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우연한 세상에서 우리는 이별과 죽음이라는 필연의 상처를 껴안고 살아간다”

소설가 박형서의 첫 산문집

 

 

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여섯 권의 소설집과 두 권의 장편소설을 출간한 소설가 박형서가 첫 산문집을 펴낸다. 기발한 상상력과 돋보이는 유머감각으로 평론가들과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던 그는, 산문집에서도 그 개성을 어김없이 발휘한다. 

산문집의 제목인 『뺨에 묻은 보석』은 본문의 한 대목에서 가져온 것으로, ‘지금 당장 나와 가장 가깝고 소중한 누군가(무언가)’를 뜻한다. 박형서는 사람들이 이를 무심코 외면한 채 어디론가 떠나며 삶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중한 무언가가 사라지고 나면, 사람들은 그 빈자리를 더듬고 살피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떠난 자리엔 딱지처럼 후회가 내려앉는다. 작가에게 이런 과정은 일종의 성장통으로, 후회 없이는 삶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문학은 단정한 로봇이 아니라 떠밀리고 비틀대고 쓰러지는 인간을 다룬다. 문학은 피투성이 거지꼴로 흘러 들어온 누군가의 찢긴 영혼을 토닥토닥 위로하는 망망대해 어느 작은 섬에서 시작된다. _25~26쪽

 

『뺨에 묻은 보석』은 박형서가 읽고 쓰고 떠난, 혹은 떠나보낸 흔적들로 빼곡하다. 특히 소설가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문학과 세계에 대한 글들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이야기’다. 그는 첫 소설을 썼던 무렵의 희열을 떠올리고, 글쓰기를 가르쳐주셨던 스승들을 반추한다. 베트남 여행을 가서 마주한 쌀국수 한 그릇에서 인류의 문명발달사를 연상하고, 아주 잠깐 키웠던 어린 고양이 ‘라노’를 추억하는 장에서는 코끝이 시큰해지도록 만든다. 이렇듯 그가 모으고 풀어놓는 추억과 기억들은 독자들의 한 시절을 가만히 소환하기도 하고, 이국의 낯선 풍경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문학이란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가장 아픈 영토를 맴돌 수밖에 없다”

우연히 시작해 필연이 되어버린 소설 쓰기

 

 

『뺨에 묻은 보석』은 박형서가 생애 첫 소설을 써 내려가던 일화로 시작한다. 대학 시절, 그는 기차에서 읽은 콩트 한 편을 별로라고 욕하다가, 친구에게 “그럼 네가 써보든가”라는 일갈을 듣는다. 박형서는 그 말을 듣고 정말로 창작을 시작한다. 밤새 소설을 쓰며 ‘주술적인’ 희열이 온몸을 감싸는 것을 경험한다. 거창한 문학사적 의미에서가 아닌 지극히 소소하며 사적인 창작으로의 입문, 박형서는 이를 두고 “나는 퍽 시시한 동기로 소설에 발을 들인 셈”이라고 하지만, 많은 작가들도 사실 그러했을 것이다. 그 후에도 박형서는 “창작 입문의 주술적 감각은 아직 내 손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며 사그라지지 않는 창작에 대한 열정을 고백한다. 삶의 매 흔적이 소설 곳곳에 깃드는 작가로서의 삶은 문학과 창작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

 

「윤철의 사랑」이라는 괴작이 내 소설의 출발점, 작가 인생의 시작이었으니 말이다. 잊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여정에서 무슨 도시를 지나왔고 또 어떤 국경에 잠시 마음을 빼앗겼는지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제껏 발표한 수십여 편의 소설 각각마다 적어도 석 달 이상의 내 삶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_21쪽

 

이어 두드러지는 것은 박형서의 문학을 대하는 태도와 창작의 방법론이다. 그는 문학을 두고, “예술이란 약탈하고 포섭되고 뒤섞이는 탁류 속에서 느리게 자라나는 꽃”이라고 한다. ‘향취를 감상하는 건 우아한 작업이나, 결코 그 꽃 고유의 냄새만을 골라 취하지는 못한다’고도 덧붙인다. 작가란 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존재가 아니라, 가려져 있던 삶의 진실 혹은 관계를 담담히 묘사해내는 존재이며, 문학은 고고하기만 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소설을 쓸 때 느닷없이 찾아오는 영감, 일명 ‘그분’이 오시는 것을 경계한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려준다. 집필에 앞서 철저히 계획과 구상을 하고 그에 입각한 글쓰기 스타일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이는 창작이 신비로운 것만이 아닌, 몸을 쓰는 계획된 노동이라는 현실을 일깨우기도 한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마치 첫사랑처럼 세상물정 제대로 모르고 편견과 선입견이 폭풍처럼 휘몰아칠 때 더 흥미로워진다. _54쪽

 

 

 

 

“우리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에 둘러싸여 살아가면서도 그 비정함을 모른다”

사라져가는 순간을 포착하는 소설가의 시선

 

 

『뺨에 묻은 보석』은 사람들이 무심코 흘려보내는 생의 순간들을 붙들어 글로 써 내려가는 작가만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책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그리움’으로, 읽다 보면 글쓰기와 문학에 이어 ‘떠난다’라는 단어를 자주 환기하게 될 것이다. 태국과 라오스 등지로 여행을 떠나는 작가의 모습에서, 그리고 한때 우리 곁에 머물렀던 존재와의 이별에서 ‘떠남’을 발견하게 된다. 박형서는 어린 시절 함께 걸으며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던 외할머니의 죽음, 백 원을 주고 샀던 병아리의 죽음, 그리고 태국에서 만난 흰 아기 고양이 라노의 죽음을 통해 삶에 진한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는 존재들을 기억한다.

 

아무튼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생명과 가까이 지내는 법을, 보살피는 방식을, 그리고 마침내 이별하는 자세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건 인생에서 의외로 중요한 작업이다. 어찌해볼 틈도 주지 않은 백 원짜리 병아리의 죽음을 맞아 화단 구석에서 치르는 조촐한 장례가 아이에게 가르쳐주는 건 달랑 백 원의 가치가 아니다. 세상은, 삶은, 저 무수한 부침과 굴곡은 조만간 사라져갈 체온을 닮았다. 그간 나누었던 체온을 떠올리는 일은 그간 살아왔던 나날을 돌이켜보는 일과 같다. 달리 말해, 체온을 나눈다는 건 곧 지금 여기를 살아간다는 의미다. 상대와 나 모두에게 생의 엄중한 감촉이며 관계의 부인할 수 없는 증거다. _75쪽

 

“체온을 나눈다는 건 곧 지금 여기를 살아간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니까 박형서는, 죽음과 이별이 가져다주는 슬픔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떠남을 이야기하며 결국 ‘삶’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비정한 순간에 둘러싸여 살아가지만, 그 또한 삶의 일부라는 것. 소설가가 포착한 내밀하고도 날카로운 생의 이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