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가 발견, 편집한 백오십여 년 전 기록
“치명적일 정도로 우울한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명랑 쾌활한 육아 일기


1851년 7월 말, 호손의 아내 소피아 호손은 두 딸(큰딸 우나는 일곱 살, 막내 로즈버드는 한 살도 안 된 갓난아기였다.)을 데리고 삼 주 동안 친정집에서 지내다 왔다. 그사이 집에는 너새니얼 호손과 다섯 살 난 둘째 아이 줄리언, 집에서 기르는 토끼 ‘뒷다리’만이 남았다. 아이와 단둘이 지내는 일이 처음이던 호손은 아내가 돌아오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생각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적어내려간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일 수 있는 이 일기는 백오십여 년이 지난 뒤 현존하는 미국 최고의 작가라고 불리는 폴 오스터에 의해 세상 빛을 보게 된다. 폴 오스터는 미국 문학의 시초를 주저 없이 『주홍 글자』라고 말할 만큼 너새니얼 호손을 문학적 스승으로 삼으며, 실제로 『뉴욕 3부작』에 실린 「유령들」 등 자신의 작품에서 호손의 모티프를 차용하며 19세기의 미국 문학을 20세기, 21세기식으로 변주해왔다. 『줄리언』은 방대한 호손의 일기에 묻혀 있던 단편을 폴 오스터가 찾아내 직접 해설을 붙여 단행본으로 만든, 말하자면 폴 오스터가 편‧저자로 참여한 책이다.

 

그러면 왜 이제 와서 독립된 작품으로 출간되었는가? 쓰인 지 백오십 년이 지난, 거창하기는커녕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깃거리를 담은 산문을 왜 주목하는가? 내가 감히 작품을 대신하여 그 탁월함을 설득력 있게 대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히려 소품이기 때문에 이 작품은 더 위대하며 나아가 독자를 즐겁게 하는 위대한 문장력을 보여준다. 『줄리언』은 치명적일 정도로 우울한 작가가 쓴 명랑 쾌활한 작품이며, 어린아이와 시간을 보낸 사람이면 누구라도 호손의 표현이 정확하고 진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136~137쪽에서

 

1850년에 『주홍 글자』를 발표하고 1851년에 『일곱 박공의 집』을 발표한 다음이라 이미 미국 안에서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을 시기인데도 호손은 은둔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극도로 꺼려했다. 지금 독자들이 『주홍 글자』의 이미지를 호손에게 덧씌우듯 당시에도 (초기 작품은 여성 작가의 작품으로 오해받을 만큼) 내밀하고 예민한 작가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호손이 내보이는 어두운 상상력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아내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남편이었고 아이들을 아끼는 아버지였다. 『줄리언』에 그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감정이 풍부하지 않은 19세기의 아버지상을 상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도덕적 판단은 물론이고 귀에 거슬리는 참견은 전혀 하지 않았던 아버지 호손은 유년기의 사실적인 초상을 탁월하게 완성했다. 이 뛰어난 문장들이 그 유년 시절의 초상을 영원히 똑같은 모습으로 간직하게 할 것이다.

- 115~116쪽에서

 

『줄리언』 속에 이 모든 영혼이 담겨 있다. 호손 가족은 진정으로 진보적이었고, 부부가 자녀를 대하는 방식이 현재의 미국 일반 중산층과 대부분 일치한다. 엄격한 훈육이나 체벌, 거친 질책이 전혀 없다.

- 141쪽에서



작가를 넘어, 평범한 아버지의 언어로 새긴
다섯 살 사내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
“할 수만 있다면 줄리언이 말한 모든 것을 기록하고 싶다.”


이름난 작가의 아이라고 해도, 시대가 다르다고 해도 다섯 살 사내아이는 다섯 살 사내아이다. 그동안 갓난아기 동생 때문에 마음껏 소란을 피울 수 없었던 둘째 줄리언은 엄마와 누나, 동생이 떠나자마자 소리를 꽥꽥 지르며 좋아한다. 하지만 이내 시무룩해져 엄마를 따라가겠다며 말 타는 시늉을 한다. 한 시간에도 몇 번씩 기분이 왔다 갔다 하고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는 아이의 기력에 호손은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버거워하면서도 안타까워하고 한편으로는 대견해한다. 호손은 줄리언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꾸밈없이 일기에 털어놓는다.

