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자장 안에서 사는 사람, 시인

시의 호흡, 분위기, 언어로 시를 들여다보다


“유니크한 이미지의 집적과 언어주의자로서의 개성”(박상수 문학평론가)을 펼치며 우리 시단 전위의 한 축을 담당해온 이원 시인의 산문집 『시를 위한 사전』이 출간되었다. 시인으로 등단한 지 28년, 여섯 권의 시집과 두 권의 산문집을 내며 활발한 작품활동을 해온 이원 시인은, 신간 『시를 위한 사전』에서 100편의 시를 고르고, 그만의 섬세한 촉수로 언어를 예민하게 더듬으며 시를 읽는 방법을 제시한다.

『시를 위한 사전』은 사전에서 낱말의 뜻을 찾듯, 장마다 시인과 제목을 확인하고 이원 시인의 산문을 읽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원 시인은 시의 원문 없이 시 읽기를 시도한 대 대해 “만난 시를 내보이지 않고 시와 만난 순간을 기록하는 방식. 만난 시와 보다 섬세하게 닿기 위하여 필요한 사전 같은 형식”(「책머리에」)이라고 이야기한다. 시를 읽기 위해서는, 시인의 눈을 빌린 특별한 독법이 필요하다고 제시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사전이 단어를 수집하여 그 어원과 용례를 밝혀 써주듯, 이원 시인은 100편의 시를 고르고, 각 시의 단어와 호흡, 분위기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며 ‘이원 시인만의 사전적 시 읽기’를 시도한다. 

그가 시에 천착하는 이유는 시는 “어느 순간에도 삶의 편”이며, “고단해서 삶을 잊어버리는 순간에도 삶을 바라봐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인은 “삶도 어느 순간에도 시의 편”이라고 덧붙이는데, 이는 시와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시를 읽고 느끼는 일은 곧 삶을 일으켜 살아가는 한 방법임을 알게 한다.    


시가 무슨 힘이 있을까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시는 생각보다 힘이 세지요. 시 한 구절은 누군가를 일으켜 세울 수 있지요. 여럿이 붙잡고 갈 빛 한 줄기가 되어줄 수도 있지요. 그 언어가 생물일 때, 그러니까 의도가 비어 있고, 그 언어를 다루는 존재도 비어 있을 때, 이 자리에서 써지는 것이 시예요. 

_「책머리에」에서



프랑시스 잠, 에밀리 디킨슨, 정현종, 오은 시인까지……

다감한 마음으로 시인들의 세계를 살피다


『시를 위한 사전』의 시 목록 100편은 외국 시 26편과 한국 시 74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프랑스의 프랑시스 잠에서부터 영국의 에밀리 디킨슨, 우리나라의 정현종 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처럼 다채로운 시인과 시를 아우르며 분석하는 이원 시인의 시선은 예리하면서도 따뜻하다. 특히 시에 자연스레 배어나는, 쓸모와 효율보다 아름다움을 좇는 시인들에 천성에 대해 자주 애정 어린 마음을 드러낸다.  


시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걸 거예요. 쓸모가 있으면 쓸모는 사라져요. 쓸모에 닿지 않아 쓸모의 간절함은 계속돼요. 쓸모부터 생각하면 두 귀는 열려 있어도 닫혀 있는 거예요. 햇빛이 나타나기 좋은 곳은 빈집이에요. 쓸모없는 목록을 만들어나가요. 쓸모에 함몰되지 않을 거예요. _34쪽


이원 시인의 따뜻한 시선은 시의 호흡, 분위기, 단어 등을 부드럽게 파고든다. 고영민의 「명랑」을 읽으며 ‘명랑’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고, “명랑은 밝음이 가득한 상태지요. 따뜻함이 답답함으로 변하지 않고 청량함을 유지하는 상태지요”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시를 통해 삶을 읽고, 시를 통해 인간 본연의 순수한 감정에 가닿으려 한다. 가령,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는 강윤후의 시 「성북역」을 읽으며, 지난한 기다림 혹은 슬픔을 탓하지 않는다. 그 감정을 느끼는 ‘나’의 자세와 마음을 중시한다. “성북, 그곳에서 나 혼자 오랜 기다림을 끝내게 된다 해도, 그것은 너를 만나는 한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원 시인은 나아가 ‘나’와 ‘시’가 맺고 있는 관계의 깊이, ‘함께’의 감수성을 살핀다. 


시는 이런 것이지요. ‘너는 오지 않을 거니까 잊어야 해, 얼른 이 감정에서 벗어나야 해’가 아니라 내가 기다리는 너의 지금 모습을 대면하게 해주는 것이지요. 보이지 않는 방식의 육체를 가진 투명 인간의 투명한 형체와 나란히 서게 하고, 함께 기다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지요. _99~100쪽



한 편의 시와 같은 산문,

시 읽는 감각을 돋우기 위하여


『시를 위한 사전』은 시를 읽는 행위를 통해 난해한 타인을, 그리고 때론 타인보다 어려운 나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옮길 수 있음을 알려준다. 심보선 시인의 「느림보의 등짝」에는 이원 시인이 가늠하는 ‘나’가 등장하는데, ‘무방비의 뒷모습’이라는 단어를 가만히 읽다 보면 이원 시인이 감각하는 관계의 예민함이 선득하게 다가온다. 


저는 등에 대한 예민함이 있는 부류이지요. 등을 보이는 것을 어려워해서, 좀처럼 먼저 등을 보이지 않으려고 해요. 반면, 헤어질 때 타인의 등을 보는 습관이 있어요. 앞모습에서 본 느낌과 같은 등도 있지만 정반대의 느낌을 받을 때도 있어요. 살아오면서 ‘나는 등을 믿어’라는 혼잣말을 자주 했지요. 무방비의 뒷모습에 민낯이 들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거예요. _73쪽


이원 시인의 산문은 그 자체로 새로운 한 편의 시로 읽힌다. 시와 삶의 리듬을 가까이 하는 마음으로, 곁에 두고 읽을 시 사전으로, 『시를 위한 사전』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시의 기척을 다감하게 느끼는 마음으로 이원 시인의 산문을 읽다가 시의 출전을 따라 원문을 찾아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시를 살피고 삶 속에서 리듬을 찾는 마음, 이 모든 것은 ‘시를 읽는 감각’을 돋워주는, 이원 시인의 글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