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추천도서


퓰리처상 수상 작가, 줌파 라히리의 새 소설
<뉴욕 타임스> 선정 10대 책, <타임> 선정 최고의 책


데뷔작 『축복받은 집』(Interpreter of Maladies)으로 2000년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미국 문단의 신예로 떠오른 줌파 라히리의 새 소설집이 출간됐다. 당시 <퓰리처상> 수상은 여러 모로 이례적인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수상자가 30대의 여성 작가였다는 점, 기존의 수상작이 미국인의 정체성을 파고든 작품이었던 것과 달리 이민자의 정체성을 다룬 작품이었다는 점, 또 장편에 주는 상이라는 인식을 깨고 단편집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는 점이 이 작가가 갱신한 신기록이었다. 이어 줌파 라히리는 <펜/헤밍웨이상> 수상과 함께 29개 언어로 작품이 번역되면서 일약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두 번째 소설이자 첫 번째 장편 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 또한 미국 내에서만 80만 부의 판매를 기록하면서 소포모어 징크스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세 번째 작품인 『그저 좋은 사람』은 ‘<뉴욕 타임스> 선정 10대 책’ ‘<타임> 선정 최고의 책’ 등 유수 매체에서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으며 그녀가 ‘단편의 여왕’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줌파 라히리의 작품은 주로 미국 내에서 살아가는 인도인의 정체성 문제를 바탕으로 연인, 친구, 가족 등 밀착된 관계에서 일어나는 불화와 소통을 다룬다. 이는 작가 자신의 정체성과 성장통을 반영한다. 『그저 좋은 사람』에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은 케임브리지에서 시애틀로, 인도에서 타이로 오가면서 형제자매, 어머니와 아버지, 딸과 아들, 친구와 애인 들의 삶이라는 또 다른 세계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그 세계 속의 관계는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끊임없이 열망하면서도 끊임없이 소원해지는’(「옮긴이의 말」에서) 관계이다. 이런 고민은 줌파 특유의 쉬운 문체로 녹아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써 내려간 듯한 글 속에는 저마다 가시가 들어 있다.



“또다시 떠나는 줌파 라히리 식 가족 오디세이
세상의 모든 가족들이 다다르게 되는 공존을 찾기까지의 과정”


인도의 전통을 고수하고자 하는 이민자 1세대 부모와 여기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야 하는 이민자 2세대 아이들은, 인도 아이로 남는 것과 미국 아이로 커가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위태로움을 겪는다. 부모는 아이가 벵골 어를 쓰고 쿠르타(기장이 길고 칼라가 없는 인도의 셔츠)를 입기를 바라고 금요일 밤 파티 같은 미국 문화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길 바라지만, 그랬다간 그 사회에서 고립되거나 바보가 될 뿐이다. 이런 갈등에 눈감은 채 어떻게든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허위의식은 특히 표제작 「그저 좋은 사람」에서 정교한 문장으로 그려진다. 한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수드하는 낙오자가 되어가는 남동생의 삶에 개입하려 하지만 상황은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구제하려는 시도가 과연 가능한지 묻는다.


“누난 여기 살지도 않잖아.” 그가 계속 말했다. “그냥 여기 걸어 들어와서 모든 걸 완벽하게 해놓고 다시 런던으로 사라지시겠다고? 그게 누나가 하려는 거야?”
그녀는 그를 쳐다봤다. (…) “라훌, 넌 똑똑한 아이야.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난 정말 이해가 안 간다.”
그는 몸을 숙여 바닥에 있는 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시고 나더니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잔이 보이지 않았다. “이해하지 않아도 돼, 누나. 언제나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172∼173쪽에서


「길들지 않은 땅」에서는 낯선 도시로 막 이사한 젊은 엄마, 루마네 집에 친정아버지가 방문한다. 아버지는 딸네 집 정원을 가꾸어주고, 손자에게 애틋함을 느끼면서도 딸과의 관계를 버거워한다. 이 소설은 너대니얼 호손의 문구―“감자처럼 인간도 길들지 않은 땅에 뿌리를 내려야 더 번성한다”―에서 제목을 따왔는데, 줌파는 이에 대해 소설로 기나긴 반문을 제시한다. 과연 다른 땅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좋기만 한 것인지 말이다. 「지옥―천국」에서는 가족처럼 지내며 삼촌이라 부르던 한 남자를 남몰래 사랑한 엄마의 갈등을 다룬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그 감정을 딸에게 털어놓는 계기가 사뭇 저릿하다. 「숙박시설의 선택」에서 주인공 남자는 옛 친구의 결혼식을 기회로 아내와 낭만적인 주말여행을 꿈꾸지만, 파티가 시작되고 밤이 깊어가면서 계획은 결혼 생활의 어두운 이면으로 점철된다. 「아무도 모르는 일」에서는 파룩과 생, 폴이라는 세 남녀의 기묘한 관계를 통해 연애에 잇따르는 감정―신뢰와 거짓, 자존감과 집착 등―을 묘사한다.


2부 「헤마와 코쉭」은 세 편의 독립적인 작품이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연작 소설에서는, 어느 겨울 매사추세츠에서 우연히 함께 살게 된 소년과 소녀의 삶을 만난다. 그들은 아픔으로 가득했던 순수의 시절을 벗어나,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로마에서 운명적으로 조우하지만 결국 삶을 함께하지는 못한다. 그 어긋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두 인물의 트라우마가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다.


줌파 라히리의 작품들은 ‘삶이 주는 크고 작은 상실을 뿌리를 옮겨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 대입해보는 작업’(「옮긴이의 말」에서)이다. 어찌 보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엇갈림을 묘사하는 평범한 이야기일 뿐인데도 ‘이민자들의 삶’이라는 돋보기를 겹쳐 대었기에 하나같이 낯선 풍경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풍경은 놀라우리만치 우리네 삶과 비슷해서, 독자들은 또한 지나간 관계를 복기하며 고통을 헤아리게 된다.



탁월한 관찰자의 시선
불가능한 소통이 극에 달한 순간,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을 말하다


택시는 떠났고 그녀는 택시가 떠난 잿빛 아침 햇살 속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느새 자신이 더 이상 울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고 갑자기 정신이 맑아졌다. (…) 그녀는 더 이상 자기를 신뢰하지 않을 남편과 이제 막 울기 시작한 아이와 그날 아침 쪼개져 열려버린 새로운 가족을 생각했다. 다른 가족들과 다르지 않게, 똑같이 두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211∼212쪽에서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하길,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관찰하는 거리를 두고 있다고, 그래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삶의 어떤 상처가 작가를 관찰자로 밀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상처 덕분에 독자들은 지독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 현실은 오해, 미움, 분노의 끝에 결국 단절로 향하는 관계일 것이다. 그녀는 이 여덟 편의 이야기에서 결코 손쉬운 화해를 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찰을 멈추지 않는 것은 소설가 김연수의 표현처럼 “그 이방인 같은 모습이야말로 가족을 이해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저 좋은 사람』에서 작가는 그 불가능한 소통이 극에 달한 순간,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