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문예진흥원 우수 문학예술도서


작가 신경숙의 아주 특별한 신작


『풍금이 있던 자리』이후부터 지금까지 출간되는 소설마다 문단의 비상한 주목을 받는 동시에 독자들까지도 한 쾌에 아우르는 저력을 발휘해온 작가 신경숙의 신작『J 이야기』가 <마음산책>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등단 초기부터『풍금이 있던 자리』를 출간하기 전까지 신문이나 잡지 사보 등에 썼던 것들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글들을 전면수정하고 새롭게 재구성했다. 20대의 신경숙이 썼고, 마흔이 된 신경숙이 새롭게 고쳐썼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작품은 그래서 뼈대는 청춘, 상큼한 사랑 이야기되 문체는 성숙한 작가의 그것으로 오롯이 살아 있다.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여러 곳에 발표했던 글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결된 구성과 이음새가 단단한 책으로 거듭난『J 이야기』는 신경숙 문학의 색다른 측면을 발견하는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비루하고 먹먹한 삶의 무늬가 놀라우리만치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풍금이 있던 자리』에서부터 그녀는 보잘것없는 것들을 보듬는 마음, 그리고 머뭇거림과 흔들림으로 겹겹이 에워싸인 특유의 문체로 읽는 이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아왔다.


나직하게 속삭이는 작가의 목소리를 따라가다가 문득 서늘한 기운에 고개를 들면 어느새 자신이 삶의 깊은 곳에 이르러 있음을, 내 안에도 떨림판이 있었음을 발견하는 순간을 경험하곤 하는데, 인간 영혼의 심연과 세상의 배면 속으로 꼼짝없이 몰아넣는 작가의 이러한 특장은 바로 흡인력 강한 문체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J 이야기』를 찬찬히 읽어보면 그 문체가 어디로부터 나왔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바로 J를 비롯해 주변의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폭넓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인간에 대한 통찰과 연민,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J’의 탄생, 일상의 희로애락이 피워올린 꽃  


‘그녀를 J라 지칭해놓고 그녀를 재구성해보는 동안 저도 모르게 여러 번 웃었어요. 이삿짐을 싸다가 사진첩을 펼쳐놓고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기분이었습니다. (……) J라는 익명의 존재에게 그때의 내 열망을 죄다 모아주는 작업을 하는 시간은 뜻밖에 즐거웠어요. 엇나가고 비틀렸던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아 한참을 몰두했습니다.


이제 여기, J는 나이기도 하고 당신이기도 할 겁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언제나 헤어질 수도 있는 그런 존재일 겁니다. 당신이 지니고 있는 수첩 한귀퉁이에 아무렇게나 적혀 있거나 지워졌거나 쓰다 말았거나 잊혀진 이름의 대신이 되면 좋겠습니다.’(「글뒤에」중에서)


작가는 수많은 ‘그녀들’에게 ‘J'라는 이름을 달아주었고, 그 익명의 존재에게 작가의 젊은 시절, ‘아름다운 순간들을 차분히 녹여내지 못하고, 언제나 이글이글 타오르는 욕망과 저울질하는 시절’(「냉장고 문을 여는 여자」)의 열망을 죄다 모아주었다. 그리고 그 J는 다름아닌 너와 나, 우리의 초상으로 확장된다.   


모두 4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J라는 한 여성이 나고, 자라고, 어른이 되면서 여러 다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세상의 많은 일들을 겪어내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사람들의 내면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상처와 일상의 균열 속에서 순간순간 찾아오는 삶에 대한 통찰, 그리고 인생을 관통하는 그 무엇들에 관해 촘촘히 적어나가고 있다.


J가 직접 경험한 일들이 대부분이지만, 그중에는 J가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있고, 친구로부터 받은 편지도 있고, 또 J가 보낸 편지도 있으며, 타인이 보는 J의 모습도 있다. J와 J의 가족, 친구, 애인, 선후배, 직장 동료, 남편, 딸 연이가 엮어내는 마흔네 편의 이야기들은 각각의 독립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으며, J라는 한 인물의 하나의 연작으로도 읽을 수도 있다.         

‘환한 대낮에 깜빡 낮잠이 들었다가 어스름녘에 깨서는 아침인 줄 알고 학교 늦었다고 책보 챙겨갖고 신작로까지 나갔’(「통화」)던 기억처럼 44편의 글 대부분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음직한, 그래서 공유할 수 있는 일상의 친근한 소재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하여 작가는 ‘J’가 ‘당신’이라고, ‘J의 이야기’가 바로 ‘당신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상큼한 웃음과 쓸쓸한 여운의 이중주 ―J는 누구인가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작가의 글들에서는 작게 가려져 있던 밝음과 유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J 이야기』에서 작가는 J와 J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 삶의 희로애락을 살뜰하게 풀어내고 있다.


시골 어느 소읍에서 태어난 J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오빠와 함께 살다가 대학 졸업 후 오빠로부터 독립해 출판사를 다니는 여성이다. 그리고 캠퍼스 커플로 만난 남자와 8년간의 길고긴 연애 끝에 결혼하여 네 살 난 딸 연이를 둔 여성이다.


이처럼 평범한 여성인 J와 주변 사람들이 벌이는 갖가지 헤프닝은 엉뚱하고 기발한 반전으로 상큼한 웃음을 웃게 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결코 가벼운 웃음만을 흘리게 하지 않는다. 곳곳에서 배어나오는 인간존재의 쓸쓸함은 ‘나는 때로 고아처럼 느껴져요’(「나, 여기 있어요」)라는  한마디로 수렴되어『J 이야기』를 읽어가는 내내 긴 여운을 드리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