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

로맹 가리 생애 마지막 장편소설


하나의 정체성에 속박되지 않으려고 여러 필명을 썼던 작가, 본명으로 발표한 소설 『하늘의 뿌리』와 필명 ‘에밀 아자르’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으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유일무이하게 두 번 받은 작가 로맹 가리. 그의 생애 마지막 장편소설 『노르망디의 연』이 출간되었다. 

『노르망디의 연』은 작가가 죽기 직전, 1980년에 발표한 마지막 소설이면서 마음산책 ‘로맹 가리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열다섯 번째 책이다. 2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펼쳐지는 이 전쟁 서사극은 작가가 생애 끝까지 놓지 않았던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희망을 ‘연’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로맹 가리가 평생 천착했던 사랑, 우애, 자유, 인간의 존엄성 등의 주제가 전면에 드러나면서 깊은 감동을 전한다. 이렇듯 진중한 주제를 다루지만 주인공이자 화자인 소년 뤼도의 성장과 첫사랑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는 소년의 섬세한 감수성과 함께 유머를 듬뿍 담아내고, 다양한 처지의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이 얽히고설켜 몰입감을 선사한다. 

책을 펴는 순간 독자를 2차 세계대전의 가장 치열한 전투가 펼쳐질 노르망디로 단숨에 끌어들이는 『노르망디의 연』은 전쟁고아로 삼촌과 함께 사는 뤼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뤼도의 삼촌인 앙브루아즈 플뢰리는 노르망디 지역에서 유명한 연 장인으로, 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평화주의자가 되고 연 만들기에 빠져 매일 들판에서 연을 날린다. 한편 뤼도에게는 집안 대대로 이어진 한 가지 능력이 있는데 한번 본 걸 절대 잊지 않는 뛰어난 기억력이다. 어느 날, 폴란드 귀족인 브로니츠키 집안이 노르망디로 휴양을 오고 뤼도는 그 집안의 딸 릴라에게 첫눈에 반한다. 얼마 뒤 폴란드로 돌아간 릴라를 잊지 못하고 상사병을 앓던 뤼도는 4년 만에 릴라와 재회하고 연인이 된다. 그러나 둘의 행복한 나날과 반대로 유럽에는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뤼도와 릴라를 갈라놓고 둘은 서로의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된다. 뤼도는 자신의 기억력으로 끊임없이 릴라를 상상하면서 재회의 희망을 꿈꾸고,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합류해 나치에 맞서 저항한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릴라는 폴란드를 탈출해 프랑스 파리로 가지만, 살아남기 위해 몸을 파는 신세가 된다. 릴라의 먼 사촌인 독일 장군 폰 틸러가 노르망디 지역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마침내 뤼도와 릴라는 재회한다. 하지만 운명은 이들을 다시 예상치 못한 길로 안내하고 2차 세계대전 최대의 격전이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디데이가 서서히 다가온다.


『노르망디의 연』이 출간되기 직전에 이루어진 생애 마지막 라디오 대담에서 작가는 이 작품이 자신에게 “대단히 소중하고 중요한 소설”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불과 몇 개월 뒤 그는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작가는 죽기 직전에 남긴 몇 줄의 글에서 자신이 죽는 이유를 마지막 소설인 이 『노르망디의 연』의 마지막 구절 “더 잘 말할 수는 없겠기에”에서 찾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덧붙인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 

-「옮긴이의 말」



전쟁에 맞선 인간의 사랑과 희망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


『노르망디의 연』의 제목이자 중요한 상징인 “연”은 하늘에 띄운 모든 인간적 가치를 나타내는 동시에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간을 은유한다. 연은 하늘에 속했지만 동시에 줄로 땅에 매여 있듯, 현실에 발을 디뎠지만 인간은 계속 이상을 꿈꾼다. 그러나 연이 줄을 끊고 날아가면 결국 추락해서 “나무 도막과 잔해”가 되는 운명인 것이다. 추락하기 쉽지만 그럼에도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이카루스 같은 인간의 실존을 연은 암시하고 있다. 로맹 가리는 산문집 『인간의 문제』에서 “인간의 발전은 과학보다는 신화에 달려 있다”고 단언하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과 상상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런 작가의 신념은 모든 인간적 가치가 땅에 떨어진 전쟁이란 현실에서도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때로는 죽음까지도 감수하는 등장인물들의 저항을 통해 극적으로 표현된다. 

