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추천도서


야윈 젖가슴


1965년 <퇴원>이라는 단편소설로《사상계》를 통해 데뷔한 한 소설가가 있었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2001년 현재 우리는 그의 소설을 빼놓고는 감히 6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을 말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는 그의 단편소설들이 실려 있고, 대학 강의실에서는 그의 작품들이 끊임없이 읽혀지고 있으며, 웬만한 독자들이라면 그의 작품 한두 편 정도는 쉽게 떠올리곤 한다. 뿐만 아니라 <이어도> <예언자>는 프랑스 유수의 출판사에서 불역 출간되었고, 그밖에 오스트리아, 일본에서도 번역 출간됨으로써 현지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모은 바 있으며, 세계적인 동시대 작가 르 클레지오, 이스마엘 카다레 등으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쯤 되면 이청준이라는 작가와 그 작품세계를 겨우 몇 줄에 실어 적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옹색한 행위가 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목적지조차 암담한 밤길을 걷는 것 같은 우리 삶의 동반자’라는 작가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소설가 이청준은 단연 우리 삶의 동반자와도 같은 작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욱 깊어가는 강처럼, 혹은 마당 한곳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서 해마다 꽃과 열매를 선사하는 나무처럼, 가까운 곳에서 우리와 함께 문학을 일구며 끊임없이 삶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작가이다.


‘개인과 집단 간의 조화로운 관계는 어떻게 가능한가, 진실의 언어화를 가로막는 억압과 폭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오염된 말들이 난무하는 소문의 벽을 넘어 말의 순수성을 회복할 길은 없는가, 지배와 해방, 복수와 용서 사이에는 또 어떤 인간적 진실이 숨어 있는가’ 등등, 그는 우리의 정신을 깨우는 이러한 물음들을 적소적시에 지적인 소설언어로 치밀하게 형상화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점이 아마도 ‘이청준’이라는 소설가가 우리에게 한없이 친숙한 고유명사이면서도 항상 우리의 마음을 낯설고 새롭게 파고드는 이유일 것이다.


그는 또한 소설 밖에서는 무척이나 말을 아끼는 작가이다. 그 많은 작품목록들 중에서 산문집을 찾아 읽을라치면 두 눈 크게 뜨고 찬찬히 짚어가야 겨우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이다. 허나 소설가는 소설로서만 말한다는 그의 작가로서의 엄결한 자세는, 그렇기 때문에 이번 신작 산문집 <야윈 젖가슴>에 더 한층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흘려 버려진 것들이었으므로 내게는 더욱 소중했으리


‘삶과 문학의 이삭줍기’라는 부제가 달린 산문집 <야윈 젖가슴>은 삶의 문제를 궁구하며 30년 넘게 문학이라는 외길을 걸어온 작가의 깊은 속내가 드러난 산문집이다. 이 산문집에서 작가는 ‘문학의 눈길을 빌려 세상과 이웃의 삶을 만나고 그 비의를 아름답게’ 읽어내고 있다. 특히 모진 세월에 졸아붙은 이웃집 할머니의 ‘야윈 젖가슴’은 작가에게 삶과 문학과 사랑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이 세상이나 삶은 실상 슬픈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닌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그 세상이나 삶에서 어떤 뜻을 읽어 건져낼 때 그것은 비로소 슬프거나 아름다움의 빛을 띠게 되는 쪽일 것이다. 그리고 문학은 일면 그 세상이나 우리 삶에 숨겨진 뜻을 읽어내는 말의 마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 문학 안에서는 ‘섭섭이 할머니’의 야위고 늙은 젖가슴에서처럼 어떤 아픔이나 슬픔까지도 그 감동이란 이름의 비의적 아름다움을 낳을 수 있지 않는가’(「글머리에」중에서). 


어릴 적 이웃에 살았던 ‘섭섭이 할머니’의 야위고 늙은 젖가슴에서 이처럼 세상의 기쁨과 슬픔, 비의적 아름다움을 읽어낸 작가는 문학 안에서 할머니의 젖가슴을 끌어안음으로써 삶과 문학에 대한 웅숭깊은 성찰의 자리를 마련한다. 그리고 지나온 시간들을 되짚어가며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삶과 문학의 이삭들을 추수하는 작가의 모습은, 또하나의 이삭으로 우리 마음의 곳간을 그득하게 채워주고 있다.



빛나는 혜안으로 추수한 삶과 문학의 의미


이 산문집에는 29편의 글들이 1부와 2부에 나뉘어 담겨 있다. 1부는 문학과 문화, 사회와 권력, 그리고 언어에 관한 진지한 사색의 글들이 주를 이룬다. 자신의 작품의 모델이 되었던 인물의 후일담을 통해 그 작품에 완결성을 부여하고, 고전을 비롯해 동시대 의미 있는 작품을 다시 읽어냄으로써 사회를 돌아보고, 외국작가와의 깊이 있는 대담을 통해 한국문학의 자리를 되새기며, 우리문화의 면면들을 살피고, 의학용어 사전을 들춰가면서까지 우리말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탐구의 과정을 풀어놓고 있다. 


2부에서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이 살갑게 드러난다. 삶과 문학이 만나는 풍경에서부터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살뜰한 정, 떠돌이개에서부터 옛 선현들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교유가 빚어내는 삶의 오묘한 이치는 글과 글, 행간과 행간 사이를 단단하게 여며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