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 허구의 가면을 벗고 독자와 마주하다
1957년부터 그가 죽은 1980년까지 발표한 글 33편 총망라, 국내 첫 산문집


로맹 가리 탄생 100주년을 맞는 올해 마음산책의 여덟 번째 로맹 가리 책이자, 국내에 소개되는 그의 첫 산문집 『인간의 문제』가 출간되었다. 1956년 12월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을 수상한 뒤부터 세상을 뜬 1980년까지 그가 다양한 매체에 발표한 33편 글을 엮은 최초의 책이다. “허구의 글이 아니라 사회, 인간, 여자, 그리고 잘 돌아가거나 아니면 대부분의 경우 잘 돌아가지 않은 세계를 대상으로 한 그의 입장 표명, 해설, 성찰, 분석과 관련된 글”(‘서문’에서)로서 로맹 가리의 왕성한 지적 성찰, 세계와 인간을 향한 희망을 결코 저버리지 않은 한 인간의 강건한 사유의 흐름을 가늠할 내밀한 지형도라 할 만하다.
당대, 역사, 그리고 일반적인 인간 문제 전반에 관해, 에세이, 특별 대담, 각종 신문이나 잡지, 여러 책에 수록한 글들이 시간순으로 배열되어 그의 도저한 작가적 여정은 물론 개인사까지도 아우르며 소설과 영화만으로 도달할 수 없었던 로맹 가리라는 대지의 새로운 발견을 선물한다. ‘로맹 가리’ 또는 ‘에밀 아자르’의 가면에 가려 보이지 않던 ‘인간’ 로맹 가리의 모습을, 그가 일궈온 문학 세계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오로지 하나의 걱정밖에 없어요. ‘포착’. 세계를 포착하고, 나의 인물을 포착하고, 독자를 포착해서 나와 함께 끌고 가서 강렬하게 살게 만드는 것. 그리고 삶과 인간에게 신성한 것을 옹호하는 것.
261쪽



“인간적, 여전히 완전하게 인간적 모습”
영원한 ‘인간’ 로맹 가리에 관한 모든 것


흔히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글을 우리는 싸잡아 잡문이라 깔본다. 말이야 맞지만 모든 맞는 말이 그러하듯 하나 마나 한 맞는 말이다. 나는 정색한 강연보다 뒤풀이 자리가 더 재미있다. 『인간의 문제』는 로맹 가리가 1957년부터 1980년까지 여기저기 남긴 글과 대담을 모아 2005년에 발간한 책이다. 달리 말하면 작가가 허구의 가면을 벗고 독자와 마주한 뒤풀이 자리인 셈이다.
「옮긴이의 말」에서

 

『인간의 문제』는 로맹 가리라는 한 인간이 허구의 가면을 벗고 독자와 마주한 첫 책이다.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가끔 숨 막히는 의무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고백하는 로맹 가리는 그럼에도 인간이 지녀야 할 존엄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내 소설 전체의 진정한 관심사는 인간의 존엄성이며, 인간의 권리입니다.
19쪽

 

우리를 오류와 진실로부터 동시에 지켜줄 어떤 인간적 최소치를 위해 언제나 충분한 여지를 보존하려는 관심을 갖고 우리가 행동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온 힘을 다해 외치는 것이 내게는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20쪽

 

절대적 진리를 단호히 거부하고, 절대적일 수 없는 인간의 조건 속에서 그럼에도 변하고자 노력하는 ‘인간적 여지’만이 인간의 희망이라는 삶과 문학적 태도는 그의 ‘생의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문학을 이렇게 요약한다.

 

슬라브 콩트의 고전적 서사, 프랑스의 ‘모럴리스트’와 볼테르 정신, 슬라브와 앵글로・색슨과 유대인의 유머—나의 아버지는 동러시아 출신이고 나의 어머니는 러시아 유대인이에요—중부 유럽의 환상문학, 그리고 디드로에서 볼테르에 이르는 프랑스의 지성주의. 그러나 그것은 영향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것은 ‘동화’예요. 나의 작품이 잡다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문화의 종합이 내 작품의 독창성, 그 통일성을 구성하는 것처럼 보여요. (…) 그간 내가 썼던 한 줄 한 줄에서 항구적이며 부정할 수 없는 가치의 추구, 일시적이 아니고 유행이거나 하루살이 취향이 아닌 것에 대한 애착을 발견했어요. 매번 소설에서 나는 마땅히 옹호하고 추구해야 할 삶의 ‘이상’, 매 페이지마다 희망과 이상주의적 인본주의의 어떤 과잉이 스스로 자기비판, 심지어 자기 패러디를 행함으로써 유머, 역설, 광대짓, 마침내 ‘견유’철학이라는 어원적, 정화적 의미에서의 어떤 냉소적 시련마저도 견디어내는 ‘가치’를 부각하려고 했어요.
257~258쪽

