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기술이 있다면 제임스 설터에게 배우고 싶다”
‘작가들의 작가’ 제임스 설터의 소설 쓰는 법


2014년 가을, 미국 버지니아대학교는 제임스 설터를 ‘캐프닉 저명 전속 작가’로 초빙했다. 이 대학교에는 캐프닉 가문의 후원 아래 미국 저명 작가들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는데 그해 설터가 선정된 것이다. 제임스 설터는 ‘20세기 미국 문단에 한 획을 그은 소설가’ ‘작가들이 칭송하는 완벽한 스타일리스트’로 정평이 난 작가다. 그가 캐프닉 저명 전속 작가 자격으로 진행한 문학 강연은 그래서 소설가를 지망하는 학생에겐 더욱 특별했다. 설터가 사망하기 10개월여 전이자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 『올 댓 이즈』가 나온 지 1년이 조금 지난 때였다.
설터의 강연을 엮은 책 『소설을 쓰고 싶다면』은 『그때 그곳에서』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소개되는 제임스 설터의 산문이다. 마지막 장에는 1993년 미국 문예지 <파리리뷰>에 실렸던 인터뷰 내용을 더했다. 『올 댓 이즈』 『어젯밤』 『가벼운 나날』 『사냥꾼들』 등의 소설과는 또 다른 방식과 매력으로 작가의 육성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설터는 “소설 쓰는 법은 따로 없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의 독서 이력, 문학관, 소설가로서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작가로서 확신이 없던 지난날을 고백하기도 하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쓴 첫 장편소설이 악평을 받은 일화도 소개한다. 하지만 설터의 관찰과 경험이 어떻게 소설로 구현되었는지 듣다 보면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소설 쓰기엔 정답이 없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놓쳐선 안 되는 것들이 있다고 말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실은 특정한 사람들의 소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소설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것에 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나는 누가 여러분에게 소설 쓰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설령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한 시간 만에 가르칠 수는 없겠지요.
―42쪽



“소설을 쓰고 싶다면 소설을 읽어야 한다”
‘읽기’로 시작한다


설터의 강연 주요 테마는 ‘소설 쓰기’다. 하지만 설터는 “소설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며 잠시 한 발 물러선다. 그리고 ‘쓰기’ 대신 ‘읽기’에 대한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한다.
첫 번째 강연 「소설을 쓰고 싶다면」에서 설터는 발자크와 이사크 바벨, 플로베르 등 자신이 좋아하는 여러 작가와 작품들, 자신이 읽고 싶은 책들을 열거한다. 이는 「장편소설 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다양한 예시들을 통해 소설 쓰기의 길잡이를 제시한다. 발자크가 『고리오 영감』에서 어떻게 인물과 배경을 묘사하고 시점을 이동했는지, 플로베르가 정확한 문체를 구사함으로써 얼마나 글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는지, 헤밍웨이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무기여 잘 있거라』에 어떻게 녹아들어갔는지, 트루먼 카포티와 솔 벨로가 소설 속에서 배경을 어떻게 활용해 전개해나갔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설터는 이렇게 소설을 ‘쓰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소설을 잘 ‘읽어내야’ 함을 강조한다. 읽지 않고 쓰기부터 시작한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는 독서가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설터의 깊고 충실한 독서 이력은 그가 “단 한 줄의 문장으로 가슴을 깨뜨릴 수 있는 작가”로 기억될 수 있는 발판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종종 문체 대신 ‘목소리’라는 말을 선호하곤 합니다. 문체와 목소리는 정확히 똑같은 것은 아니에요. 문체는 선택적인 것이고 목소리는 거의 유전적인 것, 전적으로 독특한 것이지요. 다른 어떤 작가의 글도 이사크 디네센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그 누구의 글도 레이먼드 카버나 포크너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고쳐 씁니다. 바벨, 플로베르, 톨스토이, 버지니아 울프 같은 작가들 말입니다.
―31쪽



“소설은 쉽게 쓰일 수 없는 삶의 기록”
순간을 정물화처럼 기록하는 소설가 


설터는 “소설은 늘 삶에서 나온다”라고 믿는 작가였다. 그는 <파리리뷰> 인터뷰에서 “글을 쓰는 일은 학문이 아니다”라며 “위대한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은 전적으로 꾸며낸 게 아니라 완벽하게 알고 자세히 관찰한 것에서 비롯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문학관은 세 번째 강연의 제목(「기교의 문제가 아니에요」)이 어떤 의미인지를 되새기게 한다. 
설터의 삶은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파란만장했다.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 졸업 후 10년 넘게 군인으로 활동했던 그는 뒤늦게 소설가로 인생의 경로를 바꿨다. 문학 밖의 삶이 길었던 만큼 고충도 컸다. 그는 “내게 있는 것은 단지 욕망뿐이었고, 그것이 아주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나는 단편소설을 몇 편 썼지만 썩 좋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계속 글을 써나가야 할지 몰랐어요. 내 단편소설의 문제점은 작품의 형태가 미흡하고 핍진성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뉴요커>와 <에스콰이어>에 실린 단편들을 읽고 그걸 모방하려 노력했습니다. 모방은 참 한심한 짓이지요. 내 단편 작품들은 그들의 작품처럼 보이긴 했으나 어딘지 진짜와는 구별되는 것 같았어요.
―65쪽


하지만 설터는 “자신이 쓴 글에 실망할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때도 글을 써나갔”다.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며 ‘원액’만을 글에 남겼다. 그렇게 자신만의 언어를, 자신의 글에 대한 확신을 정립해갔다. ‘네드라와 비리’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뻔했던 『가벼운 나날』과 『올 댓 이즈』 『버닝 더 데이즈Burning the Days』 등에 얽힌 뒷얘기를 듣다보면 다시금 깨닫게 된다. 소설 쓰기와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고, 그래서 삶의 중요한 순간은 더욱 의미 있게 기억해야 한다고.  


가능한 방법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어디에서든 글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많은 시간을 글쓰기에 사용해야 하고, 생활 대신 글쓰기를 해야 합니다. 뭔가를 얻어내려면 아주 많은 것을 글쓰기에 바쳐야 해요. 그렇게 해서 얻어내는 것은 아주 소소한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건 의미 있는 거죠.
―44쪽


일기장에는 ‘이처럼comme ça’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답니다. 이 일기장들은 나중에 내가 사용할 생각이었지요. 누구에겐가 읽힐 용도로 쓴 게 아닙니다. 어떤 페이지에는 세세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면 내가 후회하게 될 내용들이 한결 더 신중하게 쓰여 있습니다.
―64~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