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문청에서 등단 18년까지,
작가 하성란을 길어 올린 성장의 순간들

 

“기다림의 작가” “쉽게 쓰지 않는 작가” 하성란. 올해로 등단 18년을 맞이한 그가 10여 년 동안 써온 62편의 산문집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를 내놓는다. 신문 칼럼을 모은 첫 산문집 『왈왈』(2010) 이후 햇수로 4년 만, 등단 후 1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썼던 글들, 작가의 성장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산문집이다.
열여섯 살 때부터 습작을 시작해 서른 살이던 1996년, 「풀」로 등단한 하성란은 등단 3년 만에 동인문학상을 수상하고 그 후 한국일보문학상, 이수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현대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여러 상을 받으며 문단과 독자의 사랑을 두루 받아왔지만 산문집에는 유독 인색했다. 신문 칼럼 연재나 잡지 기고 등은 끊임없이 했으나 이를 책으로 묶는 데에는 거리를 두었다. 그만큼 소설 작품 외의 책을 통해 이야기하기를 아꼈던 작가다. 그런 그가, 10여 년 동안 써온 글들 중 특별한 글들을 고르고 모았다. 그사이 작가의 큰아이는 훌쩍 자라 스무 살 대학생이 되었다.
이번 산문집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는 4부로 나뉘어 있다. 먼저 ‘사랑을 잃은 자, 쓰라’(제1부)는 작가로 살며 겪는 일들과 읽고 쓰는 가운데 드는 생각들을 묶었다. ‘옥상에는 볕이 한가득’(제2부)은 아내이면서 두 아이의 엄마, 그리고 딸인 여자로서의 일상이 펼쳐져 있다. 이어서 ‘눈에서 멀어진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제3부)는 머물렀던 혹은 스쳐 지나온 장소들에 대한 기억과 마음을, ‘비에 젖은 자는 뛰지 않는다’(제4부)는 지금 여기, 우리 사회 문화와 삶을 응시하는 시선을 담았다. 요컨대 이 책을 가로지르는 단 하나의 핵심어는, ‘하성란’이다.

 

 

“한국 문학의 단편 미학을 대표하는 작가”,
글과 글 사이에 켜켜이 밴 시간의 맛

 

이 하성란의 소설은 서사의 씨줄과 날줄을 촘촘하게 짜 올려 소설의 결을 풍부하게 만든다. 이 정교한 구조를 떠받치는 것은 군더더기 없는 문장의 힘이다. 그의 소설은 질박하고도 단단한 문장에 힘입어 독특한 색채를 띠는 것이다. 이번 산문집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는 정갈한 하성란 문체의 정수를 독자에게 선사한다.

 

그해 여름은 얼굴에 수많은 잡티를 남겼습니다. 전망이 좋지 않은 곳에 들어서면 답답해하는 건 그때 이후부터인 듯합니다. 햇반은 이제 먹지 않습니다. 맛집의 맛들을 기억하냐고 친구가 물었을 때 난 햇반 맛을 떠올렸습니다. 꼭꼭 씹으면 달큰해지던, H 씨 당신은 내게 밥맛, 입니다. 나는 수많은 저작 운동으로 당신을 잊었습니다. 그러니 H 씨 안녕, 영원히 안녕. 이제 나는 순순히 늙어가겠습니다.
-93쪽에서

 

그의 문장의 힘은 그가 꾸려가는 현실 세계에 흔들림 없이 발 딛고 서 있음에서다. ‘작가 하성란’의 뒤에는 그가 품고 있는 여러 얼굴이 있다. 두 아이의 엄마인 하성란, 두 여동생을 둔 맏언니 하성란,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인 하성란, 직장인 하성란……. 부단히 글을 쓰는 가운데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여러 얼굴을 담담하게 소화해왔다. 누구에게나 때로는 버겁고 고단할 일상을 묵묵히 밀어 올리며, 읽고 쓰고 살아가는 일. 현실에서 유리되지 않은 작가의 글쓰기는, 건강히 살아 숨 쉰다.