 

“마땅히 옹호하고 추구해야 할 삶의 ‘이상’”은 형제애로 증명된다. 그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하나의 원료로 형제애를 제시한다.

 

세상을 찢어발기는 문제에 대한 형제애적인 해결책을 우리 시대의 인간이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형제애의 종말이 아니라 우리 시대 인간들의 종말일 수도 있습니다.
33쪽

 

그러나 나의 오랜 친구여,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에는 인간을 위한 자리마저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154쪽

 

또한 로맹 가리는 자신을 둘러싼 세간의 오해에 대해서도 예의 유머로써 응대한다.

 

나는 술을 자주 마시지도 않고 포도주 한 병을 가지고 보름을 마시는 수준인데요! 사람들은 내가 차갑고, 살갑지 않고, 무심하고, 적대적인 것으로 알고 있죠. 실은 전쟁 이후에 왼쪽 안면 마비가 와서 남들처럼 미소를 지을 수 없다 보니 그게 비웃음처럼 보이게 된 거예요! 이런 오해가 희극적이라 생각해요.
269~270쪽에서



약자, 소수자, 아름다움, 순수, 정의, 여자……
로맹 가리 최후의 육성, 세계와 호흡한 대작가의 진면목


로맹 가리는 많은 소설을 썼고 외교관으로서 활동했으며 여러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2편의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다. 『인간의 문제』는 로맹 가리의 개인적이고도 세계적인 역사와 경험의 총체인 책이다. 그의 출생부터 문학적 기원,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통찰은 물론이거니와 알베르 카뮈, 올더스 헉슬리, 조지프 콘래드 등 세계 문학에 대한 담론, 로버트 케네디, 샤를 드골 등 정치적 인물들과의 일화와 예민한 국제 정세 속에서의 정치적 입장, 세계대전을 거쳐 68혁명과 자본주의의 맹폭 가운데 마주한 당대 인간의 화두들에 열렬히 반응하며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등장했던 그의 놀라운 행보와 사유들이 흥미롭다. 그의 다양한 관심사는 소설과 영화로는 미처 가늠해보지 못한 그의 육성을 되살려낸다.
인종을 초월해 약자, 소수자에 표한 애정, 생태주의에 관한 선구자적 예언, 아름다움의 추구, 불의를 거부하고 형제애, 여성성, 자유에 대해 열렬히 옹호함으로써 무한히 확장해 나가는 그의 문학과 인생을 조감하다 보면, 그의 웅혼한 작가적 힘을 다시금 긍정하게 된다. 로맹 가리라는 한 인간, 한 세계의 계보라 할 수 있을 이 책이 로맹 가리의 소설은 물론 로맹 가리 개인에 관심을 보냈던 독자뿐만 아니라 그를 처음 맞게 되는 독자에게도 세기를 넘어 로맹 가리가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 다시 로맹 가리라는 하나의 대양을 새롭게 마주하는 기쁨이 될 것이다.

 

밀물이 몰려들고 대양이 다가올 때 그 속삭임을 들어보자. 별이 사라지고, 수많은 하늘이 허공 속에 몸을 감춘 지금 하늘은 텅 비었으니! 우리는 홀로 남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희망을 아무리 멀리 내팽개쳐도 그것과 무관하게 어떤 힘과 위안의 약속이 있고 거의 그것은 확실하다. 바다가 그 희망을 항상 되찾아 우리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줄 것이다. (…) 바다는 몽상가의 것이다. 바다는 회의주의자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 어떤 과학적 증명의 무게로도 의미 없는 기계적 소요라고 환원할 수 없는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가 보는 눈앞에서 바다는 결코 죽지 않을 어떤 것에 대한 약속을 지킨다. 바다가 거기에 있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 같다.
-97~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