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사물들, 내 인생의 징검다리


주변의 사소한 많은 사물들은 우리가 건너는 인생이라는 물살 위에 놓인 징검다리다. 그것에 의지해 우리는 또 다른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고 말지만 우리의 발자국이 찍힌 그것들은 여전히 남아 건너간 자의 꿈과 사랑과 눈물을, 쓸쓸하지만 정답게 추억할 것이다. 이번에 마음산책에서 출간한 『인생은 지나간다』는 사물을 통해 인생을 이야기하는 구효서의 자전 이야기이다.


자기와 항상 함께 있으면서도 별로 기억하지 않으면서 살다가 불현듯 친근한 존재로 다가오는 사물들. 때로는 유년의 아스라한 기억이 새겨져 있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담고 있기도 한 인생의 징검다리들. 이 책은 바로 그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밟으며 모아 두었던 소중한 기억들과 만나는 이야기 묶음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자리한 친근한 사물들을 주인공으로 초대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손때와 추억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작은 사물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기억만큼 나이를 먹고 우리가 떠나간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물동이, 테레비, 전화, 라디오, 도시락…. 저마다 다른 얼굴들을 하고 있는 소중한 기억의 보따리들. 그들의 표정은 우리의 옛 모습이기도 하고 우리 기억 속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들을 보며 우리는 지나간 인생의 물살을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간다.



사진작가 김홍희의 뛰어난 사진들과 함께 편집


구효서의 『인생은 지나간다』는 한마디로 인생을 머금은 책이다. 그 속에는 사물들에 얼룩진 눈물과 사랑과 추억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기에 사물들을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우리 인생의 여정이다. 저자 구효서의 꿈꾸는 글과 살아 숨쉬는 옹기 항아리와 같은 사진을 함께 담은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친근한 눈길로 바라보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들에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저자 구효서의 글쓰기 여정은 그 자체로 그의 삶의 여정이며 기억 속의 아스라한 그림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그리는 그림 속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그림 밖으로 나와서 스쳐 지나가 버린 자기 인생을 그리는 화가가 되기도 한다.


그는 1987년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마디」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94년에는『깡통따개가 없는 마을』로 제27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했고, 『낯선 여름』〔1994·중앙일보·장편소설〕, 『오남리 이야기』〔1998·열림원·장편소설〕,『도라지꽃 누님』〔1999·세계사·단편집〕등에서 다양한 소재를 서정적이고 독특한 문체로 흥미롭게 전개하고 있다.



추억하기 혹은 아주 오래된 동화 속으로의 여행


1. 내 옆자리의 사물들, 모든 게 귀하고 소중할 뿐이다
우리 곁에 널려 있는, 많은 사소한 사물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괄하는 중층적 정보들로 가득 차 있을뿐더러, 생명과 존재가 연출하는 '삶'의 충실한 반영자며 증거물이다.
사물들에서 느껴지는 어머니의 숨결은 결코 옛것이거나 흔적으로서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내 삶을 여전히 충동하고 위로하며 고양하는 실재다. 모든 게 귀하고, 소중할 뿐이다. -〈글 머리에〉중에서

2. 차례

1. 물동이
2. 양변기
3. 테레비
4. 세고비아 음반
5. 거울
6. 의자
7. 자동차
8. 주전자
9. 연필
10. 시계
11. 책
12. 젓가락
13. 전화
14. 종이
15. 라디오
16. 책상
17. 담배
18. 도시락
19. 사진
20. 주걱


3. 주요 내용 발췌
아낙들이 머리 위에 똬리를 얹고 나르던 것이 물동이였다. 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득 찬 물동이 위에는 언제나 바가지를 엎었다. 그래도 걸음을 헛딛거나 몸을 함부로 움직이면 물은 이마를 흘러 가슴파기로 쏟아져 내렸다. 못된 사내가 뒤쫓아와 젖가슴을 주물러도 속수무책이었다. 저항하다 행여 물동이라도 깨뜨려 버린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동이〉


