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짝달싹 못하는 심장 속으로 생명의 박동이 파고든다”
—이백에서 문태준까지, ‘나무 대변인’이 읽은 81편의 ‘나무-시’

 

12년 동안 해오던 중앙 일간지 학술기자 일을 관두고 무작정 나무를 찾아 헤맨 지 14년째. 지금까지 자동차로 달린 거리만 56만 킬로미터. 지구 14바퀴 거리다. 경유 값으로 쓰는 돈은 한 달에 60~70만 원. 버려지다시피 했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물푸레나무를 찾아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도록 만든 사람. 나무칼럼니스트 고규홍의 행보다. 열린 감수성으로 나무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어 ‘나무 대변인’이라고 불린다.
전작 『나무가 말하였네』(2008, 마음산책)를 통해 인간과 나무가 교감하는 순간의 진한 감동을 전한 그. 『나무가 말하였네 2』에서는 이백, 조운에서 문태준, 나희덕을 아우르는 ‘나무-시’ 81편과 그 시를 통해 만난 나무와 사람,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그루 나무와 시 한 편으로 얻는 삶의 지혜가 한층 깊어졌다. 나무칼럼니스트만의 독자적인 해설과 직접 찍은 사진은 문학을 통해 식물을 알고, 식물을 통해 문학을 알아 문학적인 감성과 생태적인 감수성을 키우게 한다. ‘나무 교양서’로서 손색없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문학과 자연을 모두 느끼고 누릴 수 있다.

 

 

“쉽게 살고 싶지 않다. 저 나무처럼”
—나무의 무한한 관용에 기대어, 나무에게 길을 묻다 

 

1부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에서 저자는 생명의 싱그러움을 말한다. 그는 꽃잎의 속삭임을 노래한 김형영의 시 「생명의 노래」를 읽으며, 크로커스 꽃이 피는 것을 ‘아가의 옹알이’라 느낀다. 엄마의 오랜 기다림 앞에 아가가 건넨 옹알이처럼, 꽃도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생명의 노래를 속삭인다. 오래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노래다. 순수한 영혼의 만남”이다. 고형렬의 「바람 나뭇잎」을 읽으면서는 “세상살이에 흔들릴 때마다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을 바라보게 되는 건 분명 사람의 유전자에 나무의 흔적이 담긴 때문이리라” 하는 묘한 일체감을 느낀다. 정현종의 「세상의 나무들」은 그로 하여금 한 자리에서 늙어가며 더 아름다워지는 나무, 그리움으로 생명의 샘을 채우는 나무를 생각하게 한다.

 

세상의 나무들은 늙어가며 더 아름다워진다. 나무의 몸엔 늙어도 쇠하지 않는 탄력이 가득하다. 하늘 향해 곧추선 줄기는 수액으로 촉촉하다. 줄기 안에 든 생명의 샘은 마르지 않는다. 나무는 스스로 제 사랑을 찾아 나설 수 없기에 그리움으로 생명의 샘을 채운다. 나무가 서 있는 그곳에 첫사랑의 기운이 팽창하는 건 그래서다.
—정현종의 시 「세상의 나무들」 감상글(17쪽)에서

 

2부 ‘대숲 바람 소리 속에는’에서 그는, ‘나무의 삶’을 통해 인간의 삶을 반추한다. “떠돌이 빗방울들 연잎을 만나 / 진주알 되었다”로 시작하는 김영무의 「연잎」을 읽으며, 그는 연잎의 소수성疏水性을 생각한다. 길쭉이 올라온 잎자루의 보이지 않는 진동 때문에, 물은 연잎을 적시지 않고, 연잎은 물을 깨뜨리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이렇듯 서로를 품어 안으면서도 구속하여 해치지 않는 것일 터이다. 이은봉의 「무화과」는 그에게 중년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꽃 없이 맺은 열매여서 무화과無花果다. 사랑 없이 맺는 열매는 세상에 없다. 무화과나무에서도 꽃이 핀다. 보이지 않을 뿐이다. 무화과나무는 오월쯤, 잎겨드랑이에 도톰한 돌기를 돋운다. 영락없는 열매지만 꽃이다. 꽃은 주머니 모양의 돌기 안쪽에 숨어서 피었다. 그래서 은화과隱花果라 한다. 혼신의 힘을 다해 메추리알만큼 키운 꽃 주머니는 그대로 열매가 된다. (…) 꽃 피우지 않고, 누가 알아보지 않아도 좋다. 비바람 몰아쳐도 수굿이 열매 맺는 중년의 삶이 그렇다.
—이은봉의 시 「무화과」 감상글(91쪽)에서

