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감성으로 읽어내는 500여 종 동물 이야기

매 쪽 섬세한 수채화를 곁들인, 생물책과 철학책과 시집 같은 사전

 

시인 권혁웅의 책장 한쪽엔 ‘형이하학’을 위한 자리가 마련돼 있다. 하늘, 땅, 바다를 무대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없이, 육체에서 시작해 육체로 마감되는 온갖 동물의 본능과 몸짓이 그의 저작에 자극이 되어왔다. 그가 펴낸 여러 시집과 신화책에서는 동물들이 수시로 고개를 내밀어 사람의 삶을 은유하고 환유한다. 동물의 본능적 삶, 지극한 정신 활동인 시작(詩作), 이 둘이 과연 서로를 갉아먹지 않고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을 저어하듯,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종교에서 인식론에 이르는 많은 사유가 육체 너머의 ‘저곳’을 목표로 삼아서 육체가 있는 ‘이곳’을 넘어서라고, 영혼을 고양하기 위해서 육체를 부정하라고 가르친다. (…) 반려동물과 조금만 살아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 그들도 우리도 똑같은 삶 앞에 있다. 그들도 울고 웃고 먹고 배설하고 죽음 앞에서 공포를 느끼고 불멸을 욕망한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의 처음에 변신담이 있는 것이다.

7쪽, 「책을 내면서」에서

 

『꼬리 치는 당신』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온갖 초식‧육식동물부터 공룡, 도도새, 모아처럼 이제는 세상에서 사라진 동물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그간 누누이 관심 가져온 동물에 대한 애정을 집대성한 책이다. 저자가 밝히듯 이 책에서 동물과 사람은 서로의 다른 이름인데, 저자는 때로는 인간의 관점에서, 때로는 인간의 껍질을 벗고서 “울고 웃고 먹고 배설하”는 자연의 삶을 경이롭고 유쾌하게 바라본다. 부제처럼 ‘동물’의 삶을 ‘시인의 감성’으로 ‘사전’처럼 간결하게 뜻풀이한 방식이 자못 즐겁다.

 

순록의 경우 수컷의 뿔은 초겨울에 떨어진 뒤에 새로 자란다. 암컷만이 겨우내 뿔을 달고 있지. 그러니 코가 빨간 산타의 짐승 루돌프는 사실 주정뱅이 암컷이거나 내시 수컷인 거야. 뭐, 주정뱅이 내시일 수도 있고.
31쪽, 「루돌프의 정체」

 

이 책에는 사자, 호랑이, 토끼, 여우처럼 익숙한 동물은 물론이고 사모아쇠물닭, 주머니고양이, 시파카, 탁총새우, 폭탄먼지벌레 등 낯설기도 한 500여 동물이 나와 갖가지 방식의 삶을 보여준다. 거기에 시인의 감성 어린 생각과 깨달음을 각주처럼, 추임새처럼 덧붙였다. 생물책과 철학책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유와 그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시집이나 백과사전처럼 거듭 꺼내 읽고 싶은 여지를 마련한다.
『꼬리 치는 당신』은 511개 매 꼭지마다 섬세한 선과 채색이 돋보이는 동물 수채화를 곁들였다. 펜과 붓 끝에서 태어난 동물들의 생생한 몸짓과 표정이 내리읽기가 아닌 쉬어 읽기의 즐거움을 건넨다. 삶을 대하는 일이란 빠르기만 해선 안 될 일이라는 듯이, 한 템포 쉬어 삶을 차분히 음미하란 듯이.

 

 

시와 산문 사이, 압축적 글쓰기

산다는 것의 만감 낯설게 유희하기

 

이 글의 장르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에세이와 시의 중간쯤을 의식하고 썼지만, 동물들에 관한 실제의 정보를 담고 있으므로 생물책이라고 우겨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고, 거기서 얻어낸 삶에 관한 지침이 없다고 할 수 없으므로 철학책이라고 해도 엉터리는 아닐 것이다. 아니면 이 책의 부제대로 일종의 사전이라 해도 좋겠다. 이 책은 그 모든 장르와 조금씩 닮았으면서 조금씩 다르다. 어쩌면 그런 새로운 형식에 대한 매혹이 이 책을 쓰게 한 최초의 동기인지도 모르겠다.
8~9쪽, 「책을 내면서」

 

『꼬리 치는 당신』은 연재나 청탁이 아닌 전작으로 쓰였고 트위터에 일부를 공개해 독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는 사이 100~200자의 제한된 글자 수 안에 최대한의 뜻을 담아야 하는 일종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 결과 『꼬리 치는 당신』은 내용 이외에도 압축적 글쓰기라는 매혹적인 형식미를 띠게 되었다. 자연과학의 사실과 사유와 감성을 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밀도 있게 압축한 글, 이 시도를 시로도 산문으로도 정의하기 어려운, 아니 시이기도 하고 산문이기도 한 새로운 형식의 글이라 부르면 어떨까.

