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사물들이 있습니다”
소설가 조경란의 각별하고 내밀한 물건 이야기


1996년 등단 이후, 마음을 살피고 어르는 세심한 문장과 서사를 통해 한국문학에 풍요롭고 다채로운 빛깔을 선물했던 작가 조경란. ‘코끼리’와 ‘봉천동’이라는 단어에 고독과 치유의 상징성을 각인하며 특유의 섬세한 이야기로 평단과 독자의 지지를 얻어온 작가는 사실 특별한 산문가이기도 하다. 인생의 터닝포인트에 대한 반짝이는 이야기 『조경란의 악어이야기』를 첫 산문집으로 펴냈고, 소설가가 쓸 수 있는 최고의 논픽션이라는 평을 들은 『백화점』으로 품격 있는 산문 쓰기의 정수를 보여주기도 했다. 7년 만에 펴내는 세 번째 산문집 『소설가의 사물』을 통해서 작가는 누군가에게는 사소하고 흔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잊을 수 없이 각별한 ‘물건들’을 호명한다.
하찮아 보이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행위의 옹호인 깡통따개부터 흐르는 시간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손목시계, 최초의 불을 목격하며 어른이 되었던 성냥,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한 습관인 수첩에의 애착,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을 새로이 만든 사과, 가장 행복한 시간을 선물하는 핸드밀, 가족을 찬찬히 생각한 슬리퍼, 지구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존재에 관한 고찰인 에코백까지, 50개의 소소한 물건에 깃든 기쁨과 슬픔, 가치와 각성을 다정하게 적어내려갔다. 사물의 안과 밖을 서성이며 부지런히 그 사물의 진짜 얼굴에 가닿은 작가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저마다 세상에 하나뿐인 기억으로 저장된 사적인 사물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묵묵히 곁을” 지켜왔던 나의 물건이 곧 나의 총체라는. 


책과 신문에 ‘종이’를 붙여 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종이 책과 종이 신문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 관심을 갖는 누군가 나타날 때까지 무엇도 선행하지 않습니다. 장점도 변별성도 보여주지 않지요. 여기에 책이 있고 신문이 있고 시계가 있고 연필이 있습니다. 다른 많은 사물들도 묵묵히 곁을 지킵니다. 한시적인 것도 있지만 보통은 우리 자신과 상호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물들 말입니다.
-「책머리에」에서


한편 『소설가의 사물』은 2016년 8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일간지에 1년간 연재했던 ‘조경란의 사물 이야기’ 가운데 엄선, 전면 개고하고 전작으로 쓰인 새로운 사물까지 더해 새롭고 단단한 책으로 거듭났다. 



“생의 이정표 같은 사물들” 
소설가의 다정한 인생 기록법


이 책은 “인생을 사물로 기록하는 표를 만든다면 어떤 목록을 추가할 수 있을까”란 작가의 물음에 솔직하고 재미있고 유용하고 아름답게 답한다. 한 시절을 대변하는 물건에 얽힌 개인의 역사이자, 물건 자체의 탄생과 의미를 탐구한 유려한 기록이다. 문학, 심리학, 과학과 철학적 사유가 예술가의 일상과 삶의 풍경과 어우러지면서 산문의 진경을 엿보게 한다. 쓸모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행위가 쓸모없지 않듯 별것 아닌 것 같은 사소한 것을 이야기하는 행위를 통해 결코 사소하지 않은 소설가의 인생 지도를 펼쳐 보인다. 


무섭고 조심해야 하고 함부로 다루면 안 되는 어떤 것이 때로는 아름답고 치명적일 만큼 매혹적인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내가 두 번째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태우다_성냥」에서


열아홉 살 때 나는 그 나이가 너무 두려웠고 스물이 되는 것은 더 그랬고 꿈도 희망도 남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열아홉 살도 스무 살도 지나가야만 하며 언젠가 어른의 세계로 입문하지 않으면 안 될 거라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세 가지였다. 변변해 보이는 외투와 구두와 우산. 미성숙함과 내핍의 생활을 나는 그것으로 가리고 막고 욱여넣은 채로 간신히 20대가 되었다.
-「열아홉 살_외투」에서


