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작가" 제임스 설터를 알린 대표작
프랑스를 배경으로 정교하게 세공한, 쓸쓸한 포르노그래피

 

<가디언>지는 2013년에 (다작이 아닌) 제임스 설터를 두고 “필립 로스와 존 업다이크가 유명한 방식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대단하다고 일컬어지는 부류의 미국 작가”라며 “작가들의 작가”라는 수식어를 다시 언급했다. 어쩌면 제임스 설터는 아직 그들만큼의 유명세를 얻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매우 유명하고 단단한 지원군을 둔 작가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수전 손택은 제임스 설터를 “독서의 강렬한 즐거움을 아는 독자에게 특히 어울리는 작가”라 칭송하며 “전작을 탐독하고 싶고, 아직 출간되지 않은 책이 초조하게 기다려지는 작가”라고 말했고, 줌파 라히리는 “작가로서 그의 소설에 부끄러울 정도로 큰 빚을 졌다”라고 말했다. 필립 로스와 함께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리처드 포드는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제임스 설터가 오늘날 미국 최고의 문장가라는 사실은 일종의 신념과 같다”라고 이야기했고, 퓰리처상을 수상한 <뉴욕타임스>의 명비평가 미치코 가쿠타니는 “제임스 설터는 한 문장으로 개인사의 모든 면을 담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 모두가 여느 수식어나 찬사보다 확실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제임스 설터의 위상을 치켜세운다.
『스포츠와 여가』는 제임스 설터의 통산 세 번째 장편소설이자, 마음산책이 출간하는 그의 세 번째 작품이다. 1967년 발표되어 ‘제임스 설터’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작품으로, 60년대 초반에 제임스 설터가 프랑스에서 겪었던 일이 모티프가 되었다.
이 소설은 프랑스에서도 60년대의 어지러운 세파가 미치지 않던 작은 마을 오툉에서의 애정사를 다룬다. 이야기를 이끄는 건 서른넷의 남성으로 친구의 집을 빌려 얼마간 오툉에 머물게 된 ‘나’다. 그는 오툉에서 예일대를 중퇴한 스물넷의 미국 청년 필립 딘과, 카페 종업원으로 일하는 열여덟 살의 가난한 프랑스 처녀 안마리 코스탈라를 가까이서 지켜보게 되고, 이들의 만남과 사랑, 이별을 모두 마주한다. 육체에 이끌려 사랑과 결혼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일이 권태와 이별로 엇나가기까지의 모든 행로를, 화자인 ‘나’는 직접 목격한 일인지 상상인지 모를 이야기로 그려나간다. 끝까지 익명으로 남아 있는 화자의 관찰 (혹은 상상) 속에서 필립 딘과 안마리 코스탈라는, 여느 애정보다 진하고 육체적이지만 끝이 예감되는 쓸쓸한 사랑을 나눈다. 이것을 제임스 설터는 현실과 상상과 기억을 정교하게 뒤섞어 “오묘하고 은밀한” 꿈처럼 그렸다.
『스포츠와 여가』는 사실적인 성 묘사로 한동안 출판사를 찾지 못하다가 <파리 리뷰> 편집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조지 플림턴을 만나 가까스로 출간된 일화가 있다. 하지만 성 묘사가 이 소설의 장치일 뿐이라는 건 “에로틱 리얼리즘의 걸작”이라는 <뉴욕타임스>의 리뷰만으로도 알 수 있다.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는 <뉴욕 리뷰 오브 북스>를 통해 이 소설을 다음과 같이 예찬했다.

