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골 시인 황인숙이 풀어놓은 이야기보따리


아버지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1001일 밤 동안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세헤라자데’다. 오늘날 ‘밑도 끝도 없이 싱겁고 허무한 인생’에 재미 좀 있으라고 226일씩이나 이야기를 해주는 이가 있으니, 그녀는 바로 ‘황인숙’이다. 앞 사람은 아라비아인이라서 뒤 사람은 한국인이라서, 한쪽은 목숨을 늘리려고 다른 한쪽은 더 재미나게 살아보자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긴 하다. 그렇지만 둘은, 살아 나가야 할 수많은 날을 생각하며 오늘 ‘하루’에 올 인all-in했다는 점에서, 뛰어난 입담을 숨기지 않고 세상에 드러냈다는 점에서 ‘꼭’ 같다.


『황인숙·선현경의 일일일락』에 실린 글은 226편이다. 왜 365편이 아닌가? 이러저러한 즐거움으로 1년 중 석 달 남짓한 날은 재미난 이야기 없이도 잘 보낼 수 있을 터이기에 그만큼은 비워두었다. 이 글들 가운데 여남은 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경쾌하게 읽히는 짧은 분량이며, 다루고 있는 내용 또한 큼지막하지 않고 소소하다. 인생이라는 ‘하루’에 만나는, 자신과 자신 주위의 온갖 것 - 대개는 피붙이, 친구, 사람, 개, 고양이, 책, 음악, 물건, 공간 등 - 이 황인숙 버전 ‘천일야화’의 제재가 되어 한 바닥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을 다룬 한 편 한 편에는 웃음이 툭 튀어나오는 짤막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덕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종일 바빴던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의 피곤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226일 야화’가 탄생하였다.



재미를 줌 인zoom in하는, 선현경의 만화풍 그림


그림책 작가이자 만화가인 선현경은 이처럼 ‘웃음이 툭 튀어나오는 이야기’들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생생히 잡히도록 보여준다. 무려 53컷의 그림과 50가지에 이르는 자잘한 아이콘들이, 황인숙의 글이 바라는 그 일을 척척 해내고 있다. 마치 만화책이나 그림책에서처럼 이 책에서 아날로그적인 글과 디지털적인 그림은 환상적으로 결합한다. 그중 하나를 찾아서 보면, 스승의 날 어간에 어울릴 법한 글 「선생님 생각」은 자尺로 얽힌 ‘선생님’과 ‘나’ 사이의 이야기다. 이 글의 2/3은 못미더운 교육자와 교육의 현실에 대한 비판 일색이라 좀 진지한 편인데, 바로 뒤에 이어지는 장면은 워낙 유머러스해서 파안대소를 일으키게 한다.


중학교 2학년 국사수업 중에 선생님이 “누구, 자 좀 빌려줘.” 하셨다. 선생님이 ‘누구’를 찾으려 교실을 둘러본 시간이 1분이나 됐을까? ‘왜 아무도 꿈쩍 않는 거야?’ 참다못해 자를 꺼내 들었는데, 왠지 어색함을 또 참을 수 없었던 나는 그 자를 교탁 쪽으로 던졌다. 순간 교실이 정적에 싸였다. 선생님은 황망한 표정이었을 나를 잠시 노려보셨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이해심 깊은 스승이셨다.(87쪽)


그다음 88~89쪽에서는 상상만으로도 아찔 황당한 순간이 만화풍의 그림으로 쫙 펼쳐진다.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한순간을 잡아 이미 터져 나온 웃음을 더 키우고, 글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것이다. 『황인숙·선현경의 일일일락』은 이와 같은 그림이 아주 풍성하여 곳곳에서 글을 읽는 재미와 그림 보는 재미, 글발과 그림발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재미’와 ‘기품’이라는 두 마리 토끼


일전에 저널리스트 고종석은 “황인숙은 기품 있는 여자다.”라고 썼다. 옛사람들은 “글은 그 사람이다.”라고 했다. 이 두 문장이 전제가 되지 않더라도 이 책에서 황인숙의 글은 재미있으면서, 여전히 기품이 있다.


이탈리아에서 7년 그림 공부를 하고 온 친구가 있다. 그녀를 반가이 맞은 것은 좋은 일들만이 아니었다. 전세 줬던 아파트에 들어갈 돈도 마련해야 했고, 잔뜩 쌓인 자동차세와 주차위반이니 속도위반이니 교통범칙금 청구서도 처리해야 했다.


친구는 어리둥절했다. 팔아달라고 형부에게 차를 맡긴 게 7년 전이고, 이미 차 판 돈까지 받았는데. 알아보니 차의 명의이전이 안 돼 있었다. 불과 몇 주 전에 생긴 범칙금의 청구서까지 있더란다.


천신만고 끝에 한 교회 앞에 세워진 차를 발견했다. “빨간색 스포츠카였어.” 7년 만에 만난 차를 멀찌감치 떨어져 감시했는데 한참 지나도록 아무도 오지 않더란다. 그래서 또 천신만고 끝에 차문을 열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놓인 사전의 속지에 적힌 전화번호를 실마리로 집요한 추적의 결실을 봤다.


변두리 극장 주인이었던 그 사람은 차를 애인에게 선물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 친구가 찾아갔을 때 그는 극장을 잃고 애인도 잃고 건강도 잃은 후였다.
이제는 아들이 차를 몬다고, 곧 다 해결하겠다고 하더니 감감 무소식이라 다시 찾아갔을 때 그는 세상을 떴더란다. 결국 내 친구는 차를 끌고 와 자기 돈 들여 폐차시켰다.(181쪽, 「차와 인생」)


이를 옛사람의 안목으로 보면 청나라의 장조·주석수, 조선의 허균·이덕무·조희룡 유의 짧고 맑은 글- 청언소품淸言小品에 비할 만하다. 황인숙은 그 작가들처럼 ‘밑도 끝도 없이 싱겁고 허무한 인생’을, ‘자기연민’ 없이 ‘청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짧은 글들은 「차와 인생」에서처럼 길이 때문인지 되레 울림이 크고 깊다. 마냥 조그만 듯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크고, 하나를 이야기하는 듯했는데 다시 보니 두셋이고, 한참 웃었는데 왠지 슬프고, 뿌듯했는데 도리어 허탈하기도 하면서 별별 인생의 맛을 두루 동반한다. 그것을 잘 느끼는 것이 바로 글쓴이가 생각하는 ‘하루’의 또 ‘한 가지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