 

남은 꼬리가 꿈틀대는 동안 도마뱀은 달아나지. 잘린 꼬리가 자라는 동안 도마뱀은 생식도 성장도 하지 않는다. 그이가 당신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고 아파하지 마시길. 당신이 그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동안 당신은 살아남은 거야. 꼬리 치는 당신도 아팠다고.
36쪽, 「꼬리 치는 당신도 아팠다고」

 

글자 수를 제한한 덕분에 저자는 산문에서마저 시인 본연의 자질을 마음껏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의 글은 간결하고 유머 어린 말놀이로 시작했다가도 곱씹을수록 향이 짙어지는 시의 맛이 난다. 저자는 앞서 출간한 시집들처럼 『꼬리 치는 당신』에서도 현실의 익숙한 이미지들을 수시로 불러낸다. 사람의 현실이 동물의 삶 속에서 재현될 때, 일상이 ‘동물스러워’ 보이는 낯선 경험을 할 때 슬그머니 배어나는 유머 또는 비감이 사람 사이에서만큼이나 속 깊은 교감을 불러일으킨다.

 

파리지옥은 꿀 바른 이파리 두 장으로 파리를 꾄다. 놀라운 건 이파리에 나 있는 감각모가 두 번 이상 움직여야 덫을 작동시킨다는 것. 그러니까 어렸을 때 하던 쌀, 보리, 쌀, 보리…… 게임이지. 한 번 건드리면 보리, 두 번 건드리면 쌀, 이런 거지. 잡고 나서 보면 파리지만.

361쪽, 「쌀과 보리 사이」

  

아델리펭귄의 포식자들은 하늘에서온다. 남극도둑갈매기들이 통통한 새끼를 채 가는데 부모가 막을 방법이 없다. 동그랗고 단춧구멍같이 생긴 눈으로 쳐다볼 뿐. 얼굴 근육이 없기 때문에 멀뚱. 뺏겨도 멀뚱, 슬퍼도 멀뚱, 눈물이라도 흘리면 좋을 텐데.
401쪽, 「펭귄과 가면」


  

솔직하게 사랑하고 솔직하게 혐오하기

시인 권혁웅이 동물을 존중하는 방식

 

『꼬리 치는 당신』에는 수백 마리의 동물이 나온다. 인간사가 제각기 다르듯 동물 세계에도 포식자와 피식자, 사기꾼과 성자(聖者) 등 여러 계층, 여러 태도의 삶이 있다. 시인 권혁웅은 한없이 아름답지도, 야만적이지도 않은 이들 동물의 세계를 색안경을 벗고 마주한다. 눈에 보이듯 아름다운 대로, 잔혹한 대로, 애틋한 대로 솔직하게 동물을 읽는다.

 

녹색을 내는 색소가 없으면서도 박각시나방은 초록색 알을 나뭇잎에 낳는다. 천적이 발견할 수 없도록 위장색을 입힌 것. 어떻게 초록색 알을 낳는 걸까? 애벌레 시절에 먹은 잎의 엽록소를 몸에 저장했다가 알에 주는 거다. 박각시나방, 마음이 참 예쁘다. 이것이 진짜 어머니 마음.
-50쪽, 「어머니의 마음 2」

 

범고래가 혹등고래 새끼를 사냥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어미 고래가 제 몸 위로 새끼를 올려 보호하려 했으나 당해낼 수가 없었다. 범고래는 고래 가죽을 뚫을 수 없어서 비교적 연한 새끼의 입 주변만을 파먹고 버린다. 입만 너덜너덜해진 새끼를 보는 어미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343쪽, 「참척이라는 것」

 

그가 동물을 대하는 방식은 일관되다. 저자는 아무런 꾸밈 없이 적나라하게, 가장 본능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동물들에게 가장 인간다운 방식의 화답을 한다. 연민과 애정뿐 아니라 혐오까지도 솔직히 드러내는 것. 사람이라는 ‘동물’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동원해 동물 세계를 경이해 마지않는 그의 존중법은, 그래서 무척 동물적이고 인간적이다.

 

  

추천사

 

권혁웅은 집대성의 대가인 것 같다. 어느 한 분야를 평생 동안 집대성하는 사람은 이따금 보아왔지만, 집대성을 집대성하고 있는 저자는 우리 시대엔 아마도 권혁웅이 유일할 것이다. 이번엔 ‘동물’을 비롯한 별별 생명체에 대해서다. 경이롭도록 다양하다. 우리가 잘 모르는 생명들의 속내가 페이지마다 촘촘하다. 개체들의 특징을 어찌나 맛깔스럽게 축약해놓았는지, 결국 한 편의 시와 닮아 있다. 이 세계는 이제 권혁웅의 것이 되었다. 이 무궁무진한 생명의 세계, 이 간명한 발견의 세계. 동물들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던 사람은 차례만 펼쳐보고도 이 책을 소유하고 싶어질 것이고, 동물들에 대해 호기심이 없었던 사람은 몇 페이지를 읽어보다가 호기심이 차오르게 될 것이 분명하니, 『꼬리 치는 당신』은 모두가 곁에 두고 싶은 사전임에 틀림없다. 미리부터 궁금하다. 다음번, 또 그 다음번, 권혁웅이 집대성에 도전할 또 다른 세계가.

김소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