 

마루에는 큰아이 아침밥 차려준 밥상이 반나절째 그대로 펼쳐져 있다. 상할 반찬만 추려 냉장고에 넣었을 뿐 닦지도 못한 밥상 모서리에 밥풀 몇 알이 빳빳하게 말라붙었다. 아이가 남긴 반찬에 밥그릇만 새로 얹어 잠든 아기 깰세라 허겁지겁 한 끼를 때우고 마감이 코앞이라 글을 쓰려 책상에 앉은 지 겨우 30여 분 지났을까, 아기는 고것 자고 깨어 안아달라고 보챈다. “그냥 둬어, 울어 죽지는 않어.” 성격 느긋한 친정 엄마는 좀 울려도 된다지만 다른 소린 몰라도 모기 소리와 아기 보채는 소리는 참기가 힘들다. 큰아이도 멀쩡하다가 마감이 닥치면 아프곤 했다. 설거지를 하려 고무장갑을 막 낀 순간, 화장실에 들어가 막 변기에 앉는 순간, 샤워기 물줄기에 막 머리통을 들이대는 순간. 아기들은 귀신처럼 때를 잘 맞춘다.
-118~119쪽에서

 

시숙이 불쑥 남편에게 물었다. “닌 할 수 있나?” 남편이 자신 있게 말했다. “난 할 수 있다.” 시숙은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쯤 해서 우리는 화제를 바꾸었다. 이 문제도 어느 남자들에게는 종교의 문제처럼 타협의 여지가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소변보는 자세를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는 시숙에게 나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남자 손님들이 왔다 간 뒤 더러워진 변기 청소는 늘 제가 해왔답니다.
-146~147쪽에서


  

작가의 성장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한 작가의 인생이 전하는 또 하나의 우주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 곳곳에는 유년 시절, 문청 시절의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지난 시간 속에서 작가는 누군가의 딸로 태어나 자랐고, 엄마가 되었다. 단어와 단어, 글줄과 글줄 사이에, 작가의 인생이 흐르고 있다. “연애란 그 사람의 우주를 덤으로 얻는 것”이라는 본문 속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하성란이라는 사람의 우주를 덤으로 얻는다.

 

이맘때가 되면 어머니는 쑥쑥 들어가서 드디어 바닥을 보이는 김칫독 때문에 슬슬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150포기가 넘는 김장을 해두었지만 김치볶음을 해서 도시락 반찬으로, 찌개로 한겨울을 나고 나면 별수 없었다. 봄까지는 좀 남았고 먹여야 할 입은 많고, 부엌을 서성이던 어머니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다는 것을 안 건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사람이 무얼 먹고 컸는지, 음식이 언어처럼 사람의 얼굴을 변화시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39쪽에서

 

2부인 ‘옥상에는 볕이 한가득’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것은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엄마의 시선으로 아이들에 관해 적은 글도 있고, 작가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시부모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낱낱이 흩어져 있던 이 글들이 헤쳐 모인 순간, 어떤 가계도가 떠오른다. 어찌 보면 대가족을 한데 모아 찍은 가족사진 같다는 느낌도 받는다. 누구나 혼자 태어나 혼자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근본적 관계인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라나고 키우고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혹시나 아버님도 두려운 것이 아닐까. 남아 있는 삶에 대한 불안. 너무도 나약해진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비관스러울 것이다. 화를 내도 풀리지 않아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엄마를 찾는 것은 아닐까. 아버님이 어매를 불러 세워 말하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닐까. “어매요, 나 무섭니더. 정말 무섭니더.”
-143~144쪽에서

 

아스라이 펼쳐지던 풍경들이 사라지고 수많은 불빛들이 반짝일 무렵 슬슬 일어섰다. 1970년대 초 서울은 만원이었다. 아버지도 자신의 꿈을 좇아 무작정 상경한 이들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산 아래 점점이 박혀 반짝이는 불빛들을 내려다보았다. 멀리서 반짝이는 수많은 불빛 중 우리 집은 어디일까. 배도 고프고 피곤이 몰려와 어린 마음에도 쓸쓸해졌다. 불빛은 저렇게 많이 반짝이는데 어디에도 자신의 집 불빛이 없다는 것에 젊은 아버지는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202쪽에서

 

어떤 한 사람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이 작가의 성장담이라면 더 풍요로운 세계의 눈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자라왔으며, 저마다의 관계망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되짚어주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을 하나씩 따라 읽다 당도하게 되는 것은 결국 ‘나’일 것이다.

