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 우거진 모래언덕으로 돌아간 시인의 전언

“삶은 나이아가라이거나 아무것도 아니다”


2009년 9·11테러 희생자 추모식에서 당시 부통령 조 바이든이 낭송하며 전 세계인의 마음에 각인된 시 「기러기」와 퓰리처상 수상 시인으로 알려진 메리 올리버. 국내에서는 두 권의 산문집 『완벽한 날들』(2013)과 『휘파람 부는 사람』(2015)으로 독자들의 시적 허기를 단숨에 채워줬다. 평생을 자연의 한 조각으로 살아온 시인은 올해 초, 자신의 말처럼 “야생의 잡초 우거진 모래언덕”으로 돌아갔다. 건강이 악화된 뒤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삶과 글쓰기의 거점 프로빈스타운을 떠나 플로리다로 이주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시대가 사랑한 시인의 죽음에 힐러리 클린턴, 오프라 윈프리, 록산 게이 등 분야를 막론한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도 입을 모아 애도했다.

마음산책에서 세 번째로 출간하는 산문집 『긴 호흡』은 앞서 출간된 두 권의 책보다 시기적으로 먼저 쓰인 글들이다. 흘러가는 계절 속 요동치는 자연의 변화를 빈틈없이 포착하고, 예술가적 자아를 유지하며 창작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어린 시절 자신을 문학소녀로 만든 “삶의 동반자들”에 대해 회고하며, ‘긴 호흡’으로 미국 현대시에 관한 이야기와 자신의 시론(詩論)을 펼쳐 보인다. 메리 올리버의 생애를 관통하는 자연과 삶, 문학에 관한 섬세한 관찰과 거침없는 통찰은 견고한 문장들을 통해 더욱 생생히 드러난다.

인간 또한 자연계의 일원이라는 인식은 “삶은 나이아가라이거나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풀잎 한 줄기의 지배자도 되지 않을 것이며 그 자매가 될 것이다”라는 압축적인 문장에서 가장 명료하게 나타난다. 미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아온 메리 올리버의 빈자리가 여전히 크다. 아직 그를 대신해 영혼을 채워줄 반짝이는 글들을 찾지 못한 독자에게 이 책은 무엇보다 따뜻하고 풍성한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책에는 편향과 열정이, 그리고 저자의 결함이 담긴다. 이 책은 편향되고 독단적이기도 하지만, 즐겁기도 하고, 아마 절망도 있을 것이다. 절망 없이 60년을 수월하게 나아가는 삶이 있을까? 하지만 독자들은 낙담의 실개천보다는 기쁨을 더 확실히, 더 빈번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야생의 세계에 대한 사랑, 문학에 대한 사랑, 타인과의 사랑이라는 지속적인 열정들의 영향을 받은 지금까지의 내 삶이 그러했으니까.

─8쪽 「서문」에서



자연과 벗하며 살아가는 지고(至高)한 기쁨의 노래

“우리는 아무도 귀엽지 않다”


이제니 시인은 추천의 글에서 메리 올리버를 “아주 오랫동안 자연의 충일한 관찰자로서 광대한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그 자신의 문장, 그 자신의 삶을 통해 치열하게 실천하고 실현해왔”다고 표현한다. 메리 올리버는 그야말로 자연 한가운데서 가장 원초적인 생의 감각을 누리며 거기서 기쁨을 발견했다. 특히 계절의 순환을 끊임없이 예민한 시선으로 포착한 기록들은 어느 자연 관찰기보다 뛰어나다. 「올빼미들」에서는 큰뿔부엉이를 집요하게 찾아다니며 ‘나’와 ‘큰뿔부엉이’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의 세상임을 확인하고, 「푸른 목장」에서는 낚시를 갔다가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며, 「연못들」에서는 이름 없는 연못에 이름을 붙여주며 거북과 오리와 여우를 관찰하는 데 하루를 보낸다.


이따금 나는 몸을 기울여 물을 들여다본다. 연못물은 거칠고 정직한 거울이다. 내 시선뿐 아니라 사방에서 물그림자에 합쳐 드는 세상의 후광도 비춘다. 그러니까 연못을 가로질러 날아다니며 노래를 조금 부르는 제비들은 내 어깨 위로, 머리칼 사이로 날아다니는 것이다. 진흙 바닥을 천천히 지나가는 거북은 내 광대뼈를 만지는 것이다.