 

내가 줄리언을 침대에 눕혔을 때 시계는 저녁 일곱 시를 향하고 있었다.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녀석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처음으로 아이의 세상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낀다.

- 23쪽에서

 

이제 아이는 흔들 목마를 타고 놀면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혀를 움직이며 나에게 말을 건다. 아이의 말에 이렇게 시달려본 사람이 있을까. 저를 축복하소서!

- 80쪽에서


그러면서도 줄리언이 한 말을 모두 기록할 수 없다고 아쉬워한다. ‘무지개’는 왜 ‘해’지개가 아니고 ‘물’지개인지 궁금해하는 모습, 뒹구는 통나무 하나에도 이름을 붙이며 지나치는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 어른에게는 항상 똑같은 하루하루가 아이의 시선을 통해 날마다 새롭게 변하는 것을 함께 경험하며 호손은 줄리언과 단둘이 남겨지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생동감 넘치는 시간을 보낸다.

 

꽃을 발견하면 줄리언은 그 아름다움에 홀딱 반해 가장 낯익은 꽃들에게 찬사를 보내곤 했다. 그렇게 줄리언은 성장하는 모든 것에 진심 어린 관심을 품었다. (…) 우리 꼬마는 통나무 하나를 보고 ‘절망의 거인’이라고 칭하면서, 거인은 죽었고 자신이 그곳에 판 얕은 구멍은 거인의 무덤이라고 했다. 내가 구멍이 거인의 반도 되지 않는 크기라고 이의를 제기하자, 줄리언은 ‘절망의 거인’이 죽는 순간 너무 작아져버린 거라고 귀띔해주었다.

- 84쪽에서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또 다른 자전적 일기
숨겨진 문학‧삶이 생생하게 드러나다


『줄리언』은 호손과 줄리언의 일과를 기록한 단순한 일기이지만 그 기록을 세세히 살펴 읽다보면 무심코 적힌 문학사의 놀라운 순간을 접하게 된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이야기는 단연 허먼 멜빌에 관한 이야기다.

 

말에 올라탄 기사가 길을 따라와서 나에게 스페인어로 인사를 했다. 나는 모자를 만져 가볍게 인사를 한 다음 다시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기사가 한 번 더 인사하기에 그제야 나는 자세히 훑어보았다. 허먼 멜빌이었다!

- 35쪽에서

 

“너새니얼 호손의 천재성을 추앙하며”라고 『모비딕』을 헌정한 것처럼 삼십 대 초반의 허먼 멜빌은 자신보다 열 살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이제는 중견 작가라 불릴 만한 너새니얼 호손을 스승처럼 따랐다. 과묵한 호손 앞에서 열정적으로 자신의 문학 세계를 펼치는 멜빌을 보며, 소피아 호손은 너새니얼 호손이 마치 고해성사 사제가 된 것처럼 보였다고 말한다. 특히 『줄리언』이 쓰일 시기에 멜빌은 『모비딕』을 집필 중이었고 그해 10월에 책으로 펴냈다. 줄리언이 잠든 사이 호손과 멜빌이 밤늦도록 나눈 이야기는 미국 문학사에서 지금까지 회자되는 내용이다.

 

멜빌과 나는 시간, 영원함, 이 세상과 그다음 세상, 책, 출판업자, 가능한 문제, 불가능한 문제를 두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했다. 굳이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거실이라는 신성한 구역에서 시가를 피웠다.

