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유럽을 무대로 펼쳐지는 사랑과 혁명의 연가
열정적 사랑으로 그려낸 집념 혹은 집착의 얼굴, 국내 초역 『레이디 L』

 

영국 귀족 레이디 L의 여든 번째 생일. 은행가, 장관, 주교 등 존경받는 지도층으로 자라난 자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아나키즘에 가담한 과거를 숨겨온 그녀는 이 진부한 시절의 안위와 틀에 박힌 허위가 못마땅하기만 하다. 결국 레이디 L은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이 평온을 깨뜨릴 작은 혁명을 마음먹고 자신을 흠모하는 계관시인 퍼시에게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녀의 오래전 이름은 아네트 부댕. 파리에서 아나키즘만 부르짖는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와 매음굴 세탁부로 일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생계 때문에 매음굴로 굴러든 그녀는 그곳에서 매력적인 아나키스트이자 일생의 사랑인 아르망을 만나고, 그의 눈에 띄어 아나키스트 교육을 받는다. 그러다 아르망과 사랑에 빠져 아이를 임신하지만, 사랑보다 ‘인류’와 이념이 중요했던 아르망은 아나키스트 테러리즘에 가담했다가 붙잡히는 신세가 된다. 이에 그녀는 배 속의 아기와 아르망을 구하기 위해 영국 귀족이자 자유로운 보헤미안이며 그녀의 비밀을 속속들이 아는 글렌데일 공작의 도움을 받고 조건부 가약을 맺는데…….

 

귀족 노부인의 회상으로 시작하는 로맹 가리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 『레이디 L』은 아나키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이념과 대의와 변혁의 구호가 판치던 19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매력적인 아나키스트와 아름답고 열정적인 빈민가 처녀, 그리고 보헤미안에 괴짜이지만 애정과 배려가 넘치는 한 영국 귀족의 관계를 다룬 역사 로맨스 소설이다. ‘맹목성’ ‘애증’ ‘종속과 피종속의 관계’ 등으로 치달을 수 있는 사랑과 이념의 닮은꼴 성질을 연인이라는 개인의 층위에서, 그리고 인류라는 집단의 층위에서 파헤치는 작품으로, 생동감 넘치는 인물 묘사가 매력이다. 그리고 로맹 가리 특유의 냉소적․지적 표현력으로 회화처럼 그려낸 당시 유럽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여기에 레이디 L의 회상을 따라 파리, 런던, 제네바, 밀라노 등 유럽 곳곳을 넘나들며 벌이는 사랑의 행각과 모험이 유머러스하고 애잔하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레이디 L은 왜 오래도록 숨겨온 비밀을 털어놓는 것일까. 그녀 사랑의 끝은 어땠고 이 고백의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물음을 따라가다 보면 흥미로운 결말을 만나게 된다.
『레이디 L』은 1958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었고 프랑스에서는 1963년 출간되었다. 두 달도 안 걸려 쓴 영어판을 로맹 가리가 직접 프랑스어로 옮기며 약 9개월간 새로 쓰다시피 했는데, 한국어 번역은 프랑스판을 따랐다. 『레이디 L』은 1965년 피터 유스티노프가 감독하고 폴 뉴먼, 소피아 로렌, 데이비드 니븐이 주연한 영화도로 만들어졌다.

 


 

사실에서 착상한 허구
샤를 드골이 가장 아낀 로맹 가리 소설

 

권말에 첨부한 「참고 자료」에서 밝히듯 로맹 가리는 19세기에 실존했던 아르망 드니라는 아나키스트가 테러 감행 후 ‘증발’해버린 사건에서 작품의 모티프를 얻었다. 거기에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어느 노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레이디 L이라는 인물을 창조해 이야기를 완성했다고 한다. ‘에밀 아자르’ ‘포스코 시니발디’ 등 여러 필명으로 살며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재기 어린 작가답게 허구와 사실을 섞어 이야기를 직조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로맹 가리는 애상과 유머와 지성이 조합된 판타지로 역사의 틈새를 메워나간다.
이 작품은 로맹 가리의 사상적 동지라고 할 수 있는 샤를 드골이 가장 좋아한 로맹 가리 소설로 유명하다. 드골은 『레이디 L』 출간 후 로맹 가리에게 편지를 보내 “자네 소설 『레이디 L』은 정말 대단하군! 몇몇 이들이 ‘지나치다’고 말할 정도야”라고 극찬했는데, 특히 이 책에서 조롱한 영국식 허위와 위선에 유쾌해했다.

 

아르망은 한 계단을 더 올랐고, 그로모프가 마지막으로 절망적인 노력 끝에 빠져나오자 총을 들어 그의 심장에 한 발 쏘았다. (…) 흥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림과 속삭임과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음악이 다시 시작되었고, 밀랍 같은 얼굴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돌연한 막간극 전에 파티 장소를 떠날 채비를 하던 사람들마저 명예를 걸고 계속 춤을 추었다. 영국인다운 침착함을 보여야 하고 여주인이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야 한다는 듯이.
—209~210쪽

 

 

이념의 혁명, 사랑의 혁명, 관용의 혁명
모두 저마다의 자리에서 혁명 중

 

이 이야기는 맹목적이고 열렬한 사랑을 줄기로 쓴, 혁명의 시기에 보내는 연가다.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기, 그러니까 20세기를 사는 레이디 L이 19세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그녀는 현재의 안위보다는 과거의 기억에 갇히기를 원하는 듯싶다.

