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7월의 책' 선정도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 권장도서 선정
문화관광부 교양도서 선정


로맨스에 서 판타지까지 넘나든다
고전소설, 만화경 같은 서사의 세계


영화를 본 후 친구들과 그 내용을 곱씹으며 영화에 대한 감상을 충분히 누리는 것처럼, 고전소설을 읽고도 그렇게 한껏 수다를 떨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이 글들은 나올 듯 말 듯한 재채기처럼 그냥 견디기에는 너무나 간질간질했던 나의 고전소설 감상문이다.
_「책머리에」에서

몇 해 전 저서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을 통해 역사에 묻힌 조선 여성들의 삶과 욕망을 생생히 복원해냈던 조혜란 교수가, 이번에는 ‘조선의 고전소설’들을 불러냈다. 고전소설 전공자이자 고전소설 읽기가 취미인 저자는 ‘재미있는 고전소설을 혼자만 읽는 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배가 고플 때면 「흥부전」을 펼쳐, 풍성하게 묘사한 박타는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온다고 하니, 그 애정을 알 만하다.


『옛 소설에 빠지다』는 조선 초기 작품 「이생규장전」에서 후기 작품 「호질」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아끼는 고전소설 13편을 골라 소개하여, 독자들에게 옛사람들의 정서와 사유의 빛깔을 전한다. 「이생규장전」 「옥루몽」같이 익숙한 작품들은 저자의 손끝에서 또 다른 의미의 옷을 입었고, 「김영철전」 「오유란전」같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은 새롭게 독자를 찾는다. 담백한 글 솜씨로 옛글과 옛사람들의 삶을 읽어주는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조선의 생동하는 인정세태와 사회를 느낄 수 있다. 그들의 삶으로 지금 우리 삶을 비춰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13편 모두 요약·발췌본을 수록하고 저자의 감상이 스민 해설(「천천히 읽기」), 소설 한 장면의 원문과 해석(「깊이 보기」), 함께 읽으면 좋을 작품(「넓게 읽기」)을 덧붙여 작품 한 편 한 편을 입체적으로 조망하였다.



옛 소설을 읽는 네 가지 열쇳말
사랑, 전쟁, 양반 남성들의 판타지, 비수처럼 꽂히는 통찰


첫 장 「사랑, 사랑이로다」에는 김시습의 「이생규장전」을 필두로 임방의 「소설掃雪」과 「윤지경전」을 꼽았다. 귀신과의 절절한 사랑을 다룬 「이생규장전」, 간절한 그리움에 시달리다가 눈 내린 한밤중에 길을 나서는 남주인공을 그린 「소설」, 임금이 맺어준 여인마저 거부하고 사랑을 지켜가는 이야기 「윤지경전」. 이 세 작품은 사랑의 애틋함과 절절함, 파괴적 힘을 보여준다.


두 번째 장 「전쟁, 그 참상에 대하여」는 홍세태의 「김영철전」, 작자 미상의 「강도몽유록」과 「박씨전」이 선택되었다. 세 작품 다 병자호란을 바탕으로 하는데 「김영철전」이 당시 전운이 감도는 동아시아가 배경이라면, 「강도몽유록」은 당시 많은 양반가 여성들이 죽어간 강화도가, 「박씨전」은 인조가 항복한 수도 한양이 배경이다. 그 배경이 어디든 고전소설이 그리는 전쟁은 비참하기만 하다. 물론 「박씨전」은 패배한 전쟁을 박씨의 승리로 그려 조선의 회한을 달래주었지만, 청나라의 포로가 된 백성들이 울부짖는 장면은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세 번째 장 「양반 남성들의 판타지, 그 이면」. 남성 작가가 대부분인 고전문학에는 불쑥불쑥 남성들의 판타지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물론 작품 면면을 ‘남성 판타지’ 코드만으로 읽을 수는 없겠지만, 분명 그 속에는 남성들의 욕망이 빠지지 않았다. 한 남성과 다섯 명의 여성이 등장하는 방대한 서사 남영로의 「옥루몽」, 두 양반 남성이 서생에서 관료사회로 진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오유란전」, 선한 남자 주인공의 효와 우애가 아름다운 「적성의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력자로서 남주인공의 곁을 지키는 금방울의 이야기 「금방울전」 또한 그렇다. 저자는 고전소설에서 여성과 남성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 살피면서, 은연중에 드러난 양반 남성들의 남성 중심적 욕망을 뒤집어본다.