 

『롤리타』가 나보코프에게 차용된, 매력적으로 천박한 미국에 바친 발렌타인 카드 같은 것이라면, 『스포츠와 여가』는 설터가 그의 프랑스에 보내는 발렌타인 카드다.
-조이스 캐롤 오츠

 

 

제3자가 되뇌는 어떤 연애사
사실과 상상을 오가며 그리는 덧없는 사랑

 

이 글은 오툉에서 찍은 사진들에 부친 메모다. 그저 메모로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뭔가 다른 것,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을 서술하게 되었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이 사건은 오직 내게만 의미 있는 것이지만 더는 감추지 않으련다. 그 시간은 과거가 되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그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다. 내가 오툉이라고 했지만 사실 오세르가 될 수도 있었다. 여러분도 분명히 이런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저 내 마음속에 들어왔던 세부를, 내 살을 찢어버릴 수 있었던 파편을 기록할 뿐이다.
-21~22쪽

 

서른네 살에 규범화된 삶을 살아온 ‘나’는 기차를 타고 프랑스의 작은 마을 오툉에 있는 친구의 저택을 찾는다. 친구의 권유로 머물게 된 빈집에서 그는, 몇 장의 사진으로 남은 이곳에서의 과거를 바탕으로 기억을 혹은 상상을 재구성해나간다. 화자인 ‘나’의 기억은 잘생기고 수재인 미국 청년 필립 딘과, 젊고 아름다운 프랑스 처녀 안마리 코스탈라의 사랑에 가닿는다.
‘나’는 필립 딘을 친구의 파티에서 만났다. ‘나’의 기억 속에서 필립 딘은 일찌감치 예일대를 그만두고 유럽과 남미를 여행한 자유분방한 청년이다. 52년형 들라주를 몰며 어디서나 고유한 매력으로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필립 딘에게 ‘나’는 호감을 갖게 되고, 그의 사생활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야생마 같은 그의 자유로움과 젊음, 성적 매력에 대한 부러움을 품고서.
어느 날 ‘나’와 필립 딘은 열여덟 살에 불과한 카페 종업원 안마리 코스탈라를 만난다.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로 보이지만 십 대의 나이에 흑인 미군을 애인으로 두었을 만큼 세상을 텄고, 굴을 먹어본 적이 없을 만큼 가난한 여자다. 필립 딘은 그런 그녀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끌리고, 그녀를 꾀어 육체를 나누고, 언제고 끝나지 않을 듯 현재에 충실한 깊고 관능적인 사랑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둘의 애정이 깊어질수록 사랑은 현실이 되어간다. 가족을 소개하고 결혼에 대한 생각을 묻는 안마리의 적극적인 태도에 필립 딘은 뒷걸음치기 시작한다. 그는 사랑 뒤에 부과될 책임이 버거워 결국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필립 딘과 안마리의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하는 건 어디까지나 제3자인 ‘나’다. 소설이 끝나도록 자신을 밝히지 않는 화자 ‘나’는, 필립 딘과 안마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현재형의 화법으로, 연인의 한없이 내밀한 일들까지 머릿속에서 그려나간다. 사진처럼 기억처럼, 이따금은 맥락 없이 이야기되는 한 연인의 은밀한 개인사. 무엇이 들은 이야기이고 목격한 이야기인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화자인 ‘나’는 밝히지 않는다. 다만 가끔씩 불쑥 끼어드는 과거형의 문장들에서 상상의 균열을, 화자의 욕망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연인의 일상을 좇는 동안, 독자는 사랑의 흥망성쇠를 함께한다. 세상을 태울 듯 일순간 달아올랐다가 끝을 모르고 식어가는 권태까지도.

그들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서로 몸을 붙인 채 오랫동안 누워 있다. 그들을 결합시켜 주는 게 그런 몸의 대화라는 사실이 끔찍하다. 그 잔인함이 그들을 사랑으로 이끈다.

