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성장담이 보편성을 얻기까지
“상처는 지극히 인생에 상냥하다”

 

‘그녀라면 뭐든 알 것만 같았다. 연애든, 인생이든.’ 임경선 작가의 상담 칼럼을 봐온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했을 생각이다. 그런 그녀는 정작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까? 지난해 산문 『엄마와 연애할 때』로 엄마-자신-딸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내 수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그녀가 신작 산문으로 찾아왔다. 외교관의 딸로 여러 나라에서 살았고, 그래서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니지만 어느덧 한국어로 글을 써 자신을 표현하는 저자 임경선.  
『나라는 여자』는 임경선이라는 사람을 이룬 성장담이다. 지금까지의 삶과 사랑, 일에 관한 모든 것을 담았다.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아이였지만 끊임없이 현실에 부딪치며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갔던 어린 시절, 참 많이 차였던 연애, 몸이 아파 회사를 못 다니게 되어 차선책으로 선택한 프리랜서의 삶. 콤플렉스를 마주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자도, 인생도, 자신도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살아온 한 여자의 인생을 볼 수 있다.
이 책은 작가의 개인사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으로 살아가며 무수히 상처 받고 체념하고, 결국엔 스스로 단단해진 삶. 저자는 과한 자기연민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꿈꾸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말한다. 자신의 상처가 개인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보편적이고 우리 모두는 각자의 개별적인 상처를 떠안고 살아간다고. 그리고 그것은 “나라는 여자를 더 정직하고 선명하게” 만들었다고.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어떤 예민한 감정이 건드려짐으로써 내 안에 원래부터 있던 단단한 무언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들이 그 사람을 무엇보다도 그 사람답게 만들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운이 좋다면 상처와 결핍을 가진 타인을 이해하고 대가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원시적인 힘을 줄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면 상처는 지극히 인생에 상냥하다.
-「에필로그」에서

 

 

경계인으로 살아오며 단단해진 삶
“생애의 절반가량, ‘어디 어디서 온 아이’라고 불렸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여섯 살, 세계관이 형성될 무렵 일본 요코하마로 떠났다. 그곳에서 삼 년을 살고 한국의 한 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일본에서도 노골적으로 차별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내 나라에 와서 우리말을 못한다며 소위 ‘왕따’를 당한다. 이것이 아마도 그녀 인생의 첫 상처였을 것이다. 다시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떠나 영국인학교와 미국인학교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예전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한다. 영어 발음을 굴리게 된 덕분인지 “한 시절의 왕따가 또 다른 시절의 스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현실에 마냥 안도하며 즐기지는 못했다. 호기심이 이질감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으므로.
그러고도 브라질 상파울루, 일본 오사카, 미국 뉴욕 등지로 열한 번의 전학을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는 그저 부모님을 따라 옮겨 다녔지만, 커서는 스스로 선택한 경계인의 삶이었다. “왜 나는 항상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에 스스로를 가져다놓으려고 하는 건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157쪽) 이렇게 남들과는 다른 어린 시절을 보내며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는, 어쨌거나 삶은 계속된다는 행복한 체념의 태도를 보여준다.
  

 

혼자인 게 익숙한 것은, 늘 전학생 신세였기 때문이다. 나는 칠판 앞에 혼자 서서 삼 분 안에 눈앞에 앉아 있는 저 많은 아이들을 향해 날 부디 내치지 말아달라며 소속감을 구할 때 속수무책으로 혼자구나, 싶었다.
- 125쪽에서

 

이 깊어 보이는 숲길도 결국 한때의 통과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조금 더 속도를 높이고 힘차게 잰걸음으로 도서관으로 향하면 되었다. 그리고 어두워지기 전에만 다시 이 길로 돌아오면 되었다. 그러니까 조금 더 내 발로 걸어가기로 했다.
- 159쪽에서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한다는 말을 듣는 것도 결국엔 전학생 정서가 삶의 전반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전학 가서 첫인사를 할 때, 어느 무리에도 끼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로 지낼 때 막막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절망에 빠지기도 했지만 결코 자기연민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녀의 인생엔 늘 아릿한 슬픔이 깔려 있었지만 삶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태도만은 변함이 없었다.
이렇듯 『나라는 여자』는 저자 임경선이 자신의 삶에 거리를 두고 관조하면서 써 내려간 책이다. 연민을 강요하지도, 자신의 삶을 이해해달라 요구하지도 않는 담담하게 독백처럼 들려주는 이야기에 어느새 우리는 자신의 삶을 대입해보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수도, 내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수도 없었다. 제일 억울한 건, 하필 내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한테 무리했던 것.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이상한 심리라니, 생각해보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그것이 바보짓임을 아는 걸 보니 이젠 마음속으로 안심할 수 있는 장소를 운 좋게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어디 어디서 온 아이’는 외롭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크는 데에 확실히 성공한 것 같다.
- 142~143쪽에서

