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명한 심리학자 캐럴 길리건, 심리학을 소설로 풀다
‘사랑에 관한 매우 지적인 소설이자 영리한 이론서’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타임> 지가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5명’에 꼽히기도 한 캐럴 길리건의 장편소설이 출간됐다. 저자는 인간 발달과 여성의 윤리에 관한 획기적인 심리학서 『다른 목소리로』(1982년 출간)를 통해 국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았었다. 그 이력답게 소설 『치유』에서는 두 남녀의 사랑을 다루면서도 단순히 문학작품을 넘어, 인간의 심리와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 소설 속의 사랑은 우리 모두가 경험한 사랑―갈망하지만 두려워하고, 헌신적이면서도 이기적이며,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과거에 머무른―과 맞닿아 있다. 또한 소설 속 치유는 우리 모두가 그리는 ‘관계의 미래’―투명하며 솔직히 자신을 내어 보이는-와 맞닿아 있다.


이 작품은 심리치료의 면면을 섬세히 묘사하여, 사랑에 따른 상처를 두려워하고 고민하는 독자들에게자신을 돌아볼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1부에서는 주인공 키라와 안드레아스의 사랑과 파국을, 2부에서는 키라와 심리치료사 그레타와의 상담을, 3부에서는 안드레아스의 고백을 그리면서 다양한 인물의 내면과 갈등을 묘파한다. 또 마음의 전쟁을 겪던 인물들이 점차 화해해나가는 모습은 독자들의 경험과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겐 각자 상황을 파악하는 틀이 있어. 뭔가가 자꾸만 자기를 그 밖으로 밀어내려 하면 불안감을 느끼게 돼. 그 위험을 감당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없어.”―226쪽에서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는 관계의 힘
치유란…… 직면하기, 발화하기, 문제제기하기


키라와 안드레아스는 상실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우자를 잃었으며, 더 이상 사랑에 빠지기를 원치 않는다. 하지만 ‘상실의 반대가 무엇이냐’는 키라의 물음에 안드레아스는 ‘발견’이라고 답하고, 이 대화를 시작으로 그들은 사랑을 향해 자신을 열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죽은 아내와의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안드레아스가 급작스레 키라를 떠나면서, 키라는 다시 한 번 믿음을 회의하게 된다. 결국 관계의 표면 아래를 들여다보기 위한, 진심과 진실을 알고자 하는 키라의 처절한 결심은 그녀를 예민한 심리치료사 그레타에게로 이끈다.


심리치료는 과거의 충격적 기억이 반복되어 맴돌 때 그 자리를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도구이자, 무의식을 하나하나 벗겨 상담자가 자신을 이해하고 과거의 상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키라 또한 배우자의 죽음, 어머니와의 관계 등을 돌아보며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기록하고 기억한다. 때로 그 과정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기도 하지만, 갈등을 겪고 의문을 품을지언정 자기 안에 답이 있으며,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 또한 자기 안에 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레타와 키라가 맺는 관계다. 키라는 자신의 관계를 돌아볼 뿐만 아니라, 그레타에게도 이 관계에 대해 설명을 요구한다. ‘당신은 왜 이 상담을 유지하는지’ ‘당신에게 나는 어떤 의미인지’ ‘좀 더 평등한 관계에서 소통할 수는 없는지’ 등등 키라의 물음은 계속된다. 여기에는 심리치료 과정에서 환자가 치료사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기존의 수직적 구조에 대한, 캐럴 길리건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저자는 ‘상담자가 심리치료사와의 수평적인 관계에서 자신의 문제를 독립적으로 성찰하지 않는다면, 심리치료는 이전의 관계가 가져다준 것과 똑같은 종류의 상처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과 두 여성의 감정이 변주되면서, 품격 있는 내레이션과 밀도 있는 대사로 그려진다.


“당신의 이해가 내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몰라요. 다른 사람들은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자기들이 아는 걸 내게 말해주려고 했어요. 하지만 난 뭔가 다른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걸 믿는다는 게, 그걸 말로 표현해낸다는 게, 내겐 너무 힘들었어요. 당신은 내가 내 경험을 믿도록 격려해주었어요. 그건 엄청난 격려였어요. 그가 떠나버린 후 난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는 배반한 사람이고 나는 배반당한 사람이라는, 도덕적으로 유리한 입장처럼 보이는 결론을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더 쉬웠을 거예요. 그리고 또 감사드리고 싶어요. 당신 덕분에 난 사이먼과의 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어요.”―332쪽에서



흐르고 변화하는 관계를 꿈꾸다
관계의 벽에서 관계의 문으로


이 소설에서 주목할 것은, 『천만번 괜찮아』의 저자 박미라의 말처럼 ‘심리적 상처의 짐을 한 개인에게 지우지 않는다’는 메시지다. 마음의 고통이 가족, 역사, 사회 같은 인간관계 속에서 생기는 만큼 그 회복도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치유』에서 키라 또한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것, 두려워하는 것 들을 그레타, 애나 언니, 릴리 이모, 친구 데이비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안드레아스와의 관계를 통해 치유할 수 있었다. ‘관계는 치료를 위한 그릇이 아니라 그 자체로 치료다. 적어도 그래야 맞다’라는 캐럴 길리건의 문장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치유의 끝에서, 우리는 관계의 ‘벽’이 ‘문’으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