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 예찬』(2008) 개정판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의 원작자이자 퓰리처상 수상작가
마이클 커닝햄의 아주 문학적인 여행 산문

 

각기 다른 시간을 견디며 살아가는 세 여자의 삶을 그린 영화 〈디 아워스〉(스티븐 달드리 감독, 니콜 키드먼 주연)의 원작, 『세월』로 퓰리처 상을 수상한 마이클 커닝햄의 여행산문이 출간되었다. 안개처럼 희미한 감정의 실체를 섬세하게 변주하는 마이클 커닝햄만의 문장을 맛볼 기회다.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단색 그림처럼 밋밋하게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 삶의 진실을 담담히 마주하게 하는 그의 전작들(『휘트먼의 천국』 『세상 끝의 사랑』 등)처럼 『그들 각자의 낙원』 또한 작가의 사유가 빛나는 작품이다. 이 여정의 배경이 되는 미국 북동부 케이프코드 끝자락에 위치한 프로빈스타운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책은 그곳을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도 시간과 공간의 결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웨스트엔드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지리적 순서에 따른 여정을 표지판 삼아 지리적 사실과 관광명소, 계절과 자연, 역사와 예술, 삶의 풍경 등을 차분히 직조하며 어느 순간 프로빈스타운 전체의 무늬를 드러내는 서술방식과, 문장 촘촘히 배어든 애정 덕분이다. 뿐만 아니라 에드워드 호퍼, 마크 로스코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은 예술가촌으로서의 면모와 동성애자들의 낙원으로서의 프로빈스타운의 면모가 커닝햄의 펜 끝에서 생생히 되살아난다. 프로빈스타운과 왜 사랑에 빠졌는지 그 해답을 알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커닝햄은 그 해답을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내놓았고, 독자들은 작가의 마음을 뒤흔든 그곳의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는 파도가 절벽을 치지 않으며, 독수리가 하늘을 맴돌지도 않는다. 소박하고 미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곳은 뉴멕시코 사막이나 핀란드 호수들에 더 가깝다. 만과 수평선과 모래언덕들은 모두 완벽한 비율을 이루고 있어 이곳의 사상을 드러낸다. 이곳은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소리 없이 외치고 있다.
-60쪽에서


 

자유롭고 소박한 예술이 만개하는 곳, 프로빈스타운
에드워드 호퍼, 마크 로스코, 유진 오닐, 노먼 메일러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보금자리

 

1980년대 초반 아이오와 대학에서 창작 워크숍 2년 과정을 마치고 프로빈스타운의 ‘예술창작센터’에서 머물게 된 작가는 친구 몇몇과 프로빈스타운으로 향한다. 당시 그는 프로빈스타운이라는 지명을 들어본 적조차 없었고, 그곳에 닿았을 때 심지어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하지만 ‘사랑이나 독감의 초기 증상을 알아채기 시작할 때처럼’ 그는 그곳을 그리워하기 시작했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뉴욕(현재 커닝햄은 맨해튼에 살고 있다)과 프로빈스타운을 오가며 걷고 글을 쓰고 친구들을 만난다.
지리적 위치(케이프코드 끝자락)와 태생(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처음 닿은 곳은 프로빈스타운 항이었지만 정착민들은 그해 봄 플리머스로 떠났다)만큼이나 아웃사이더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프로빈스타운은 엉뚱한 생각과 행동을 기꺼이 감행하는 예술가, 작가 들이 살아가는 보헤미안의 도시다. 관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껏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 그러한 자유 속에서만이 예술이 만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닌 도시인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정신적 안식처인 이곳에 둥지를 틀었고, 지금까지도 노먼 메일러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살고 있다. 저자는 프로빈스타운이 예술가촌으로 자리 잡기까지의 역사와 그곳에서 벌어진 실험과 다양한 사건들을 생중계한다. 미국 극작가로는 노벨문학상을 처음 수상한 유진 오닐의 해변가 연극 상연 장면이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널리 알려진 테네시 윌리엄스의 스캔들, 미국 상징주의 화가로 유명한 스탠리 쿠니츠의 예술창작센터 건립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곳을 샌프란시스코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한다. 뉴욕 예술계처럼 과감한 시도들이 끊이지 않지만, 예술가인 척하는 포즈를 취하지 않는 이곳의 소박함을 커닝햄은 예찬한다.