불을 목격했던 어릴 적의 나와 이모의 외투를 몰래 입고 외출한 열아홉 살의 나는 어른의 세계로 진입했음을 깨닫는다. 또한 주변 모두가 눈부시게 날아갈 동안 집에 틀어박혀 책만 보았던 청춘 시절, 나는 어느 밤 연필을 손에 쥐고 처음으로 시를 써내려간다. 디자인 학원에 다니다 취업해 빈 도면 용지를 가득 채우던 시기는 머그잔 하나로 남아 있다. 누군가와 함께 와인을 마신 날에는 코르크에 그 시간들을 기록한다.(그렇게 모은 코르크가 대형 유리 꽃병 4개쯤에 가득하다.) 낯선 곳에서는 꼭 지도를 사고 점점으로 빼곡하게 표시한다. 늙어가는 부모와 자라나는 조카들을 위하여 여행지에서는 늘 티셔츠를 사온다. 이웃과 지인, 제자와 문우, 일로 연결된 사람들까지 꽤나 소통해온 흔적들인 자그마한 물건들. 작가의 인생을 축약해놓은 듯한 잊지 못할 ‘사물’들의 “사소하며 소곤거리고 싶어 하는 어떤 이야기들”을 마주하는 기쁨 또한 이 책에는 넉넉하다.



“개인의 책”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책의 연대


작가는 “제가 책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렇게 오래 책이라는 사물을 믿고 매달렸기 때문”이라며 책이란 인격체와 동일한 사물이라고 여기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자신에게 “사물과 책과 추억은” 필연적으로 얽혀 있다고.
이 책은 소설가의 남다른 사물인 ‘책에 대한 예찬’이기도 하다. 달걀에서는 셔우드 앤더슨의 단편을, 접시에서는 되돌이 산이라는 동화를, 타자기에서는 폴 오스터를, 터틀넥 스웨터에서는 헤밍웨이를, 도시락에서는 쓰시마 유코의 단편을, 밀대에서는 레이먼드 카버를 떠올린다. 책은 현실과 환상의 사물이자 행복과 위안의 레시피, 가장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이야기임을 독자에게 간곡히 말하는 듯하다. 헌책을 닦는 소독용 에탄올의 성상을 일찌감치 깨친 작가는 “사람을 끌어당기고 깨어나게도 할 수 있는, 그런 돌연한 빛”인 책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소독용 에탄올을 일찌감치부터 상비해두게 되었다. 헌책의 먼지와 손때를 닦아내는 데 그만한 게 없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일단 책을 사오면 현관 밖에서 책을 푸르르 넘겨가며 먼지를 털어낸다. 그러곤 휴지나 톡톡한 키친타월에 에탄올을 적셔 안쪽 표지까지 꼼꼼하게 닦아낸다. 그런다고 책벌레, 먼지다듬이를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의식은 무척 중요하게 느껴졌고 책을 소독약으로 닦고 있자면 새것이, 드디어 온전한 내 소유가 된다는 작은 흥분을 느낄 수도 있었다. 읽고 싶은 깨끗한 책이 손에 있고, 그것이 몇 권씩이나 쌓여 있다는 건 큰 선물 같았다. 어서 이불 속에 들어가 책을 펼쳐 들고만 싶어진다. 기꺼이 하고 싶은 그 일 때문에 그날 밤, 또 내일 밤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견뎠을까 아찔하기만 한 학창 시절을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 일상이 더 절박해질 무렵, 나는 비로소 문학에 눈뜨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본질적이고 필수적인_소독용 에탄올」에서


또한 “계속해서 읽고 생각하고 듣고 보고 쓴다”는 것, 그것으로 지금 이 순간과 시간을 명백히 살아가자고 말한다. 상처와 걱정과 불안을 안고 있는 인간이지만 괜찮다고, 계속 읽고 쓰고 노력하는 한 “나는 나답게 당신은 당신답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책만능주의자’의 권유를 허투루 들을 수 없다.  


시간은 흐르는데 더 나은 인간이 되기는커녕 예전보다 못한 내가 될까 봐 겁난다. 그래서 느리게라도 계속해서 읽고 생각하고 듣고 보고 쓴다. 일단 멈춘다면 예전보다 못한 내가 될 게 뻔하니까. 시간은 순환한다는 말은 위로일 뿐이다. 시간은 앞으로 간다. 우리는 분명히 지금보다 늙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이 시간을 명백히 살아내야 한다. 나는 나답게 당신은 당신답게.
-「예전보다 못한 내가 되고 싶지는 않아_손목시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