 

삶이 그런 것 아니던가. 그림의 천진한 기법 때문에 그 장면의 깊은 백치미가 한층 더 돋보여 아주 마음에 들었다. 60년 동안 위대한 예술만 접하다 보니 그녀는 걸작이라면 넌더리가 났다. 그리고 점점 더 조잡한 채색 그림들, 그림엽서들, 물에 빠진 아기를 구하는 용감한 개들, 장밋빛 사랑을 받는 고양이들, 달빛 아래 연인들로 가득한 빅토리아시대풍의 이미지들이 좋아졌다.
—10쪽

 

이야기가 주로 펼쳐지는 19세기는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 각종 혁명 이념이 태동해 맹위를 떨치던 시기다. 영국은 빅토리아시대로 가장 번영을 누렸다지만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반동 역시 격렬했다. 그래서 레이디 L에게 이 시기는 무언가 솔직하게 갈구할 수 있고 열정적일 수 있었던 젊음의 시기이자, 미모와 질투심과 애증과 변덕으로도 마음을 돌리지 못한 연인의 기억이 각인된 시기로 남았다.
이 낭만과 혁명의 시기를 세 사람이 함께 채색해나간다. 인류만을 사랑하는 매혹적인 아나키스트 아르망, 그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아나키스트가 되길 마다하지 않는 아네트(젊은 시절의 레이디 L), 그리고 고귀한 신분임에도 거리의 여자 아네트를 사랑해 귀족으로 거듭나게 해주는 괴짜 공작 글렌데일. 저마다의 명분으로 사랑을 쟁취하려는 노력들이 시대의 이념과 맞물려 다양하고 역동적인 애정의 모습을 그려낸다.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고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죠? 나를 사랑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나더러 완전히 달라져서 다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할 수 있죠? 내가 혁명의 소명을 거부한다면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오. 나 자신을 포기하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으라고 요구할 순 없소.”(아르망)
—115~116쪽

 

그녀는 혁명가가 자신에게서 본 것을 즉각 이해했고, 그가 상상하는 모습대로 보이려고, 그가 원하는 모습으로 비치려고 여성의 능숙한 기교와 직관적인 지성을 총동원했다. 부패한 사회의 희생양으로, 모욕당하고 분개해서 그와 함께 혁명에 가담하기만을 바라는 영혼으로, 그와 그의 동료들의 투쟁을 함께하기만 바라는 영혼으로 보이려고 말이다.(아네트)
—73쪽

 

“출생이니 귀족이니 신분이니 하는 그 모든 너절한 것들을 난 결사적으로, 심지어 공격적으로 조롱합니다. (…) 인간 존재에게 중요한 것은 성품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더없이 고귀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요. 당신은 내게 완벽한 동반자이자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의 이상적인 상속자가 될 겁니다.”(글렌데일)
—146~147쪽

 

어떤 이는 관념을 좇느라 사랑을 포기하고, 어떤 이는 사랑을 위해 자기를 버리며, 또 어떤 이는 사랑하기 때문에 아픔을 포용한다. 각자가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 자기를 걸고 혁명 중이다. 이 목소리들이 하나의 화음을 이루던 낭만의 시기를 로맹 가리는 특유의 냉소와 유머, 애상과 향수로써 그려낸다. 

 

  

첫 아내 레슬리 블랜치에게 보내는
로맹 가리의 선물

  

레이디 L은 그녀를 숭배한 귀족들에게 자신이 남긴 첫인상을 떠올리다가 예쁜 금발을 뒤로 젖히고 유쾌한 웃음을 터뜨려 주변 사람을 살짝 걱정하게 만든 적도 있다. (…) 사람들은 이 고귀한 귀부인의 기질에는 어딘지 비도덕적인 데가 있다고, 심지어 허무주의적인 데가 있다고들 수군거렸다. 게다가 그런 기질은 스스로에게 모든 걸 허용할 수 있고, 여러 세기 동안 특권을 누리느라 살짝 상궤를 벗어나기도 하며, 전혀 정중하지 않아도 되는 진짜 귀족들이 종종 보이는 특징이라고들 말했다.
—101쪽

 

이 책의 프랑스판이 출간된 1963년, 저널리스트 피에르 뒤마예와의 TV 대담에서 로맹 가리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어느 노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레이디 L’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로맹 가리의 여러 전기는 레이디 L의 모델이 첫 아내 레슬리 블랜치임을 밝히는데, 『레이디 L』 곳곳에서 레슬리 블랜치의 모습이 드러난다. <보그>지의 편집장이자 작가였던 그녀는 로맹 가리에게 영국식 예절과 우아한 영어를 가르쳐준 고마운 사람으로, 레이디 L처럼 당당하고 열정적이며, 넘치는 애정과 질투심과 앙심을 가진 여성으로 알려졌다.
『레이디 L』의 영어판(1958)과 프랑스어판(1963) 출간 사이에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와 사랑을 싹틔웠다. 로맹 가리가 이 작품을 어떤 마음으로 썼고, 이 작품이 레슬리 블랜치에게 어떤 의미일지 상상해보는 건 독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