 

오늘날 프로빈스타운은 나이 든 보헤미안에 비유할 수 있다. 위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과 한때 친했고, 여전히 특이하게 옷을 입고 다니며, 여전히 가난을 무시하며 살고 있으며, 여전히 영웅적인 낙관주의로 그림이나 조각 작업을 하고 있으며, 재능을 타고났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뒤에 버려졌다는 씁쓸한 푸념을 운 나쁜 날이면 늘어놓는, 나이 든 보헤미안.
-183쪽에서

 

 

가장 섹슈얼하고 가장 자연스럽다
성적 소수자들의 낙원, 프로빈스타운

 

마이클 커닝햄은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널리 밝힌 작가로, 이 책에도 동성애자를 비롯한 소수자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곳곳에 스며 있다. 프로빈스타운은 언제부터인가 세상에서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이 찾아들었고, 특히 핏줄로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동성애자들의 낙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의 성적 소수자가 그저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커닝햄의 표현에 따르면 ‘이성애보다 동성애로 더 유명하지만, 프로빈스타운을 고향으로 여기는 이성애자들도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며, 모두가 아주 평화롭게 산다.’ 하지만 커닝햄은 인권에 대해 목청을 높이기보다 그들의 생활 방식을 그저 담담히 때론 유머러스하게 스케치한다. 해변의 남자를 보며 친구들끼리 입방아를 찧었다는 자기 고백이나, 유품을 놓고 다투기까지 한 게이 친구 빌리의 장례식 이야기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다. 슈퍼마켓 계산대에 앉은 남자 점원의 얼굴에 남은 여장 남자의 흔적이나, 다양한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밴드 ‘스페이스 푸시’의 쇼를 묘사하는 장면도 그저 흥겹고 자연스럽다.

 

내 견해로는, A 하우스 최고의 시간은 비수기다. 프로빈스타운의 다른 술집들은 대부분 문을 닫고, 파티 비슷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찾는 사람들은 모두 A 하우스에 모인다. 여자들과 남자들이 함께 있고, 동성애자들과 이성애자들이 함께 있다. 은근한 매혹과 고통을 함께 던지는 아름다움을 갖춘 사람도 여전히 나타나지만 무릇 아름다움이라면 그래야 하듯 그런 사람은 보기 드물며, 댄스플로어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그런 격렬한 욕망에서 해방되어서 평화롭게 춤출 수 있어서 즐거워 보인다.
-141쪽에서



바다 풍경의 적막한 아름다움과 평화, 커닝햄은 걷고 바라보고 쓴다

 

숨 막힐 듯 밀도 있는 묘사로 비정한 세계와 삶의 허무 등을 그려왔던 커닝햄의 시선은 이 책에서 한결 누그러졌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아스라한 노스탤지어나 욕망의 덧없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커닝햄은 화려한 여름의 축제를 만끽하다가도 춥고 황량한 겨울을 떠올리고, 예술작품에 감동하면서도 그 작품이 보여주는 삶의 무정함을 생각한다. 오래된 가게를 가리켜 “잊혀져야 했지만 잊혀지도록 허락받지 못한 시간의 땅”이라고 기록하거나, 호퍼의 그림을 보며 “무릇 위대한 아름다움을 갖춘 것은 전적으로 부드럽지만은 않으며 단순히 예쁘지만도 않다. 절대로”라고 평한 부분은 마치 한 편의 잠언과도 같다.
지리적으로 외지고 가슴 시리게 아름다우며 한편으론 별난 곳, 프로빈스타운은 마이클 커닝햄이 선사한 이 여행기로 더욱 특별해졌다. 이 작은 땅은 가장 개인적인 이미지와 동시에 우리가 가고 싶은 이상향 그곳 자체에 대한 보편적인 상징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