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최초 퓰리처상 소설 부문 수상(1978년) 작가 제임스 앨런 맥퍼슨

 

오랫동안 흑인 문학은 인종주의와 차별 철폐만 부르짖는 문학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노예제라는 미국적 경험을 지울 수 없는 탓에 그 주제를 천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와 다른 피부색만큼 그들의 삶도 문학도 이질적이었는데, 그래서 흑인 문학은 여전히 소외된 문학이었다. 당장 문학사적으로 기억될 만한 흑인 작가를 떠올려보면 분명해진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과, 소설은 평생 『보이지 않는 인간』 한 편을 출간한 랠프 엘리슨 외에 걸출한 작가로 이름을 남긴 흑인을 손꼽기란 쉽지 않다. 여기에는 20세기 들어서까지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을 향유하는 데 필요한 교육에서 흑인이 배제된 이유도 크고, 그간 흑인 문학이 문학적 성취보다는 인종적 저항 위주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타성이 든 이유도 크다. 결국 시간은 흐르고 흑인이라는 ‘어드밴티지’는 색이 바랬다. 요컨대 흑인 문학은 한동안 피부색 덕분에 흥할 수 있었지만, 결국 피부색의 한계에 갇히고 말았다.
제임스 앨런 맥퍼슨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흑인’에 대한 편견의 족쇄를 벗고 문학적 성취를 일구어낸 작가다. 1943년 인종주의가 심했던 미국 동남부 조지아 주에서 태어나 가족 생계를 도우며 고학을 하면서도 1965년 흑인 학교인 모리스브라운대학을 졸업했고, 소설 공모전 상금으로 학비를 마련, 2년 뒤 하버드 로스쿨에 들어가 소설 작법 수업을 접했다. 그리고 후에는 예일 로스쿨과 뛰어난 작가를 배출하기로 유명한 아이오와대학교 작가 워크숍(Writer's Workshop)에서도 수학했다. 이런 학구적 노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분노만을 대물림하던 기존 흑인 작가들의 타성을 벗어낼 수 있었고, 1968년 첫 소설집 『외치는 소리』를 발표해 랠프 엘리슨으로부터 “생명력을 잃어간 흑인 문학에 대한 외침” “가장 재능 있는 미국 작가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았다. 『외치는 소리』는 1970년 미국문예아카데미 문학상을 거머쥐었으며, 여기에 수록된 「황금 해안」은 2000년 존 업다이크가 꼽은 ‘20세기 최고의 미국 단편소설’에 들었다.
제임스 앨런 맥퍼슨이 발표한 소설집은 첫 작품집 『외치는 소리』와 1978년 퓰리처상 소설 부문 수상작 『행동반경』 단 두 권으로,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행동반경』이 그의 마지막 소설집이다. 그는 지금 소설가로서 말을 아끼며 자신이 공부한 아이오와대학교 작가 워크숍의 종신 교수로 남아 후배 작가들을 양성하는 데 힘쓰고 있다.

 

 

흑인의 어드밴티지를 벗어던진 제임스 앨런 맥퍼슨의 첫 단편집
번역가 안정효의 손길로 거듭나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발표한 소설집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탁월한 관찰과 빈틈없는 스토리텔링, 사실적인 인물들이 살아 숨 쉬는 10개의 단편을 엮은 『외치는 소리』는 흑인 공민권운동기가 끝물이던 1968년 발표되었다. 흑백 갈등이 첨예한 나머지 집단의 거센 목소리만이 두드러지던 시기에, 소외당한 개인들의 이야기가 나지막이 실린 『외치는 소리』는 그래서 더 눈길을 끌었다.
제임스 앨런 맥퍼슨은 이 소설집에서 집단이 아닌 개인을 관찰한다. 세상을 알아가며 점차 인종적 죄의식을 내면화하는 흑인 아이(「어휘의 문제」), 달라진 시대의 낯선 가치들에 적응 못하는 늙은 흑인 웨이터(「닥터를 위한 독백」), 뒤늦게 동성애적 정체성을 깨닫는 청년(「새로운 터전」), 사랑의 거듭된 실패에 신념을 저버리는 흑인 여성(「외치는 소리」). 하나같이 사회라는 큰 흐름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일상과 고뇌는 타자가 보기엔 소소할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겐 생존을 입증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여느 일상도 잔뜩 긴장을 품고 있으며, 일상이 인종적 고민 이전에 인간적 고민과 포개어진다. 제임스 앨런 맥퍼슨은 이처럼 긴장된 일상을 날카롭게 포착하여, 느리지만 분명히 번져가는 균열의 순간들을 소설에 세밀하게 담아낸다..