_83쪽 「연못들」에서


한편 메리 올리버는 숲속에 매력적이거나 귀여운 것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귀엽거나 매력적이거나 사랑스럽다는 말의 속뜻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여운 것은 조그마하고, 무력하고, 포획할 수 있고, 길들일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다. 그 모든 게 실수다”라며 자연에 라벨을 붙이려는 인간의 오만에 경종을 울린다. 철저하게 “자연의 충일한” 일원으로 살아온 시인만이 끄집어낼 수 있는 독특하고도 심오한 사색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 주인이 된다. 자연이 사랑스럽고, 매력적이고, 조그마하고, 무력한 것들로 가득하다면 누가 권력자의 자리에 오를까? 우리다! 우리가 부모고, 통치자다. 그런 생각은 세상을 놀이터나 실험실로 보게 하며, 분명 빈약한 관점이다. 그리고 부정직하기도 하다. 겉으론 너무도 무해하고 책임감이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둘 다 아니기 때문이다.

_117쪽 「몇 가지 말들」에서



반짝거리는 사유가 빚어낸 찬란한 시의 세계

“시는 무수한 메아리를 반영한다”


메리 올리버는 이 책에서 자신의 작은 공책 속 기록들을 공개한다. “닥치는 대로 무질서하게 사용”하는 공책에는 순간적인 단상과 자연 관찰기, 인용문 등 삶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적혀 있다. 그중 “일부는 영영 완성된 산문이나 시로 도약하지 못”하지만, 그의 삶에 잔존하는 애틋한 기록들이다. 꾸준하고 꼼꼼한 기록의 습관을 통해 우리는 완전하진 않을지언정 시인의 특별한 일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기록은 그게 무엇이든 내가 그걸 쓴 이유가 아닌 느낌의 체험으로 나를 데려간다. 이건 중요하다. 그러면 나는 그 아이디어, 곧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해 돌이켜 생각하기보다는 아이디어가 나오기 이전부터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공책에서 포착하고자 하는 건 논평이나 생각이 아니라 그 순간이다. 그리고 완성된 시 자체에서 포착하고자 하는 것도 물론 이와 같은 경우가 아주 많다.

_22쪽 「펜과 종이 그리고 공기 한 모금」에서


『긴 호흡』이 더 반가운 것은 연작 시 「가자미」의 첫 두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과 메리 올리버의 시론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다. 주로 시집을 출간하던 메리 올리버의 초기 산문집에 해당하기에 그 문학적 이정표의 원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도 의의가 있다. 메리 올리버는 어릴 적 체험과 호기심, 모방이 노력으로 쌓아 올린 지성과 개성을 만나 ‘시’가 되는 순간의 환희를 이야기한다.

또 우리가 만나는 ‘첫 시’의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처음 만난 휘트먼의 시부터 에드거 앨런 포, 윌리엄 블레이크, 월터 드 라 메어, 존 키츠 등 사랑하는 시인들을 차례차례 소환한다. 나아가 시의 어법과 주제와 의도 변화, 리듬과 운율의 흥미로움 등 이론적인 부분을 살펴본 뒤, 시를 잃어가는 세상에서 ‘시’라는 풍경을 상상하는 일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메리 올리버는 죽었지만, 꼿꼿한 정신으로 살아 있는 시인의 시와 삶은 『긴 호흡』을 통해 오래도록 우리 마음 깊숙이 아로새겨질 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의 목소리는 첫 사례로 만난 시들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행하고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기존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로잡혀야 한다. 시를 사랑하고 시를 짓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시 한 편을, 그다음엔 몇 편을 사랑해야만 한다.

_125쪽 「시인의 목소리」에서


그 어떤 시도 우리 중 하나 혹은 일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 관한 것이다. 시는 우리 종種에 관한 긴 기록의 일부다. 모든 시는 내 삶에 관한 것인 동시에 당신의 삶에 관한 것이고, 미래의 무수한 삶에 관한 것이다.

_139쪽 「시인의 목소리」에서



추천사


자연의 경이를 예찬하는 그녀의 문장은 소박하지만 아주 직관적인 영성의 언어인데 그것은 메리 올리버가 아주 오랫동안 자연의 충일한 관찰자로서 광대한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그 자신의 문장, 그 자신의 삶을 통해 치열하게 실천하고 실현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어둑어둑한 박명의 순간에 한쪽 어깨에는 “막 떠오르기 시작한 해를” 얹고 또 다른 어깨에는 창백한 달을 얹은 채로 천천히 천천히 홀로 바다로 나아가는 한 사람의 영혼을 느낀다. 확신할 수 없는 삶의 조건 속에서, 시간이 흘러도 해결되지 않는 슬픔 속에서, 반복해서 찾아드는 후회와 수치와 불안 속에서도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굳건한 정신의 걸음. 메리 올리버의 문장은 도저한 정신으로 쓰인, 경탄할 만한 세상 쪽으로 나아가려는, 우주 본래의 긍정적인 기운에 가닿으려는 의지의 기록이다. 매일 아침 하나의 경전처럼 이 책을 펼쳐들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제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