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감성으로 엮은 일상어사전
죽은 말, 평범한 말 시적으로 풀기

 

백과전서파임을 공공연히 자인하진 않으나 시인 권혁웅에겐 모든 범속한 것들마저 시의 자장 안에 있고, 모든 게 그의 언어로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성과 속을 가리지 않고, 시의 형식을 벗어나서라도, 일상적이고 고리타분하고 무색인 것들에서 미온을 감지해 더는 범상하지 않도록 고운 언어로 숨을 불어넣는 일. 나름의 애정으로 세상을 포옹하고 싶은 이 욕망이 ‘시인의 사전’을 쓰게 만든다. 이전 책인 『꼬리 치는 당신』(마음산책), 『미주알고주알』(난다), 『생각하는 연필』(난다)에서 ‘동물’ ‘몸’ ‘사물’이 건네는, 즉 형체를 지닌 모든 것이 건네는 매혹적인 인사를 간결하고 정확한 시어로 옮겼다면, 이제 시인은 형체가 없는 것들에 눈을 돌린다. 바로 시의 모태인 그것, 대중의 무의식이 함축된 일상의 언어들. 문학의 관점에서는 “죽은 말”이라 불리는 일상어들을 시처럼 곱씹어 읽는 일은 곧 문학의 안팎을 트는 일이다.

 

“얼핏 보면 일상어는 시의 언어와는 가장 멀리 있는 언어다. 일상어는 그 뜻과 쓰임새가 정형화되어 있어서 새로운 울림을 거의 주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문학에서는 이런 말을 ‘죽은 말’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문학이 우리 삶의 터전을 떠난다면 과연 어디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일상이야말로 삶의 현재형이자 표현형이 아닌가?”
-7쪽, 「책을 내면서」

 

『외롭지 않은 말』은 상투어, 신조어, 유행어, 은어 등 우리가 관습처럼 사용하는 일상어들을 통해 세상의 이면과 표면을 함께 읽는 책이다. 언어의 무궁무진한 확장성을 열어젖힌 [뷁], 군침과 지방 축적을 부르는 주문 [반반무마니], 연륜 없이 내뱉을 수 없는 상투어 [늙으면 죽어야지], 제안을 빙자한 취조 [우리 얘기 좀 해] 등 77개의 일상어를 골라 겉뜻과 속뜻을 밝히고, 논리와 감성과 유머가 고루 배합된 시인의 주석과 용례를 달아 사전처럼 가나다순으로 엮었다. 세간의 입에 붙은 관용어들이 어디서 나왔고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지 살피어 그 의미를 새롭게 하고, 그 배경 속에서 ‘나’ 아닌 ‘우리’가 어떤 희로애락을 공유하고 있는지 은은하되 “낙석”처럼 예측할 수 없는 재치로 이야기한다. 모두가 함께 쓰는 말을 익히노라면 더는 혼자가 아니다, 더는 외롭지 않다.

『외롭지 않은 말』은 1년간 주간지에 연재되었던 「일상어 사전」을 바탕으로 쓴 책이며, 매 글 고운 수채화를 실어 『꼬리 치는 당신』의 자매편으로 보는 재미를 더했다.

 

한 손에 배달통을 들었으므로 그는 다른 한 손으로만 오토바이를 몬다. 이게 관건이다. 클러치 없는 시티플러스는 그의 애마, 등자를 매단 초원의 전사처럼 그는 좌우로 능숙하게 오토바이를 몬다. 철가방은 방패처럼 차갑게 빛나고, 그 안에는 서비스 군만두도 들었다. 초원의 전사들이 안장에 걸어둔 말린 고기 같다. 천고마비란 본래 높고 푸른 하늘과 풍요로운 시절을 찬탄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장성 안쪽 사람들의 두려움이 배어 있는 말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이 쪘으니 오랑캐가 쳐들어오겠구나.
-115쪽, 「방금 출발했어요」

 

 

일상어는 습관적으로 우리 함께 쓰는 말
불통의 시대에 건네는 소통의 교본

 

『외롭지 않은 말』은 일상어 즉 관용어를 새롭게 읽는 책이다. 관용어란 습관적으로 쓰는 말이고, 홀로는 아무 뜻도 없는, 맥락 안에서야 제대로 이해되는 말이다. 혼자서 비밀스럽게 간직한 언어를 관용어라 일컫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관용어란 ‘사람 사이’의 말이고, 듣는 사람이 전제되어야, 교감과 공감이 있어야 제 역할을 한다. 혼자만의 말이 아니기에 일상어는 ‘외롭지 않은 말’이다. 사람들 입에 올라 마르고 닳도록 쓰여야 더욱 빛이 나는 말.