 

그는 흑인이라는 신분이 무엇을 의미하며, 다른 사람들은 어째서 흑인이 아닌지를 깨닫게 된 과정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런 차이 때문에 세상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도 깨달았다. 같은 흑인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기다리는 주정뱅이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했고, 교회를 그만두기 몇 달 전부터 이곳을 지나다닐 때마다 그가 먼저 인사를 했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를 좋아했으며 또 기꺼이 인사를 받아주었음을 알았다. 어머니는 인사를 나눌 이웃이 없다면 남부 흑인들의 인생은 너무나 힘들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길거리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도록 항상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세상에는 그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자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그들이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8쪽, 「어휘의 문제」

 

동성애자를, 특히 여지껏 그런 줄을 모르고 같이 지내온 동성애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동성애를 하는 남자들에게 따로 감정은 없다는 사실을 밝혀두겠고, 이 나라에서 손꼽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동성애자가 좀 있는 터이지만, 하루 전만 해도 아무렇지 않다가 갑자기 그런 인간임을 알게 된 남자와 차를 타고 국토 횡단을 하고 싶어 할 사람은 없으리라. 적어도 마음속으로는 그가 그런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를 이해하게 된 나는 이제 잭에게 불쾌한 태도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우리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이사를 나가야 하는지를 어서 결정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303~304쪽,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

 

제임스 앨런 맥퍼슨의 섬세한 필치는 번역가 안정효의 손길로 옮겨졌다. 옮긴이의 말처럼 “애써 감동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마음 깊숙하게 호소하는” 이야기가 동년배 번역가의 노력으로 원어처럼 절박하고 먹먹하게 읽힌다. 『외치는 소리』는 제임스 앨런 맥퍼슨이 퓰리처상을 받은 1978년 같은 번역가의 노력으로 출간되었지만 오래전 종적을 감췄고, 저작권법에 따라 이번에 정식 출간되었다.


 

인종적 관습에 작별을 고한 탁월한 소설
타자에 앞서 자기 집단을 돌아보는 성숙한 시선

 

종래의 흑인 문학이 타 인종에 대한 분노를 담아 사회 저항을 외쳤다면, 제임스 앨런 맥퍼슨의 소설은 바뀐 시대에 걸맞게 흑인의 자기반성을 종용한다. 그간의 핍박을 핑계로 폭력이라는 반지성을 당연시하는 건 아닌지, 피부색을 부끄러워하는 건 정녕 누구인지,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과연 부정할 수 있는지와 같은 진지한 물음들을 던진다. 맥퍼슨의 이러한 자성적 태도는 두 인종 집단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나온 것이기에 더욱 뜻깊다.
이러한 태도를 견지한 맥퍼슨의 소설은 방식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나 종래의 흑인 문학 전통을 벗어난다. 거칠고 직설적인 음성보다는 재기 있게 넌지시 건네는 음성이고, 타자에게 외치기보다는 냉정함을 되찾으려고 자신에게 읊조리는 다독임에 가깝다. 제임스 앨런 맥퍼슨은 반전을 갖춘 단편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 헨리의 전통을 따르고,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관찰자로서 누추한 현실의 세밀화를 냉정히 그리면서도 온기를 남긴다는 점에서 마크 트웨인의 전통에 닿는다. 그래서 『외치는 소리』를 두고 랠프 엘리슨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작품집을 통해 맥퍼슨은 과거 재능은 있지만 그릇된 방향으로 작가의 길을 걸은 흑인 작가들, 흑인이라면 소설의 형식과 작가 정신을 등한시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흑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외설적인 하류 작가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핑계로 삼던 흑인 작가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한다. 사실 출구 없는 막다른 길, 가치의 혼돈, 공감의 부재, 소설 속 등장인물에 대한 통찰을 묘파한 맥퍼슨의 『외치는 소리』는 그 자체가 대중에 의존하게 되면서 서서히 생명력을 잃어간 흑인 문학에 대한 외침이다. 맥퍼슨은 통찰력과 공감, 유머를 동시에 지닌 작가이며, 내가 일독할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가장 재능 있는 미국 작가 중 하나다.
—랠프 엘리슨

 

 

추천사

 

애써 감동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마음 깊숙하게 호소하는 제임스 앨런 맥퍼슨의 잔혹할 만큼 섬세한 필치는 도시의 기하학적 율동에 맞춰 허수아비 춤을 추어야 하는 꺼풀 인간의 허화를 벗긴다. (…) 물론 저자인 맥퍼슨이 흑인 작가이기 때문에 이 모든 작품들의 밑에는 인종 문제가 끈끈할 만큼 짙게 깔려 있기는 하지만, 인간은 인종이기 이전에 인간이기에 우리는 보다 절박하고 뼈아픈 얘기를, 감정의 결핍이 자아내는 짙은 감정을, 사랑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사랑을 상실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정성껏 읽는다. (…) 누추한 현실의 세밀화를 차곡차곡 담은 이 작품집은 인간이 인간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기록이라고 해도 되겠다. 막말과 욕설을 웅변이라고 착각하는 우리나라의 몰상식한 여러 집단과는 달리, 맥퍼슨은 분노와 불만을 아주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한다. 그래서 그의 감동적인 서술은 흔히 아주 작은 하나의 사건을 지적이고도 우아한 필치로 집요하게 파고들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고, 아무리 밟아도 깨지지 않을 만큼 단단한 호소력을 지닌다.

안정효「옮긴이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