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본향으로 이끌어주는 옛 님들의 목소리

 

소 타는 맛 어이 여태 몰랐었던고?
말 없으니 그 맛 절로 알겠더구나!
먼 들판 나들이 십릿길에 봄날이랑 함께 느직도 하이!


옛 시인 권만의 「소 타는 맛」 전문全文이다. 세월을 몰아가듯, 인생을 다그치듯, 남은 생애가 쫓기는 듯 다급해진다면, 이 시를 한번 음미해볼 일이다. 아무 바쁠 것이 없다가도 말을 타면 괜히 달리고 싶어 채찍을 치게 되고, 더 달리지 못해 안달이 난다. 말이 없게 되자 아쉬운 대로 타보게 된 소, 작자는 그 덕분에 ‘인생 사는 맛’을 깨우쳤노라고 전한다. 현재 진행으로 진행되고 있는 사건 속에 인생을 조감하는 혜안이 숨어 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똑똑히 지켜보는 듯, 현장감을 살려 이 시를 번역해낸 손종섭 선생은, “먼 들판 나들이 길에 느직이 바람과 구름과 꽃과 새와 인생을 완미玩味하며 가노라니, 바쁠 것이 전혀 없다. 유유한 세월! 곱씹고 되씹어가며 속속들이 맛보는 세월 맛!"(41p)이라고 감상을 덧붙였다. 천 년 전, 옛 선인의 시심詩心이 한 노학자의 손끝을 빌려, 현대인들의 가슴 속으로 따듯하게 전해지는 순간이다.


『손끝에 남은 향기』는 읽을수록 깊고 새로운 우리 옛시 280수를 한학자 손종섭 선생이 번역하고 감상을 덧붙인 책이다. 알짬 같은 우리 문학이건만 ‘한자’의 옷을 입고 있었기에 먼지 덮인 고서로만 전해오던 것을, 손종섭 선생이 먼지를 털고, 생기를 불어넣어 그 참된 뜻을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한 인간이 일생 동안 겪는 갖가지 사연과 희로애락을 사랑, 이별, 기다림, 그리움, 회고, 연민, 무상, 정한, 평화, 객회, 자탄, 해학, 풍류, 통찰 등 18가지 주제에 나누어 담았다.



노학자의 손끝에서 생생히 복원된 사랑의 현장


『손끝에 남은 향기』에는 정치인, 관료, 야인, 천민, 기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가 골고루 담겨 있다. 손종섭 선생은 “이 책에서 다룬 작품들은 각계각층이 망라되어 있는 가운데서도, 당시에 설움받던 계층의, 설움에 겨운 목소리들을 더 많이 발굴해서 실었다”고 책머리에서 밝히고 있다. 따라서 화조풍월에 부친 유흥과 호탕한 풍류가 있는가 하면, 출정出征한 남편의 겨울옷을 다듬는 애달픈 다듬이소리, 눈물에 젖어 얼룩진 화장 그대로 부르는 상사곡, 파계 직전의 여승이 부르는 춘정의 노래, 타향을 떠도는 나그네의 설움, 민생고를 걱정하는 애달픔, 알뜰한 상사의 연정이 고루고루 실려 있는 것이다.


백마 탄 저 도련님 어느 집 자제인고?
이제야 알고 보니 김태현 님 바로 글세.
가는 눈 긴 눈썹이 그윽이 맘에 들어 (어쩐지 나는 좋아)...


윗시는 고려시대에 개성 과부가 지은 시다. 시 속에 등장하는 김태현이라는 인물은 16세 때 문과에 급제한 화제의 인물로서, 미목 또한 수려하여 뭇 여인네들의 선망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마음에 드는 남성의 이름과, 그의 두 가지 매력점을 대입해가며 두루 불리어졌을 이 노래 가사는 꽃미남에 설레하는 오늘날의 여심女心을 떠올리게 해 더욱 정답다.


수양버들 시냇가에 비단 빨래 하노라니
말 탄 선비님이 손잡으며 정을 주네.
손끝에 남은 향기에 차마 어이 씻으리?


이 책의 표제이기도 한 시 「손끝에 남은 향기」는 고려가사의 하나인데, 이제현의 한역시로만 전하는 것을, 손종섭 선생이 다시 우리의 현대어로 복원한 것이다. 차마 잊혀지지 않는 연연한 그리움을 고백하는 진솔대담한 여인의 내면이 노학자의 손끝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구십 청춘, 백발의 고운 정


『손끝에 남은 향기』는 올해로 아흔 고개에 접어든, 인생을 통독한 노학자의 지혜와 정情이 갈피마다 배어들어 있는 책이다. 한학자인 선친 월은月隱 손병하孫秉河 선생에게서 가학家學을 전수받은 손종섭 선생은 30년 동안 교직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틈틈이 한문학 유산을 발굴하고, 한시 국역에 힘쏟아 『松江歌辭精解』『옛 詩情을 더듬어』『李杜詩新評』『우리말의 고저장단』『내 가슴에 매화 한 그루 심어놓고』『다시 옛 詩情을 더듬어』등의 주옥 같은 저서를 펴냈다.


한문으로 표기된 우리 선인들의 시문학을 국문학으로 환원· 편입하는 일은 단순히 ‘번역’에 그치지 않는다. 번역도 창작이란 말은 시에 있어서 더욱 절실하다. 인생과 자연의 질서요, 조화의 한 유기체인 시의 생명을 자칫 손상시켜서는 안되기에, 그 산고는 창작에서나 다를 바 없다. 그 작업은 옛 시인을 환생시켜, 현대인과 더불어 호홉하게 하는 일과 다름 없기에, 선생이 번역한 시 한 편 한 편마다 구십 청춘의 고운 정이 배어 있다.


이 책에 실린 시들은 우리 시조의 가락의 옷을 입고 있어 보다 친근하게 다가온다. 부득이 한자로 표기해야 했던 우리 옛시가 한글로 풀이되었을 뿐 아니라, 시조 가락을 입어 오늘날 독자들에게 옛시의 참맛을 전해주게 된 것이다. 선생은 책머리에서 시조 가락이야말로 “그 예스러운 맛과 듬직한 무게에, 연륜마저 배어나는 듯, 이 진정 우리만이 간직해온 우리만의 숨결이기에, 이야말로 마땅히 더위잡아 볼 만한 우리의 가락”이라고 평하고 있다.


"나긋나긋 한시를 읽으실 땐 마치 비단결을 어루만지듯 손가락 하나하나가 같이 움직이셨다. 할아버님의 독송으로 시작되던 선생의 어린 시절 새벽 이야기를 우리는 꿈결처럼 감동해서 들었다. 참말 신통하게도 선생의 말씀을 따라 오래 전 흙이 된 옛사람들이 영화 속 장면처럼 맥맥이 되살아났다. 우리는 그 마음의 결을 달게 받고 깊이 느꼈다. 전통이란 것이 이렇게도 전해지는 줄을 그때 처음 알았다."
- 정민 (한문학자, 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