 

나는 그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책을 읽고 있다. 그런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앙리 4세가 루아얄 광장과 퐁뇌프 다리를 세우며 파리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나는 그 줄을 읽고 또 읽는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만,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아무 말도. 내가 가진 것은 다만 통나무처럼 무거운 문장들뿐.
-87쪽

 

그녀가 임신을 하면 어떡하나, 그는 생각한다. 무거운 구름 아래쪽이 납처럼 짙다. 그 생각은 가만히 다가왔지만 그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는다. 그는 감히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수 없다. 문득 그는 자신이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느낀다. 그런데 그녀가 아기를 낳는다면 그는 어떡해야 하는가? 간단히 떨치고 떠나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두 발이 차가워진다. 두 뺨이 건조한 걸 느낀다. 오후의 한기가 그의 영혼 속으로 들어와버린 것 같다. 그녀는 저 아래 물가를 따라 걷고 있다. 딘은 이 일이 어떻게 끝날까를 생각하며 둑 위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130쪽


 

작가 자신이 꼽은 ‘기억에 남을’ 작품
몸의 언어를 솔직하게 표현한 에로티시즘

 

제임스 설터는 평범한 애정사로 보일 수 있을 필립 딘과 안마리 코스탈라의 관계를 제3자의 상상으로써 전달한다. 사랑은 환락과 같은 속성이 있다. 사랑은 현실에 마모되게 마련이고, 결국 남는 건 빛처럼 환하지만 실체가 없는, 셀 수 없이 많은 순간들로 파편화된 판타지뿐이다. 이처럼 과거의 일이 되고 타자화되어야만 발견되는 뒤늦은 가치. 그래서 사랑은 덧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제임스 설터는 『쿠란』의 구절을 빌려와 이야기한다.

 

현세의 삶이란 한낱 스포츠와 여가일 뿐임을 기억하라.
-『쿠란』 57장 「무쇠의 장」

 

제임스 설터는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기억에 남을 두 작품을 꼽아달라는 요구에 『가벼운 나날』과 『스포츠와 여가』를 들었다. 『스포츠와 여가』는 그만큼 제임스 설터의 애착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을 출간하고 사실적인 성 묘사 때문에 평단과 독자의 호불호가 갈린 것을 두고 제임스 설터는 이렇게 말했다.

 

“에로티시즘은 이 소설의 중심이고 본질입니다. 그건 분명해요. 로르카의 말을 빌리자면 난 이 소설이 음란하되 순수하고, 어떤 면에선 말로 나타낼 수 없으면서도 억누르기 힘든 것들을 묘사했으면 싶었어요.”
-제임스 설터, <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스포츠와 여가』는 몸을 단지 관능의 매개물로만 다루지 않는다. 정신과 육체 중 어느 한쪽에 우선순위를 두기보다, 몸은 그 자체로 고유한 언어이자 교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살을 부딪는 일은 때로 천 마디 말보다 깊은 정서적 교감을 이루는 일이며, 역설적이게도 사랑은 이러한 교감마저 저버릴 만큼 알 수 없이 스러져갈 수 있음을 『스포츠와 여가』는 보여준다.

 

 

추천사

 

그들의 이야기는 “줄곧 빛을 포착해내는, 가늘게 반짝이는 파편”들이다. 빛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정교한 은 세공품. 내가 읽은 설터의 작품들이 바로 그러하다. 그 빛이 어찌나 오묘하고 은밀한지, 빛이 아니라 향에 스며들었다가 나온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어떤 사태를 다 지켜본 듯한데, 그 벌로 고요하고 명료한 통증을 받는다. 질투가 난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방식. 그 달콤한 사랑의 향연들. 빛에 흠뻑 젖은 젖가슴과, 강물로 흐르는 허벅지가, 자신의 영역을 찾아 으르렁거리며, 빛의 강으로 교합되는 순간, 명멸하는 신선한 흰 빛에. 꿈을 꾼다. 빛이 지속되기를. 그 빛을 지속하는 힘의 원천이 바로 내 것이기를. 그것은 은밀히 품고 있는 바람, ‘꿈꾸기 위한 실마리’이다. 설터가 그들의 이야기로 빛의 오르가슴을 선사했다면, 나는 오르가슴 끝에 나오는 옅은 한숨을 맡겠다. 홉. 숨을 멈추고 빛을 가두겠다. 이것들이 ‘내 심장을 건드린 것 같’다.

천운영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