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칼과 입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새롭게 펴내는 윤대녕 산문의 정수, 팔순 어머니에게 바치는 책


한국문학에서 그의 영토는 고유하다. “이를테면 삶의 사막에서, 존재의 외곽에서”(「은어낚시통신」, 1994) 인간 존재의 시원과 여정을 끊임없이 탐구해온 작가 윤대녕. 그의 문학적 대기 안에서 한국문학이 좀 더 풍요로운 시절을 향유했다는 건 자명하다. 작가적 도정 가운데 그만이 일구어낼 수 있는 성취 하나는 그의 입과 눈과 발이 머무는 곳, 곧 음식과 길 위의 여행이 집약된 산문의 장일 것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진행하는 팟캐스트에서 음식 이야기를 윤대녕 작가만큼 쓸 수 있는 이는 없다, 라고 말했다. 특유의 아름다운 한국어 구사와 우리 음식에 대한 사랑과 감수성이 절절한 산문이라 칭했다. 그 책, 많은 독자의 애정을 받았고 끊임없이 회자되어오던 윤대녕의 맛 산문집 『어머니의 수저』를 출간 10년 기념 특별한 산문집으로 다시 펴낸다.
작가는 지난 2015년 1년여 캐나다에 거주하는 동안 손수 해먹던 매번 어딘가 잘못 조리된 것 같은 음식 이야기를 하며, 지난 세월을 음식으로 다시금 소환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사람은 태어난 곳으로부터 사방 십리의 음식을 먹고 살아야 무병하다는 그의 말처럼, 결국 돌아올 곳 화해할 곳은 지난날의 음식, 시간, 사람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간의 풍화에 훼손되지 않은 기억의 풍경을 하나하나 복원해 새롭게 가다듬었고 시간을 견디지 못한 글은 아낌없이 내려놓았으며 오류는 마침내 바로잡아 『칼과 입술』로 매듭지었다. 이 책은 열 가지 맛의 기억 사전 형식을 빌려 우리나라 음식의 기본이라 할 된장, 간장, 고추장, 김치, 장아찌, 젓갈부터 소, 돼지, 닭 그리고 갖가지 생선, 술, 제주도와 섬진강의 먹을거리 등을 정갈하고도 맛깔나게 써내려간 윤대녕 작가만의 풍미 가득한 산문집이다.
세태가 변하고 취향이 변하는 가운데서도 음식과 맛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오래도록 기억된다. 그 맛이 우리를 키웠고 살게 했던 힘이었기에 그러하다. 하물며 작가가 음미하는 맛의 멋은 변치 않는 고도의 미감을 선물한다. 맛으로부터 출발해 삶의 수려한 감각을 다시 목도할 산문집, 윤대녕의 귀환이 귀한 이유다.
한편 작가가 책머리에 밝히고 있듯 『칼과 입술』은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팔순이 넘은 그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책이기도 하다.



“나는 너의 그 푸르른 힘을 빌려 간신히 그 시절을 지나왔다”
몸과 마음을 보하는 음식, 시간, 사람의 기억 사전


이 책은 우리나라 사방을 감싸는 지리적 음식 기행서인 동시에, 어린 시절, 방황의 청년 시절을 거치는 시간 속의 음식 여행 이야기다. 음식의 재료가 자라난 곳, 음식을 만든 사람, 그 음식을 먹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곳곳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흰 종지에 담긴 간장을 보며 어머니가 자신을 낳지 않으려 간장을 퍼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막내삼촌의 말없음을 “그윽히 서러워”하고, 학창 시절 연말이면 문학도들과 함께 찾아가던 대전 시장의 두부 두루치기집을 생각하며 어린 시절 집으로 배달해 먹던 두부라는 음식의 안온함을 덧대 기억한다. 이십대 시절 방황하던 청년으로 절에 곁방살이를 하면서 벌로 장아찌만 먹어야 했던 일부터 직장을 다닐 무렵 광화문에 자리하던 생선구이집에서 맞던 고단한 저녁들을 생각한다. 죽은 전처를 잊지 못해 방황하는 사내와 섬진강의 한 여관에서 밤새 화투를 치면서 마셨던 고로쇠 물을 섬진강의 추억으로, 거주할 무렵 낚시에 심취해 낚았던 많은 물고기들을 제주도의 맛으로 써내려가기도 한다. ‘나 된장찌개 잘 끓이는데’라는 말을 만날 때마다 하던 여자애와의 못다 이룬 사랑은 된장이라는 음식으로 수렴되며, 젓갈을 보며 “어머니의 짠 젖”이라 명명한다.