- 35쪽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멜빌의 뮤즈”가 되어 있었다고 폴 오스터가 말하듯이 호손은 『줄리언』을 쓰는 동안 줄리언의 아버지였을 뿐만 아니라 멜빌의 아버지 역할까지 한 셈이다. 줄리언 역시 멜빌을 친근한 아저씨로 여기며 잘 따랐다. 이들이 함께한 소풍 풍경은 마치 어린 줄리언이 미국 문학사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 꼬마는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방랑자 행세를 했다. 줄리언은 허먼 멜빌과 에버트 듀이킹크 사이에 앉았다. 앞자리에 앉아 가끔씩 뒤돌아 나를 보며 기이한 표정으로 미소를 보냈고 손으로 나를 쓰다듬어주었다. 마치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방랑자가 사상 최악의 모험을 겪으며 헤쳐나갈 때 우러나오는 공감대 같아 보였다.

- 71~72쪽에서



자식을 향한 작가 호손의 사랑,
작가 호손을 향한 폴 오스터의 사랑


부모는 어떻게 부모가 되는 걸까, 아이를 ‘본다’고 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관계에서 ‘부모’만큼 어려운 역할도 없어 보인다. 글쓰기에 열중하느라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많지 않았던 호손은 줄리언과 삼 주를 오롯이 함께 보내며 아버지로서 뿐만 아니라 어머니로서의 역할까지 깨닫게 된다.

 

엄마가 떠나고 처음으로 줄리언이 한 시간 동안 알지 못하는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줄리언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내 곁에 줄리언이 없다는 사실이 엄마들이 할 법한 걱정을 하게 했다. (…) 머지않아 줄리언이 싱글거리는 얼굴로 주먹을 꼭 쥐고서는 집으로 달려오더니 뭔가 나한테 좋은 것을 들고 왔다고 말했다. ‘뭔가 좋은 것’이란 한 시간 동안 주먹 안에서 짓이겨 걸쭉하게 죽이 되어버린 라즈베리와 블랙베리, 구스베리였다. 엄마였다면 오히려 더 좋은 요리가 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 89쪽에서

 

줄리언은 엄마가 돌아오면 얼마나 기쁠지, 어떻게 행동할지 말했다. (…) 이 불쌍한 어린 것이 나랑 함께 있는 동안 꽤나 심심하게 지낸 건 아닌지, 어쩌면 앞으로도 이 비슷한 생활을 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 93쪽에서

 

19세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떠올리면 될 법한(실제로 소로와 호손은 친분 관계가 있었으며 호손 부부의 신혼집 텃밭을 소로가 선물로 일구어주기도 했다.) 외따로 떨어진 집, 이런 이미지는 21세기 도시화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겐 상관없는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세상을 보고 경탄하는 모습, 내심 자신을 닮을까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 잠시 떨어진 엄마/아내를 애타게 기다리는 부자의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

 

한 시간 안에, 조금 더 걸릴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피비가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떨어져 지낸 지 일 년이나 흐른 것 같다. 지금 바퀴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가 아니었다.
줄리언은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왔으면 좋겠어! 나 엄마 너무 보고 싶단 말이야!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아빠, 로즈가 다 커버리고 나서 엄마 만나는 거 아니야?”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피비는 오지 않았다!

-98쪽~99쪽에서

 

폭발하는 수다의 밑바닥에는 공감을 얻으려는 욕구가 깔려 있다. 자신이 느끼는 즐거움을 다른 친구들 마음속에 심어놓으며 즐거움을 더하고 싶어 한다. 줄리언이 나처럼 고독한 인생을 살 염려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80쪽에서


옮긴이 장현동은 이 책이 두 가지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자식을 향한 호손의 사랑과 호손을 향한 폴 오스터의 사랑. 폴 오스터의 밝은 눈과 섬세한 손길이 없었다면 이 책은 우리 손에 닿지 못했을 것이다. 오스터가 직접 쓴, 호손의 일기 분량과 거의 비슷한 분량의 해설은 재미있는 일화에 그칠 수 있었을 호손의 일기에 새로운 문학적 영감을 불어넣는다. 죽은 듯 잠자는 언어를 끊임없이 깨우는 일이 작가의 몫이라면, 『줄리언』은 유년 시절의 완벽한 초상일 뿐 아니라 문학 자체의 완벽한 초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