 

 

연애하는 여자, 치열한 꿈 좇기
“알고 보면 사랑이란 혼자서 하는 것이다”

 

작가 임경선을 말할 때 ‘사랑’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늘 연애하면서 살았던 여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늘 남자에게 차이던 여자였다고. 한때 사랑에 관한 지침서를 쓰기도 했지만 사랑에 있어선 결코 ‘학습’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것은 그저 타고난 성향일 뿐.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인정사정없이 푹 빠졌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자나 깨나 그 사람 생각으로 온몸이 ‘절임’ 상태가 되고 오른쪽 눈썹 위 이마쯤에 그 사람의 얼굴이 온종일 대롱대롱 매달려 다녔다. 그렇게 노상 붙이고 다니면서도 그 사람을 끊임없이 그리워하느라 속살이 매 순간 아리거나 심장이 당장에라도 터질 지경이었다.
- 91쪽에서

 

그녀가 무엇을 성취할 때 가장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 것 역시 사랑이었다. “무엇 하나 잔소리하지 않는 부모 손에 자라 대신 ‘사랑’이 공부나 일의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 것.”(93쪽) 다양한 타입의 남자를 만났고, 사랑했고, 헤어졌다. 그러는 동안 많이 아팠고, 충만했고, 체념했고, 무엇보다 많은 것을 깨쳤다.
섬세하고 예민한 남자를 만나 마음고생도 했고, 아내를 잃은 남자와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아이를 낳고서야 깨달았다. 자기만의 세계에 사는 ‘오덕’ 같은 남자와 황홀한 사랑을 했지만 결국 자신의 결핍을 깨닫게 해주었고, 정신적인 쌍생아 같은 이와의 만남은 씁쓸한 자신의 진짜 모습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유부남과 사랑에 빠질 뻔했던 경험과 수많은 상담을 통해 알게 된 사례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가 누구에게 비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만남과 헤어짐이 가르쳐준 것들을 알 수 있었고, “학습 속도가 느려도 깨우친 것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하기에” 이렇게 연애에 관한 고해성사 격 글을 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랑만큼이나 열정적으로 덤볐던 것은 바로 글쓰기였다. 처음부터 글 쓰는 삶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 ‘회사형 인간’이라고 칭할 만큼 회의도 회식도 좋아했던 그녀지만, 네 번째 갑상선암 수술과 공황장애 발병은 정상적인 회사 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차선으로 선택한 글쓰기. 언제나 치열하게 살아왔던 방식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연재 칼럼 자리를 꿰차기 위해 많은 신문사와 잡지사에 무작정 연락했고, 첫 책을 내기 위해 출판사에 자신을 세일즈하기도 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소설에 도전해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저자는 나른하게 ‘꿈 좇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심리적 거품을 다 걷어내고 꿈을 현실로 끌어내려 시작”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녀에겐 꿈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몰입하는 사랑의 감정”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내 일로 삼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정직한 마음 아닐까. 위로 코드의 자가 해석 성공 말고 본연의 의미의 성공 말이다. ‘나만 좋으면 돼’ 정도로 자기만족에 그치는 게 아닌, 그 일을 잘해내고 타인으로부터 객관적인 인정도 받고 합당한 금전적 보상을 쟁취하는, 기분 째지는 그것 말이다.
- 253쪽에서

 

현실을 직시해야 꿈을 품을 수 있고, 비관을 바탕에 두면서 낙관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힐링’도 ‘독설’도 다행히, 의미를 상실하겠지.
- 257쪽에서 

 

 

나다운 것을 찾기 위해 온몸으로 부딪친다
“평생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수줍은 자신감으로”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저자의 상처에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어떤 면에선 나보다 더한 일을 겪었다는 생각에 위안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는 건 누구에게나 힘들구나, 하고 공감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녀는 ‘나다운 것’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부딪치며 걸어왔다. 결국 그녀의 행복이라는 것은 좀 더 나다워지고 싶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고, 그렇게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기꺼이 무방비 상태로, 마음이 굳지 않은 채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은 작가 임경선. ‘다 잘될 거야’라는 말로 듣기 좋은 위안을 건네는 그녀가 아니기에 우리는 오히려 또 한 걸음 내딛을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녀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여성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며 언제까지나 젊은 작가로 남게 될 그녀의 앞날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