먼저 주인공 뤼도는 릴라를 잊지 않기 위해 전쟁의 고난 속에서도 그녀를 계속 상상하며 끝내 사랑을 지켜낸다. 뤼도의 학교 선생님인 팽데르도 “상상의 작품이 아닌 건 살아볼 가치가 없어”라며 뤼도에게 상상의 힘을 강조한다. 루소, 볼테르, 졸라 등 프랑스 위인들의 연을 만들고, “이 땅에서 영원히 순수하고 변질될 수 없는 모든” 아름다움을 연을 통해 표현하고 지키려는 앙브루아즈는 강제수용소에 유대인 아이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가 자신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다. 릴라의 오빠 타드는 폴란드 의용군으로 나치에 맞서고 독일군 장교 한스는 전세를 뒤엎기 위해 히틀러 암살 계획을 꾸민다.

이렇게 나치에 직접 저항하는 등장인물들도 있지만 다른 방식으로 “위대한 프랑스”라는 이상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인물도 있다. 노르망디의 유명한 식당 “클로 졸리”의 주인 마르슬랭 뒤프라는 스스로 최고의 프랑스 요리사라 믿는 자존심 강한 인물로, 점령군 나치의 억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프랑스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요리에 전심전력을 다한다. 명성을 듣고 찾아온 고위 나치군에게 식사를 대접하면서 노르망디 사람들에게 욕을 먹지만, 그는 자신만의 신념과 존엄성을 꿋꿋이 지켜나간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에 자유프랑스 공군으로 참전했던 로맹 가리는 전후 35년이 지나 발표한 『노르망디의 연』으로 당시 나치에 맞섰던 프랑스인들, 나아가 엄혹한 현실에서 존엄성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저항했던 모든 이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로맹 가리에게 소중한 모든 테마들이 새롭게 변주된다. 전쟁, 상상과 기억의 힘, 자유, 저항, 우애 등. 전쟁은 평화로울 때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주는 계기다. 인간이 저마다 내면에 품은 최악과 최선이 표출되는 기회다. 세상이 느닷없이 굴러떨어진 전쟁이라는 진창 속에 폭력과 비굴, 우애와 사랑, 억압과 저항의 초상들이 뒤섞여 뒹군다. 로맹 가리에게 상상과 기억은 현실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갖춰야 할 최고의 무기다. 그는 우리가 상상력을 잃는 순간 “네발로 기게”되며, 문명이란 상상력을 동원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의 목을 계속해서 비트는” 일이고, 사랑할 때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옮긴이의 말」



2차 세계대전 배경의 정교한 팩션 소설

연에 띄운 작가의 애정 어린 마지막 인사


『노르망디의 연』은 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섞인 팩션 소설이다. 1차 세계대전부터 뮌헨회담,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공방전, 자유프랑스군의 활약과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까지, 굵직한 역사적 사실들이 골격을 이루며 이야기와 정교하게 맞물린다. 특히 1943년 실제로 독일군 장교들이 실행했지만 실패했던 히틀러 암살 계획에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가담한다는 허구적 상상이 돋보인다. 히틀러, 괴링, 페탱, 드골, 처칠 등의 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인물들도 언급되면서 서사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친다.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직접 경험했던 로맹 가리는 『노르망디의 연』의 결말 부분에서 전쟁이 남긴 또 다른 상흔에 주목한다. 프랑스 해방 후 릴라는 사촌이었던 폰 틸러 독일 장군과의 관계 등을 이유로 나치 부역자로 오해받고 노르망디 사람들에게 학대를 당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인간 내부의 야만성을 경고한다. 완전히 해결될 수 없는 전쟁의 비극과 아이러니를 겪으면서도 마침내 사랑을 지켜낸 뤼도와 릴라는 등장인물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로맹 가리는 평생 놓지 않았던 인간에 대한 사려 깊은 애정과 기대를 ‘노르망디의 연’에 마지막으로 실어 독자에게 보냈다. 


─이제 폴란드는 없어.

앙브루아즈 플뢰리가 말했다.

─어쨌든 프랑스에서 새 폴란드 군대가 다시 편성되고 있어요. 

뭔가를 알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요. 저한텐 밝은 희망이 있어요.

삼촌은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니? 가거라. 우리 같은 사람들을 지휘하는 건 언제나 희망이지. 그 지칠 줄 모르는 녀석 말이다.

-1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