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희극 문학에 대한 우리 시대의 공헌”
앙드레 말로가 극찬한 로맹 가리표 블랙 유머의 정수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그는 그간 여러 작품을 통해 자신의 태생적 뿌리를 암시해왔다. 로맹 가리의 첫 수상(비평가상)작 『유럽의 교육』은 나치에 저항하는 폴란드의 레지스탕스를 그린 작품이었고,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쓴 『자기 앞의 생』과 『솔로몬 왕의 고뇌』에 등장하는 로자 부인, 솔로몬 루빈스타인은 모두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었다. 마음산책이 국내에 소개하는 로맹 가리의 열두 번째 책 『징기스 콘의 춤』의 주인공(징기스 콘)도 역시 유대인이다. 다만 그는 사람이 아닌 ‘유대인 유령’이다.
『징기스 콘의 춤』은 가히 ‘로맹 가리표 블랙 유머의 정수’라 할 만하다. 로맹 가리는 유대인 학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전직 유대인 희극배우였던 유령 ‘콘’을 화자로 앞세웠다. 이 같은 희극적 장치는 역설적이게도 암담한 역사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게 한다. 로맹 가리는 콘의 우스꽝스러운 언행을 통해 인류의 범죄를 비웃고, 역사적 비극을 미화하는 모든 예술 작품을 경계한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출간된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종종 연극으로 상연되고 있다. 작품에서 콘이 경고하고 있듯 인류의 덧없는 욕망은 계속해서 무수한 희생자를 양산하고 있다. 더욱이 ‘문화’와 ‘예술’이라는 이름 뒤로 행해지는 추악한 범죄는 오늘의 한국 사회 현실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지난해 말, ‘파블로 피카소 문화재단’은 공연 안내문에서 이 작품의 현대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징기스 콘의 춤』은 익살맞으면서도 불편한 한 편의 보드빌처럼 쓰였다. 이번 공연에서 ‘베스티올 극단’은 인간 정신의 복잡성, 정신분열 지경에 이른 현실과 지각의 장애를 무대에 올린다. 이 작품에서 로맹 가리는 언제나 희생양을 찾는 부조리하고 잔혹한 세계의 초상화를 제시한다. 1967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지금 이 시대의 현실과 잘 공명한다.”
—「옮긴이의 말」에서



로맹 가리의 잠재의식 속 파열하고 분화하는 인물들
죽은 자 징기스 콘, 문명의 야만성을 직시하다


『징기스 콘의 춤』은 콘이 자신의 기이한 존재 방식을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됐던 전직 유대인 희극배우 콘은 SS대원 샤츠에게 총살당한 후 악령이 된다. 이후 22년째 샤츠 주변을 맴돈다. 소설이 출간된 1967년은 ‘나치 독일’로의 회귀가 막 이뤄지려던 시기였다. 작품을 통해 로맹 가리는 과거를 망각한 듯 부활의 기지개를 켜는 독일에 반기를 든다.
전후 리히트의 일급 경찰서장이 된 샤츠는 관할 구역 가이스트 숲에서 발생한 희귀한 연쇄살인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는다. 리히트 마을 전체를 미궁에 빠뜨린 사건은 특이할 만한 단서도 없고 살해 동기조차 명확치 않다. 다만 마흔두 구의 희생자들은 모두 남자. 이들은 바지를 벗은 채 황홀경에 빠진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콘은 그 와중에도 특유의 유머와 재치로 샤츠를 약 올리며 그에게 끊임없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하고 샤츠가 고함을 지른다.
구트가 대경실색하여 그의 표정을 살핀다. 휩슈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려깊게 사랑하는 대장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분명 그들은 과로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여러분은 아이히만이 주머니에 항상 어린 손녀 사진을 넣고 다녔다는 사실을 아는가? 사람은 절대 자신의 행동을 전부 깨닫지는 못한다.
—28쪽


“분명 그 사람들 모두가 임종의 순간에…… 뭐랄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완전히 실현한 것 같았습니다. 자아실현을 이룬 거죠. 하나같이 목표에 도달했다는, 그것을 거머쥐었다는 느낌을 주더군요. 그들이 내민 손이 마침내 최고의 결실을…… 절대를 수확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요.”
—58쪽


소설은 제2부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인다. 콘과 샤츠의 목소리가 자꾸만 뒤섞이고, 소설의 끄트머리에 가서는 화자인 ‘나’가 콘에서 작가 자신(로맹 가리)으로 바뀌기도 한다.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플로리앙/릴리 커플은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죽음과 미의 알레고리적 존재들”이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이처럼 하나같이 “안정되고 일관된 정체성을 갖지 않은, 파열하고 분화하는 존재들”이다.
소설의 주요 무대인 가이스트 숲은 그야말로 로맹 가리의 잠재의식과 같다.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단어와 문장들이 두서없이 뒤엉키며 나열되기도 한다. 실제로 가이스트(Geist)는 독일어로 ‘정신’을 의미한다. 소설은 ‘정신의 숲’을 배경으로 “실세계의 논리성과 인과성에서 벗어나 환상적 양상”을 보인다.