내 생애 그토록 정갈한 밥상을 받아보기는 그제나 이제나 처음이었다. 그 밥은 맛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장아찌 덕분이었다. 어느 장아찌든 된장독 속에 오래 박아둔 터라 깊은 맛이 배어나왔다. 장아찌가 밥도둑 역할을 한 것이다. 한 달이나 장아찌 반찬으로 밥을 먹는 동안, 나는 몸과 마음이 지극히 맑아지는 경험을 했다. 그 장아찌들은 묵언默言으로 전하는 스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내게 장아찌는 하나의 법法이다.
-100쪽에서


작가의 기억으로 다시 태어난 음식 이야기는 행간마다 “사람의 울혈진 속을 달래주는 맑고 뜨거운 해장국으로 변한다”. 돌아갈 수 없어 더 애틋해진 풍경들이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에 되살아나며 숨어 있던 우리의 미각을 일깨운다.


겨울의 황태 덕장은 그 풍경이 장엄하다. 바다에서 잡힌 명태가 깊은 산중에서 눈보라와 햇빛과 어둠에 번갈아 익어가는 과정은 사람이 도를 닦고 법을 구하는 일만큼이나 지난하다. 그것이 마침내 황태국이란 이름으로 아침 밥상에 올라오면 사람의 울혈진 속을 달래주는 맑고 뜨거운 해장국으로 변한다. 나 역시 해마다 속초와 강릉과 양양을 오르내리며 얼마나 많이 황태국으로 쓰린 속을 달랬던가. 속초 동명항의 허름한 횟집에서 가자미, 도다리, 미역치, 돌참치를 회로 썰어놓고 마신 소주는 또 얼마인가. 그때마다 황태국은 설악에 쌓인 눈처럼 내 지친 몸과 마음을 맑게 풀어주곤 했다.
-116쪽에서



“윤대녕 씨는 참 자상한 사람이군요”
지극히 섬세한 이의 인생 음미,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자 위안


『칼과 입술』은 윤대녕 작가가 소환한 기억의 맛이지만 그 안에는 철저히 발로 뛴 흔적이 가득하다.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장소와 그곳의 음식들은 그의 경험과 공들인 자료 수집이 더해져 진진한 맛여행 산문집으로 자리한다. 음식의 기원이나 계보 등 지식과 정보는 『자산어보』 같은 옛 문헌과 익히 전해 내려오던 고전, 구전되던 전설까지 방대한 자료를 참조했음은 물론 몸으로 맞닥뜨린 숱한 취재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간잽이, 어부, 식당 아주머니 등 현장 고수들의 지혜로운 말씀 등은 이 글을 읽는 또 다른 재미다.


이 근처가 조기잡이로 유명한 칠산어장이라네. 봄이 되면 산란을 위해 제주도와 추자도를 거쳐 이쪽으로 조기 떼가 몰려오지. 그때가 되면 북상하는 조기 떼들이 개구리 울음소리를 내며 바닷물 위로 뛰어오르는 걸 볼 수 있어. 수놈이 암놈을 부르는 소리라고 하지. 또 썰물 때가 되면 조기 떼가 수면 가까이에 떠서 퇴거하기 때문에 마치 바람에 숲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네. 어릴 때 아버지와 배를 타고 나가 바닷물 속에 대나무를 꽂고 조기 떼 우는 소리를 듣곤 했어. 살구꽃이 필 때면 수백 척의 안강망 어선이 운집해 일대 파시를 이루는데 밤이 되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네. 이봐, 봄이 되면 나는 자주 조기 떼 꿈을 꿔. 그들과 함께 푸른 카펫이 깔린 바닷속을 유영하는 꿈을 말이야.
-137~138쪽에서


산문집 가운데 소설가 배수아가 작가에게 보냈다는 이메일의 답장은 이러하다. “윤대녕 씨는 참 자상한 사람이군요.” 이 산문집으로서 지극히 섬세한 작가 윤대녕을 음미하기에 충분하다. 10년의 시간을 돌아 다시 ‘회귀’한 작가만이 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자 위안”이 여기에 있다.


저녁을 굶은 채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온 밤에 아내가 끓여주는 조기 매운탕과 뜨거운 밥 한 그릇은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자 위안이다.
-144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