지금 되찾는다 해도 그다지 쓰임새가 없을 것 같다. “저 멀리 아득한 곳으로 흘러간 날의 추억을 더듬게 만들 뿐.”



비범한 괴짜 인생들


이 산문집에는 평범하거나 남다른 삶을 살았던 문인,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시인 기형도, 지금도 가끔 백옥처럼 하얀 옷을 입고 작가 원재길의 꿈속에 나타나는 그는 감성이 풍부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학교 다닐 땐 늘 과 수석이었고, 글쓰기면 글쓰기, 그림이면 그림, 노래면 노래,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는 자기 시의 스승을 보들레르라고 하였다. 명랑하고 유머 감각이 풍부했지만 시에 있어서만큼은 파리의 우울을 노래한 보들레르처럼 서울의 우울을 노래했다. 소설가 성석제와는 어느 술집에서 밤을 하얗게 새우던 날의 에피소드가 있고, 하루의 반을 잠자며 보낸다는 시인 박성학의 이야기도 있다. 박성학은 아주 싸움을 잘하는 시인이다. 주먹을 잘 쓰는 싸움꾼이 아니라 말 몇 마디로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기술이 뛰어난 친구다. 전 국민이 한창 새로운 주민등록증을 만들던 시절, 장발인 채 찍은 증명사진이 문제가 되어 동사무소 직원과 티격태격했던 사건. 결국 머리에 가려진 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귀만 나온 사진을 다시 찍어 내밀면서 직원을 혼내주었다. 그리고 젠 체하는 인물을 보기 좋게 골탕 먹인 일도 있었다. 어느 눈보라가 치던 저녁 어스름, 박성학이 지키던 산장에 하룻밤 묵어가길 청하는 길손이 있었는데, 그의 잠자리를 마련하는 중에 길손이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들이미는 것에 분개하여 문밖에 몸이 얼어붙도록 세워놓았던 것이다.

 

사실 문인, 예술가 중에는 괴짜가 많다. 파리 한복판에 개미핥기를 데리고 다니던 먼 나라의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 울다가 세월을 다 보낸 시인 박용래, 안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술값을 달라고 조르던 천상병 시인……. 지금처럼 개성이 사라지고 획일화된 뿡어빵들의 시대에 그들의 기행은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 되었음을 덧붙여 전해 준다. 



소박한 이웃들 이야기


이 책은 소박한 이웃들의 작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예술가처럼 남다른 기행(奇行)을 보여주는 건 아니지만, 그들의 삶을 욕심 없이 지켜보면 사람 사는 맛을 느끼게 된다. 약수터에서 자주 만났던 팔순 할아버지, 그는 몇 년 전 동네를 떠나 이사했지만 전에 살던 곳이 그리워 매일 약수터를 다시 찾는단다. 걸음이 너무 느려 살얼음판을 걷는 어린이 같다. 이미 굳어버린 허리 때문에 발톱을 깎을 수 없었고, 웃자란 발톱으로 인해 걸음을 잘 걷지 못하는 것인데, 손주 녀석들에게 손톱깎기를 내밀고 깎아달라고 하니 할아버지의 발톱이 무섭다며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겨울이 되면 사냥할 재미에 들떠서 눈 오기를 기다리는 식당 주인 임씨 아저씨, 프로레슬러 아내와의 연애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한 맥주집 사내, 그리고 작업실을 오가며 인사를 주고받던 동네 주민들. 이들의 이야기가 살갑게 그려졌다.

 

어느 날 참새 손님이 찾아온 일도 반가운 방문이었다. 올빼미 친구들이 놀러 온 어느 날, 참새는 좀 과격하다 싶은 방법으로 작업실을 찾아왔다. 돌풍에 휩쓸려 뒤창 문에 부딪힌 것이다. 하루를 간호해 주었는데, 생기를 되찾아 밤새 푸드덕거렸다. 잠 한숨 자지 못한 작가는 미처 완전하게 회복되지 못한 참새를 멀리 날려버린다. 그리고 한번만 더 찾아오면 어린 시절 먹을거리처럼 쓱싹해 버린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산문의 향기, 삶의 향기, 인간의 향기


시골에 정착하면서 작가는 바쁜 대도시 생활 속에서 잃었던 것들을 되찾아갔다. 삶의 여유로움, 자연과의 대화, 기다림, 추억,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응시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친밀한 이웃과의 관계. 우리가 사라져가는 것들에 무감각해져 있을 때, 작가는 모두가 잠든 시간에 깨어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올빼미처럼, 우리가 잃어서는 안 될 것들을 섬세하게 읽어냈다. 결국 작가가 아쉬워하는 것은 도시 생활 속에서 음미하기 힘들었던 인간의 향기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에서 “모두 인사하며 삽시다”라고 호소하며 도시 생활의 해체된 이웃 관계를 아쉬워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