 

  

“무슨 소식을 기다리는 것처럼 설렜다.
앞으로도 설렐 일이 생각보다 많을지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산문집이 가장 빛나는 것은, 희망에 대한 작가의 소박하고도 긍정적인 응시다. 그것은 거창한 수사, 혹은 그럴듯한 꾸밈새가 아니다. 다른 듯 닮은 하루하루를 그저 묵묵히 꾸리는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는 그것은 마치 “무슨 소식을 기다리는 것처럼” 설레는 일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무슨 소식을 기다리는 것처럼 설렜다. 이곳에 오길 잘했다. 오지 않고 집에 갔다면 여기 이런 장관이 있다는 걸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앞으로도 설렐 일이 생각보다 많을지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30쪽에서

 

열아홉 문청이던 작가는 어느덧 40대 후반의 등단 18년 차가 되었다. 책 속에서 그는 남편과 함께 운영하는 사무실의 5년 뒤 미래를 생각하며 마음 무거워하기도 하고, 30년 장기 상환으로 산 집의 의미를 되묻는가 하면, 아직 어린 둘째 아이에 대한 애틋함을 내비치기도 한다. 살아온 날이 늘어날수록 삶의 무게는 더해가기에, “앞으로도 설렐 일이 생각보다 많을지 모른다”는 작가의 말은 깊이 있게 다가온다.

 

나는 어리석었다. 어리석어 훗날의 만남을 기약했다. 어리석어 그의 죽음 뒤에야 남아 있는 날들에 대해 헤아려보게 되었다. 그 어떤 날이 되든 우리맡엔 늘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집 말고도 그에게 또 빚을 졌다.
-74쪽에서

 

H 씨, 작년 한 해 힘들었다는 것 잘 압니다. 올 경기도 쉽게 회복되지는 않을 모양입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뒤척이는 것도 압니다. 당신 또한 장우산 하나의 무게도 무거워 질질 끌며 걸었던 날들이 많았던 것 압니다. 하지만 H 씨 조금만 더 힘내세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이 말뿐입니다. 나에게는 특별한 단 한 사람일 수도, 지하철 안 내 앞에 앉아 시름에 잠겨 있던 사람일 수도,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일 수도 있는 H 씨, 사랑합니다.
-82쪽에서

 

우리는 언제 설레는 감정을 느끼는가. 저마다 이유와 상황이 다르겠지만 작가 하성란은 이렇게 말한다. “글쓰기가 나를 바꿨다. 자벌레가 제 몸을 일으켜 제 몸 길이만큼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듯, 0.1밀리미터씩 0.1밀리미터씩 나는 바뀌었다. 나는 글쓰기의 힘을 믿는다. 이 문장만큼은 단정적이다. 그래서 설렌다.”(「책을 내면서」에서) 수십 년간 손에서 놓지 않은 글쓰기가 작가를 조금씩 바꾸었듯, 우리도 어떤 무엇을 통해 바뀌어갈 수 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다만 그것을 놓지 않는다면,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

 

 

추천사

 

하성란의 글에는 손이 하나 있다. 부드럽고 매운 손, 요리를 하면 모든 입에 간이 맞는 손, 바늘땀이 보이지 않게 옷을 짓는 손, 눈이 무엇을 보건 그것을 만들어내는 손, 아니 눈보다 먼저 보고, 코보다 먼저 냄새 맡는 손, 그 부드럽고 매운 손이 늘 거기서 일하지만, 운이 좋은 사람만 그 손을 볼 수 있다.

황현산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