그런데 정말 양변기에다 발을 씻은 사람이 있었을까. 비데에 입을 대고 물을 먹은 사람이 있었을까. 아닐 것만 같다. 왜냐면 양변기의 생김새나 높이 따위가 발을 씻거나 물을 먹기엔 적절치 않게 생겨 먹었기 때문이다. 척 보고 그런 상상쯤은 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실제로 그게 가능할 만큼 양변기는 만만치가 않다. 비데로 물을 먹었다면 최소한 비데를 작동하는 법은 알았다는 얘긴데, 비데를 작동할 줄 아는 사람이 거기다 입을 대고 물을 먹어? 아무래도 아닌 것만 같다. 〈양변기〉


테레비는 일본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영어 발음과 명명법에 의해 만들어진 이상한 이름이지만 우리도 늘상 테레비라고 말한다. '텔레비전 보자' 혹은 '텔레비전 봐라'라고 잘 말하지 않는다. 남의 나라 사람들의 언어습관을 가지고 터무니없다거나 이상하다고 말하는 건 실례일진 모르지만 정말 텔레비전이 어째서 테레비가 된 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테레비〉


이제는 핸드백 속에 누구나 손거울 하나쯤은 갖고 다닌다. 아예 거울이 파운데이션 케이스에 부착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보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일까. 심지어 사랑에 빠진 사람 중에는 사랑하는 상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상대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경우도 있다. 사랑하는 상대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은 거울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 거울에 비친 자신마저 자신이 아닐 때 우리가 거울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거울〉


나는 지금도 형님 집에서 밥을 먹을 때면 조금씩 망설이고 헤맨다. 나를 낳아 준 어머니는 이미 5년 전에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네 다리와, '혼돈의 그늘'을 비슷하게나마 간직했던 앉을깨마저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하나씩 없어지는 걸 겪는 것이다. 〈의자〉


그와 나는 똑같이 양은 주전자라고 말한다. 양은은 조양은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양은(洋銀), 즉 서양의 은이라는 뜻이다. 알루미늄 경합금을 그렇게 불렀었다. 바다를 건너온 신문물엔 모두 '양'자를 붙였었다. 양복, 양잿물, 양초, 양파, 양약, 양옥 등등.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으면서도 '양'자를 붙여 주는 건 양색시 정도였다. 〈주전자〉


"이노무 새끼가 이거 양잿물을 먹었잖아!" 부엌 한 귀퉁이에 내팽개쳐져 있는 나무 젓가락을 보고 어머니는 사태의 전말을 금방 눈치채셨다. 조청 단지를 찾다가 겨비누를 만들려고 사다 놓은 양잿물을 찍어 삼킨 거라는 걸. 〈젓가락〉


나는 전화가 두렵다. 거는 것도 그렇고 받는 것도 그렇다. 전화벨 소리는 불길하기만 하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검정 다이얼 전화기 시절의 종소리는 말할 것도 없었고, 소리가 많이 부드러워진 요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전화벨 소리라는 것. 아무리 다양해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알람(Alam)이다. 경보며 비상신호다. 〈전화〉


팔짝팔짝 뛰면 적당히 좋은 거고, 너무 좋으면 외려 엄숙해진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엄숙했다기보단 누나는 비장했다. 창문에다 종이의 표면을 비춰 본 누나는 늙은 도장장이처럼 두어번 그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누나가 나는 두렵도록 멋있었다. 〈종이〉

내가 비로소 책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은 결혼하여 분가한 다음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가질 수 있었던 것' 뿐이지 실제로 가진 건 아니었다. 가난해서도 방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책상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책상을 장만하지 않았다. 여전히 교자상 위에 크로바 수동 타자기를 오려놓고 쭈그려 앉아 소설을 썼다. 그러다가 디스크에 걸렸다. 〈책상〉


꿀물을 먹기 위해서라도 나는 담배를 피워야 했다. 매일 비실거린다고 매일 꿀물을 타 줄 어머니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노력이라는 건 꾸준해야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적어도 닷새나 엿새에 한 번쯤은 꿀물을 먹을 수 있을 것 아니던가. 하지만 꿀물의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담배만 늘었다. 그러니 담배맛이 꿀맛이 되어갈 수밖에. 〈담배〉


김치를 싫어했지만 도시락 반찬은 어쩔 수 없이 김치였다. 나는 번번이 도시락을 까먹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뛰어오다 보면 아이들의 책보 안에서는 빈 도시락이 요란스레 달각거렸다. 그러나 나한테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밥이 그대로 들어 있었으니까. 〈도시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