 

나무와 꽃은 저자의 스승이다. 석산은 박형준의 「석산꽃」에 나오듯 “한 몸속에서 피어도 /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 잎 없이 꽃이 핀다. 꽃 져야 올라오는 잎은 다시 꽃을 피우기 위해 긴 겨울을 난다. “나는 핏줄처럼 / 당신의 몸에서 나온 잎사귀 // 죽어서도 당신은 / 붉디붉은 잇몸으로 나를 먹여 살린다”라는 시구를 읽으면, 한겨울 앙상한 알몸으로 견디는 초연함, 매해 힘겹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한결같음과 의연함에 숙연한 마음이 든다. 3부 ‘기다려온 꿈들이 필 듯 말 듯’은 평생 한 자리를 지키며 나고 죽는 나무의 숙명과, 그럼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사는 나무의 관용에 대한 헌사다.

 

살아 있는 동안 아프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나무는 모든 아픔을 이겨냈다. 부러지고 찢긴 가지 적잖아도 나무는 상승의 본능으로 지상의 조건을 초월했다. 하늘 끝에 가지를 걸어 올린 지리산 금대암의 전나무. 육백 년 동안 나무는 오로지 태양이 낸 빛의 길을 따랐다. 가을에도 푸른 잎 떨어뜨리지 않는 그의 자태는 견고하다.
—조병화의 시 「나무의 철학」 감상글(187쪽)에서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건 나무가 긴 세월 동안 겪어낼 고통까지 달게 받겠다는 마음이다. 나무는 꼼짝 않고 한 자리에 붙박여 수천의 세월을 보낸다. 곁을 지나는 누구에게라도 그늘을 내준다. 누구라도 품어 안는 데 인색하지 않다. 비바람, 눈보라 피하지 않고 말없이 스쳐 보내야 한다. 그래서 푸른 하늘 아래 나무는 외롭고 고단하다. 희끗희끗한 저승꽃, 퉁퉁 불어터진 옹이를 잔뜩 매달고도 나무는 죽지 않는다. 백척간두에서도 진일보하는 수도승의 용맹 정진을 닮았다. 나무의 삶이 한없이 눈부신 까닭이다.
—여자영의 시 「천년 수도승」 감상글(223쪽)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나뭇잎 새의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나무로 지은 언어의 사원에 머무르다

 

나무와 시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다양하다는 것, 흔하지만 그냥 지나치기 쉽다는 것, 봐도 뭐가 뭔지 알 수 없다는 것, 하지만 가까이 두고 음미하면 할수록 보이고 들리고 느낄 수 있다는 것, 잠시 멈춰 관찰하고 기다리면 지금껏 몰랐던 감동을 준다는 것.
일본의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는 「산다」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나뭇잎 새의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이라 표현했다. 사소한 순간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시는, 거창할 것 없는 일상이 모여 삶이 된다는 간명한 진리를 전한다. 천천히 걷다 보면 목적지만을 향해 빠르게 달릴 땐 미처 몰랐던 여러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나무와의 만남, 그리고 시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천년 세월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의 향기에 눈뜨게 된다. 꽃이 피고 잎이 지는 것,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까지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게 없다.

 

시를 언어의 사원이라고 했던가? 지난 계절 그 언어의 사원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건 아마 앞으로도 가당치 않은 일일 게다. 나무는 아주 천천히 가만가만 속살거리며 언어의 사원을 지었다. 내가 머무른 이 찬란한 사원에는 나무가 무성했다. 나무로 지은 언어의 사원이다. 그 안에서 더없이 즐거웠다. 슬픔에 겨워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쏟은 적도 있지만, 둥실 꽃구름 타고 하늘을 날아 닿을 수 없는 황홀경에 이르는 때가 더 많았다. (…) 나무의 무한한 관용에 기대어 죽는 날까지 나무에게 길을 물을 것이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온 가지로 품어 안고 다시 나무가 말을 한다. 오라, 숲으로, 나무와 더불어!
—「책을 내면서」(8~9쪽)에서

 

이 책에 실린 81편의 ‘나무-시’는, 우리가 잊고 지내던 생태적 감수성을 활짝 열어준다. “나무 앞에선 하늘도 땅도 사람도 푸르게 푸르게 두근거린다”. 이제 친절한 ‘나무 대변인’의 손을 잡고 ‘나무로 지은 언어의 사원’을 거닐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