마지막 장 「비수처럼 꽂히는 통찰과 깨달음」에서는 저자가 그 누구보다 매력적이라 꼽는 작가 허균와 박지원의 작품을 다루었다. 허균의 「남궁선생전」에서는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욕망뿐 아니라 이를 벗어나 득도하고자 하는 욕망조차 욕망이라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같다’는 통찰을 보여주며, 박지원의 「호질」과 「열녀함양박씨전」에서는 연암의 지식인론과 날카로운 풍자의 힘을 역설한다.



고전, 오늘의 텍스트와 소통하다
신선하고도 맛있는 해설


팅커벨이 나타나 어두운 공간에 반짝이는 정채를 더하듯, 박제된 시간의 전시품으로 기억될지도 모를 고전소설을 오늘날의 삶의 공간으로 불러내고 싶다. 혹은 팅커벨의 반짝이를 따라 조선시대가 마련해준 요지경 같은 서사의 세계로 들어가도 좋겠다.
_「책머리에」에서


저자가 읽어주는 소설들은 입에 착 감기는 맛이 있다. 사랑을 다룬 작품을 보노라면 21세기 사람들만큼이나 대담한 사랑을 했던 옛사람들이 선연히 떠오르고, 양반 남성의 판타지를 다룬 작품들은 『해리 포터』 시리즈 못지않게 서사의 흡인력이 대단하다. 여기에는 고전소설을 우리 시대의 텍스트와 마주 보고, 자신의 언어로 풀어 읽으려는 저자의 노력이 한몫했을 것이다. 이를 테면 「금방울전」의 순전한 여주인공 금방울의 에너지에 감탄하며, 이 캐릭터를 데즈카 오사무의 애니메이션 <유니콘>의 순정 어린 주인공 유니코, 꼬마 악마와 연관 짓는 식이다. 또 「남궁선생전」에서 묘사하는 신선의 술법을 보면서 ‘동안童顔 만들기’의 과학적 근거를 찾기도 하고, 실의한 남궁선생에 현대인의 모습을 겹쳐 떠올리기도 한다.


「금방울전」이 오랜 세월을 관통하며 읽히는 이유는 바로 이 원형의 방울과 같은 둥근 에너지의 결집, 그 통통 튀고 지칠 줄 모르는 채 데굴데굴 구르는 여성적 생명력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을까? 사는 일은 끊임없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시시포스의 신화와 같은 우리 삶에서 금방울과 같은 순전하고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존재를 얻을 수만 있다면 혹은 스스로가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누추한 삶이라도 행복할 것 같다.
_「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력자, 금방울전」에서


남궁두는 그가 그렇게도 소망했던 천상선天上仙 되기에 실패한다. 지상선地上仙에 머문 그는 그러나 더 이상 다른 시도를 않고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다. 지상선도 신선이니 남궁두는 과연 행복했을까? 작품을 보면 과연 그러했을지 의문이 든다. 여든 넘어 마흔 대의 동안을 지녔던 남궁두는 작품 마지막에서 오히려 나이 많은 존재로 살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감만 더 느끼게 된다는 말을 남겼다. 그래도 그는 그 누추함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그는 ‘참아내고 참아내고 참아내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어쩌면 그는 비로소 욕망의 불을 끄고 마음의 평안을 지닌 채 삶을 성찰하며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실의한 지상선 남궁두와 실의한 현대인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_「비감한 신선 이야기, 남궁선생전」에서


무엇보다 ‘여성’을 비롯한 약자들의 관점에서 텍스트를 읽는 저자의 시각이 흥미롭다. 전쟁에서 죽어간 여성들이 처참한 모습 그대로 등장하는 「강도몽유록」에서는, 열녀 이데올로기가 이들에게 어떻게 죽음을 강요했는지 지적한다. 「오유란전」에서는 기생 오유란이 서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결말에 대해 ‘이 서사에서 이생과 김생은 고급관리가 되어 …… 서로의 관계가 더욱 확실해지는 반면, 하층민에 여성이면서 기생인 오유란은 존재감 없이 도구화하고 말았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옛 소설에 빠지다』는 오늘날의 언어로 작품의 깊은 맛을 전해, 고전소설 읽기의 즐거움에 새롭게 눈뜨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