한데 여기서 다시 나의 상황은 대단히 미묘하고 혼란스럽다. ‘나’라고 말하지만, 말을 하는 사람이 정말 나인지 여러분에게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의식, 잠재의식, 게다가 뭔가 흥미로운 역사적 상황 등이 결부되면 이렇게 되는 게 문제다. 그것은 나일 수도 있고 샤츠헨일 수도 있고 여러분일 수도 있다.
—172쪽


로맹 가리는 징기스 콘의 입을 빌려 ‘문명’이란 이름 뒤에 숨은 ‘야만성’을 경고한다. 그리고 역사적 비극을 대상화하는 모든 예술 작품을 비판한다. 작품을 읽는 내내 우리는 “유럽의 문화와 예술이 알고 보면 유대인 같은 희생양을 먹이 삼아 자라난 것 아니냐”는 콘의 냉소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문화에 도취하다가 우리의 중대 범죄들이 완전히 흐려져버릴까 봐 나는 두렵다. 그러면 모든 것이 아름다움으로 포장되어, 대학살이며 기근 같은 것도 그저 톨스토이의 펜이나 피카소의 붓이 만들어내는 문학적, 회화적 효과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강제수용소 시체 안치소도 어느 날 잠시 방문해서 보면 놀라운 예술적 표현 대상이 될 수 있는 만큼, 그것 역시 역사적 기념물로 분류되어 그저 영감의 원천, 이를 테면 <게르니카>를 위한 소재 같은 것이 되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전쟁과 평화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전쟁과 평화』가 되어버렸듯이 말이다.
—63쪽


문득 나는 무수한 개자식들이 예수의 죽음에서 대단히 아름다운 작품들을 끌어낸 사실을 떠올려본다. 그것으로 그들은 아주 포식을 했다. (…) 늘 나는 사람들이 아직도 아우슈비츠 얘기를 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아직 멋진 문학작품에 의해 지워져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90~191쪽



고통에서 탄생한 ‘이를 악물고 추는 춤’
인류의 잠재의식에 깃든 죄책감에 발길질하다


유머는 때로 무력한 존재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된다. 그래서일까, 콘은 익살을 떨고 난 뒤 후렴구처럼 다음과 같은 문장을 되풀이한다. ‘웃음은 인간의 속성이다.’ 홀로코스트 희생양이었던 콘의 웃음은 “이를 악문 웃음”이었다. 콘이 추는 춤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로맹 가리는 『밤은 고요하리라』에서 설명한다. “그 춤, 그 대중적인 지그 춤은 짓누르는 무게를 견디고 가벼움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지. 세상을 어깨에 짊어진 아틀라스가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건 그가 춤꾼이었기 때문이라고 내가 어딘가에 썼지. 라블레가 ‘웃음은 인간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고통에 대해 말한 거네.” 잔인한 인류와 한통속이 되길 끝끝내 거부하는 콘은 힘차게 발을 구르며 저항한다. 이는 곧 “우리 모두의 잠재의식에 깃든 죄책감을 일깨우는 발길질”이다.


나는 더욱더 힘차게 움직였다. 버티고, 매달리고, 더욱더 높이 기어올라 원상회복을 했으며, 그러곤 에녹탈 효과를 극복하기 위해, 잠들어버리지 않기 위해, 이 독일인의 의식 속에서 미친 사람처럼 추억의 호라, 우리의 전통 호라를 추기 시작했다.
—164쪽


내가 몸을 날린다. 유피-트랄랄라! 몸을 날려 서장 앞에서 야만적이고 징벌적인 아시아 머리 가죽 춤을 춘다. 나는 무대 위에서도 언제나 춤을 잘 추었지만 무게가 없어지면서부터 훨씬 더 잘 춘다. 몸을 비틀고, 폴짝 뛰었다가 다시 떨어지고, 뒤꿈치를 마주 치며 하나-둘-셋, 얍! 하나-둘-셋, 얍! 쪼그리고 앉은 자세로, 엉덩이를 뒤꿈치에 붙인 채, 두 발을 앞으로 날리고, 발로 장화를 친다. 이것은 우크라이나 기병대가 우리 마을들에서 한바탕 포그롬[유대인 박해]을 마무리한 후 추는 것을 보고 배운 러시아 카자초크와 우리의 옛 유대 호라를 뒤섞은 춤이다.
—131~132쪽 


로맹 가리는 생전에 말했다. “내 소설은 사랑 이야기가 아닌 것이 없다. 사랑의 대상이 여자든 아니면 인류든, 문명이든 자유든, 자연이든 삶이든.” 다소 난해한 탓에 프랑스 독자들로부터 ‘환각 상태에서 쓰인 작품’같다는 평을 듣는 『징기스 콘의 춤』 또한 결국엔 사랑 이야기다. 로맹 가리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통해 진정한 사랑만이 참된 인류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진정한 사랑의 결핍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코 릴리 잘못이 아니죠. 과오는 다른 데 있어요. 과오, 원죄, 그런 건 인류의 책임이 아닙니다. 죄는 다른 데 있어요. 훨씬 더 먼 과거에서 찾아야 해요…… 릴리는 무죄예요.”
—224~2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