 

많은 이야기들은 구원이 반복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똑같이 따라 하는 제스처를 통해서 죽음은 생명으로 전환된다. 눈이 멀어 물에 빠진 심 봉사를 대신해서 물에 뛰어든 심청이가 아버지 눈을 뜨게 했고, 자라 등을 타고 죽으러 간 토끼가 자라 등을 타고 사지에서 빠져나왔다. (…) 전화를 할 때 “여보세요”를 반복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저 말이 되울려 나와야 내 말이 온전히 자리를 잡는다. “여보세요”는 반드시 “여보세요”로 응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한 대화적 관계에 들어간다.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구원한다. 우리는 이제 외롭지 않다.
-196쪽, 「여보세요 여보세요」

 

일상어는 세대와 계층, 집단을 구분 짓는 잣대다. 나와 너를 선 긋는 것도, 그 선을 지우는 것도 일상어를 숙지하고 활용하는 데서 시작된다. 『외롭지 않은 말』은 이러한 말들을 눈여겨본다. 평범하고 습관적으로 사용하지만 암호처럼도 보이는 표현과 은어 들을 시인의 통찰로 푼다. 가족, 연인, 가장 가까워야 할 사이에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말의 간극마저 때로 시적으로, 때로 철학적으로, 그리고 자주 달콤쌉쌀한 유머로 웃으며 이해하고, 소통의 공통분모를 찾는다.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모른다는 대답은 불쏘시개다. 그녀의 분노는 더욱 맹렬히 타오를 것이다. 그렇다고 안다고 해서도 안 된다. 더 무서운 질문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알면 말해봐. (…) 실제로 법도 저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 따라서 여자가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하고 물을 때 “알아” 혹은 “몰라”라고 대답하는 것은 올바른 대답이 아니다. 그 대답은 여자가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
-58~59쪽,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정현종 시인의 「섬」은 유명한 시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 장 그르니에는 ‘섬’이 (그 어원에서 말하듯) 개별자로서의 인간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섬은 혼자인 인간이며, 섬들은 혼자씩인 인간들일 뿐이라고. 개별자들이 각자의 고독을 극복하는 방법은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뿐이다. 그러니 이 시를 이렇게 고쳐 읽도록 하자. “사람들 사이에 썸이 있다 / 그 썸을 타고 싶다.”
-161쪽, 「썸」

 

 

희로애락 네 박자의 감정 실린 일상어
모두가 무장해제된 자연인으로 돌아가기

 

『외롭지 않은 말』은 희로애락, 즉 일상어에 실린 네 박자의 감정을 시인에게 최적화한 도구인 시어로, 함축과 생략과 비유를 모두 동원한 언어로 읽어낸다. 저자는 어떤 일상 어떤 감정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데, 그것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고무하”는 것이 바로 그 빤하디빤한 일상의 말이기 때문이다. 『외롭지 않은 말』은 특히 유머의 미덕을 존중한다. 웃는 동안에는, 비록 찰나일지라도,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무장해제된 자연인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각 일상어의 겉뜻과 속뜻이 불일치하는 지점을 비집고 들어가, 예리함과 해학을 갖춘 설명으로 기어코 웃음과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귀요미도 이런 용어다. ‘그녀가 귀엽다’는 것은 그녀가 ‘예쁘고 곱고 애교가 있어서 사랑스럽다’는 뜻이지만, 그것은 사실 그녀에게 속한 속성이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는 내가 부여한 속성이다. 따라서 ‘그녀가 귀엽다’라는 말은 ‘내가 그녀를 귀엽게 바라본다’라는 말의 준말이다. 소개팅 나가보면 금방 아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귀엽다’라는 말을 ‘예쁘지는 않지만 호감이 간다’라는 뜻으로도 쓰고 ‘예쁘지 않다’라는 뜻으로도 쓴다. 이때 ‘귀엽다’라는 말은 ‘예쁘다’의 부정(‘못생겼다’)이기도 하고, ‘예쁘다’와 ‘못생겼다’의 중간쯤(‘예쁘진 않지만 귀엽다’)에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녀가 귀요미인가? 어떤 귀요미?
-29쪽,「귀요미」

 

가장 힘든 순간 찾게 되는 것은 가장 평범한 일상이다. 저자는 표제로 올린 77개의 일상어를 시인의 말로 조심스레 닦고 털고 매만지며 평소 자각하지 않고 지내는 평범한 일상의 비범함을 돌아본다. “우리가 울고 웃고 살아가는 이 터전이 우리의 짝”이며 “혼자 있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일상과 함께 있”음을 이야기하듯이.

 

 

추천사

 

언젠가 권혁웅에게 내가 새로 출간할 산문집의 제목을 의논한 적이 있었다. 그는 “낙석주의”를 제시하며 “어디서 돌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이 제목을 사용하지 않았다. 내 글보다는 권혁웅 그 자신의 글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여러 개의 전자두뇌를 동시에 사용해서 쓴 글과 같아서, 지금 이 줄에서 읽는 평범한 낱말이 서너 줄만 건너뛰면 얼마나 절박한 돌이 되어 날아올지 미리 경계할 수 있었던 사람은 일찍이 없다.
『외롭지 않은 말』은 관용어 사전이다.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한 울타리 안에서 아웅다웅 오래 살다 보면 관용도 많아지고 관용어도 많아진다. 모든 것이 죄이고 아무것도 죄가 되지 않는 행복하고 질펀한 세상. 그 넘실거림과 그 들척지근함을 가르고 한 개, 두 개, 세 개, 열 개 전광석화가 날아온다. 근면한 독서로 쌓은 고지에서, 유쾌한 팔이 조작하는 투석기에서. 돌 맞은 사람이 쓰러지며 말한다. 나는 아니야, 옆엣사람이 맞았어.

황현산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