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사(책을 만드는 사람들) 올해의 책 선정

 

“책으로 되지 않은 글들이 이렇게 많다니…”
작가가 손수 모아둔 원고, 유언과도 같은 목소리

 

박완서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생전에 펴낸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끝으로 더 이상의 산문집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크던 차에, 어떤 책에도 실리지 않은 원고들이 발견됐다. 작가가 노트북과 책상 서랍에 보관해둔 원고 묶음을, 맏딸 호원숙 씨가 찾아낸 것. 여기에는 생전에 쓴 마지막 글이 들어 있어 마치 유언과도 같은 울림을 준다.
『세상에 예쁜 것』은 이 원고들 중 2000년 이후 기고한 38편을 추려 묶은 책이다. 여든 해 가까운 삶과 나날의 에피소드를, 특유의 감수성과 혜안으로 풀었다. 작가가 되기까지의 역사(1부 「나는 왜 소설가인가」)를 밝힌 자전적 고백에서부터 일상 속 깨달음(2부 「시간은 신이었을까」), 이 시대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3부 「세상을 지탱하는 힘」), 집과 자연과 모국 이야기(4부 「전원생활은 고요한가」), 그리운 사람들을 위한 글(5부 「깊은 산속 옹달샘」) 등으로 요약된다. 독자와 나눈 대담, 강연, 초등학생의 질문지에 적어준 답, 편지와 헌사 등 다양한 자리와 형식을 띤 글들이다.
말미에는 이 책을 낸 사연을 담아 어머니 박완서 작가를 기리는 호원숙 씨의 글이 실려 있다. 그는 그렇게 많은 책을 냈음에도 아직 출간되지 않은 글들이 많다는 것을 안 순간, 반가움과 기쁨보다는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마음이 저려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책을 통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바란다.

 

 

“나를 키운 건 이야기, 나를 치유한 건 시간”
지나온 소중한 삶, 순간, 인연들

 

제목 ‘세상에 예쁜 것’이 상징하듯, 작가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주는 새 생명의 힘, 소중한 존재와 순간을 그림처럼 포착한다.

 

고통스럽던 병자의 얼굴에 잠시 은은한 미소가 떠오르면서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을 보니 잠든 아기의 발바닥이었다. 포대기 끝으로 나온 아기 발바닥의 열 발가락이 “세상에 예쁜 것” 탄성이 나올 만큼, 아니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예뻤다. 수명을 다하고 쓰러지려는 고목나무가 자신의 뿌리 근처에서 몽실몽실 돋는 새싹을 볼 수 있다면 그 고목나무는 쓰러지면서도 얼마나 행복할까. (…) 아기의 생명력은 임종의 자리에도 희망을 불어넣고 있었다. 
―83~84쪽, 「세상에 예쁜 것」에서

 

작가는 1988년에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었다. 비할 데 없는 슬픔과 고통의 기억을,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절절하게 이야기한다. 어떤 표현이든 그 아픔이 읽는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하지만 작가는 죽을 것 같은 고통 역시 새 생명의 힘으로 치유되었다고 말한다.

 

그 아이는 내가 아들을 잃고 난 후 일 년 안에 태어난 외손녀다. 아들을 잃었을 때, 내 여생에 다시는 근심도 기쁨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장대 같은 아들을 잃은 지옥 같은 고통에 지쳤을 때 겨우 콩꼬투리만 한 새 생명이 기적처럼 나에게 왔다. 그 새 생명을 처음 대면했을 때 나는 온몸이 떨리는 듯한 기쁨을 맛보았다. (…) 기쁨도 근심도 없이 목석처럼 살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은 건 거짓말이었다. 입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살고 싶었으면 그 작은 생명에게 마음을 붙이고 울고 웃고 하였을까.
―114~115쪽, 「내 기억의 창고」에서

 

또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라며 “그렇다면 시간이야말로 신神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라고 한다.(80쪽, 「시간은 신이었을까」에서) 참척의 고통을 겪는 동안 새 생명이 주는 기쁨을 맛보고, 소중한 사람들에게서 위안을 얻으면서 시간의 힘을 깨달은 것이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이야기”라는 말에서 작가로서의 숙명과 긍지를 엿볼 수 있다면, 그를 치유한 건 시간 그리고 소중한 존재의 힘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랑의 기억을 가져갈 수 있다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다”
인간 박완서, 작가 박완서를 되새기는 시간

 

작가가 “상상력은 사랑”이라고 말한바,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사랑’이라 해도 될 듯하다.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며 새긴 증오와 복수심도, 글쓰기의 고됨과 보람도, 사별의 슬픔도 결국 사람들과 나눈 사랑으로 넘어서고 덮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도 그러한 뜻을 읽을 수 있다.

 

이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보다 저세상에 더 많구나, 그런 생각이 나를 한없이 쓸쓸하게 한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고 사랑한 사람들 역시 나를 좋아하고 사랑해주었다고 생각하면 인생은 아름답고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힘으로 이룩한 업적이나 소유는 저세상에 가져갈 수 없지만 사랑의 기억만은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아진다.
―237~238쪽, 「의연한 나목을 볼 때마다」에서

 

영원한 어른이자 어머니 작가인 박완서. 그는 현실을 초월한 어떤 깨달음과 가르침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평생 그래왔듯, 늙지 않은 감수성으로 느끼고 생각한 삶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간 박완서, 작가 박완서만의 목소리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