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 사슴, 순수, 기품, 귀족, 아씨… 인간 황인숙

 

하나 , 청와대로부터 제의를 받은 후에도 해당 부처 내 기득권의 반발 움직임으로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던 강금실 장관에게 절친한 친구인 황인숙 시인은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고 한다. “네 순수함이 사람들을 감염시킬 거야. 망설일 것 없이 정부에 들어가. 그리고 이걸 게임이라고 생각해봐. 네 순수함이 얼마나 퍼져나갈 수 있는지, 그 사람들한테 얼마나 스며들 수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게임.”


둘, <창작과비평사>의 한 방에서 문학평론가 김사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시인 김정환은 순간 눈을 의심하며 묻는다. “여기 무슨 사슴 키우냐?” 도심의 4층 건물에 웬 사슴? 김정환은 황당해하는 김사인을 앞에 두고 “방금 사슴 한 마리가 휙 지나갔다니까?”하고 재차 묻는다. 알고 보니 그 사슴이란 다름아닌 황인숙 시인이었던 것. 사실을 확인한 김사인은 파안대소하며 맞장구친다. “형, 황인숙 씨 처음 보나? 맞아, 사슴 한 마리. 하하 잘 봤어…”


셋, 내달 15일 회갑을 맞는 소설가 서영은 선생은 회갑기념 문집 『그 꽃의 비밀』에서 이 문집에 참여한 시인, 소설가, 화가 사진작가들에게 일일이 개인 품평을 붙였다. 참여 문인들이‘아름다운 촌철살인으로 평소 가까이 지내던 선후배 문우들의 특징을 잘 묘사했다’고 입을 모은 이 인물평에서 황인숙 시인은 ‘시인이 된 총무형 수녀’라는 평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문단내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어, 사람들을 모으고 연결시킨다.


넷, 고종석은 발문에서 황인숙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기품, 그래, 기품. 황인숙은 기품 있는 여자다. 기품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황인숙이다. 그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드는 법이 없고, 누구 앞에서도 젠체하는 법이 없다. 움츠러들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젠체하지 않는 것도 내면의 견결한 자기긍정 없이는 힘들다. 그런 견결한 자기긍정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황인숙은 귀족이고 아씨다.”



4無 4有… 시인 황인숙


‘수녀, 사슴, 순수, 기품, 귀족, 아씨’ 라는 수식만으로 황인숙 시인의 진면목을 이해하기엔 모자람이 있다. 위의 수식은 어디까지나 은유다. 위의 수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황인숙 시인을 풍진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고고한 인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다. 황인숙 시인은 시시콜콜한 일상의 먼지들 속에서 콜록대면서도 그것들을 고스란히 안은 채, 끊임없이 새로운 진경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황인숙 시인이 살고 있는 곳은 남산자락 해방촌의 옥탑방이다. 여름이면 ‘삶아지기 전에’ 피신할 곳을 찾아야 하는 곳, 바람이 불면 집 전체가 ‘덜컹덜컹 들들들’ 흔들리는 곳, 어디선가 끊임없이 기어나오는 개미들과 매일같이 한 판 전쟁을 치러야 하는 곳, 그곳이 시인의 보금자리다. 그녀가 남산 언덕배기에 둥지를 튼 지도 20년이 다되어 간다. 끊임없이 보다 쾌적한 공간을 찾아 이사를 다니는 ‘도시 유목민’들의 삶과 비교해볼 때, 시인의 정착은 우직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녀가 20년 동안 ‘전업 시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을 봐도 그러하다. 가난한 현실로 인해 신경증을 앓을 법도 한데, 어쩐지 시인은 유유하기만 하다.


황인숙 시인에게는 번듯한 집과 돈이 없을뿐더러 남편과 아이도 없다. 그러니 시인을 일컬어 ‘4無의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시와 친구가 있고, 무소유의 정신이 있고, 베풂의 미덕이 있다. 그러니 또한 ‘4有의 시인’이다. 4無로 인해 의기소침해하지 않고 4有를 통해 더욱 넓어지는 공간에서 황인숙 시인의 생활 미학은 피어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무능’일 수 있지만, 가난에 찌들지 않고 삶을 풍요롭게 영위할 수 있는 것은 ‘유능’한 태도일 것이다.


친구들은 시인을 두고 ‘주자파’ 내지 ‘주자학자’라고 부른다고 한다. 중국문화혁명기의 공산당 우파에게 경멸의 의미를 담아 들씌워졌던 주자파走資派나 송대宋代의 유학자 주희朱熹의 추종자라는 뜻이 아니라 ‘남들에게 뭔가를 주자’를 가이드라인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자신 무엇이나 탐욕스럽게 읽어치우는 남독광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에세이에서부터 만화책, 상품설명서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읽고 난 책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줘버린다. 뿐만 아니라 걸인이나 행상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옆 사람에게서 ‘갈취’를 해서라도 도움을 줘야 마음 편해한다. 그것은 곤경에 처한 개나 고양이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황인숙 시인은 가난 속에서도 베풂의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엉뚱하고 천진한 생활의 발견─『인숙만필』

 

『인숙만필 仁淑漫筆』이라는 제목은 서포 김만중이 쓴『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착안한 것이다. 김만중이 『서포만필』에서 당대의 사회와 문학을 개성적인 안목으로 통찰했다면, 『인숙만필』에서 황인숙 시인은 ‘만필’의 특징인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필치로 일상의 상투성을 유쾌하게 전복시킨다. 시인은 엉뚱하고 천진한 시선과 개성적인 문체 안에 인생의 아이러니와 페이소스를 녹여내고 있다.



시인이 시 세계에서 보여주었던 톡톡 튀는 감수성이나 경쾌하고 생기 있는 언어 감각은 48편의 산문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거기에다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시인의 생활감각과 낙천적인 세계관이 어우러져 읽는 재미가 더해진다.
황인숙 시인의 글은 종횡무진이다. 단어, 사람, 동물, 식물, 장소, 음식, 기후, 웃음과 눈물에서 촉발된 단상들을 따라 여러 차원의 시공을 이리저리 오간다. 가령, <엽기적인 그녀> 예고편을 보다가 오규원의 시,「죽고 난 뒤의 팬티」를 떠올리기도 하고, 거기서 다시 팬티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들을 서술하는 식이다.


1부. ‘사물’의 발견

산책을 즐기는 시인은 순간순간 달라지는 주변의 풍경과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상념 등 크고 작은 사물과 일상의 발견들을 수첩 속에 메모해 두었다.
시인의 수첩 속에는 책을 읽다 기록한 좋은 문구, 사고 싶은 책과 음반의 목록, 풍경 스케치, 글쓰기를 위한 메모, 어느 순간 떠오른 어린 시절의 친구 이름 등 시시콜콜한 모든 것들이 적혀 있다. 장바구니의 목록에서부터 자신만의 냉면 조리법, 친구에게서 들은 텔레비전의 프로그램 이야기, 택시기사가 이야기 해 준 별난 사람 이야기 등 슬며시 웃음이 비어져 나오게 하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2부. ‘생명’의발견

홀로 살아가는 시인 곁에는 친구들이 있다. 해마다 서로의 생일을 잊지 않고 챙겨주며 가까이서 허물없이 지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미 고인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시인의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친구, 멀고 먼 벨기에 앙베르에서 외로움과 꿋꿋이 대면하며 살아가는 친구도 있다. 비록 가까이에 있지는 않지만, 시인의 삶에 탄력과 긴장을 가져다주는 소중한 벗들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로 친구를 사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사귐’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트럼프놀이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덕분에 마흔이 넘어 ‘미자’라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동네 미용실 아가씨에게 머리를 맡기며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녀의 벗은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 곤경에 처한 고양이를 구해주기도 하고, 동네 강아지를 쓰다듬지 않고서는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러다가 개에 물리는 수난을 종종 당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시인의 따뜻한 마음을 드러내주는 일화들이다.

3부. ‘시간’의 발견

시인은 40대, 미혼의 독신녀다. ‘사랑도 없이, 결핍감도 없이’라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나이듦에 대한 강박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다. 젊음을 강하게 애착해 온 시인에게 자꾸만 뚱뚱해져 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것은 비감한 일이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것은 동네 복지회관의 헬스클럽. 시인은 러닝머신 위를 달리며 시간을 무화시키고 싶어한다.
시인의 생물학적 나이는 40대지만, 마음은 아직도 30대. 그래서 시인은 러닝머신의 버튼을 ‘30대 여’로 맞춘다. 그러나 그것은 시인이게 무리다. 시인은 다시 ‘40대 여’의 버튼을 누르고 조금 더 천천히 달린다. 그래도 시인의 촉수에서는 여전히 신선한 땀방울이 흐른다. 그녀는 나이와 상관없이 여전히 엉뚱하고, 발랄하다. 나이듦에 쓸쓸해하면서도 나이와 상관없이 씩씩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시인에게서 낙천적인 생활 감각을 읽을 수 있다.


4부. ‘장소’의 발견

누구에게나 추억의 장소가 있다. 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한여름 바캉스’로 다녀왔던 부산 해운대의 바닷가, 포천의 계곡, 문득 수장당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제주도의 바다 등… 그녀가 바다를 ‘추억’하는 것은 이제 ‘한여름 바캉스’란 단어는 인생 사전에서 지워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설레고 들뜨는 바다 여행 대신 일상의 산책에서 잔잔한 기쁨을 느끼게 됐다.
걷기를 좋아하는 시인은 남산 근처에 20분짜리부터 3시간짜리까지 산책 코스를 갖고 있을 정도다. ‘아찔함’을 안겨다주는 남산 벚꽃 길과 주변 사람을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도 모르게 <들장미>를 흥얼거리게 되는 남산야외식물원, 바다가 보고 싶을 때면 리무진 버스를 타고 훌쩍 다녀오는 을왕리 바다와 같이 일상을 벗어난 산책 코스에 동행하는 일도 즐겁지만 구멍가게에 스낵을 사러가는 일, 동네 미용실과 식당, 교회를 둘러보는 일, 심야의 대형 마트에서 쇼핑하기처럼 소소한 산책을 통해서도 시인은 재미난 얘깃거리를 끌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