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라고 배우인 걸까”
배우 배종옥이 전작으로 써내려간 인생 분투기


우리가 아는 그 배종옥. <도시인> <여자의 방>을 통해 도도한 도시 여성 캐릭터를 만들었고 ‘노희경의 페르소나’라는 이름의 시작을 알렸던 드라마 <거짓말>을 통해 마니아 드라마의 출현을 예고했으며 이후 노희경 작가의 <바보 같은 사랑> <꽃보다 아름다워> <굿바이 솔로> <그들이 사는 세상> <그 겨울, 바람이 분다>를 통해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영화 <질투는 나의 힘>과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 <천하일색 박정금>까지 30년여 동안 꾸준히 대중과 함께 호흡해온 배우 배종옥의 행보다. 나이 든 여배우의 종착지와 같은 역할에 멈추지 않고 여전히 특유의 분위기로 이미지 소비 없이 우리 곁에 자리해왔다. 배우 윤여정의 말은 그러한 그녀에 대한 이미지를 포괄한다. “종옥이가 자기 느낌을 내는 배우잖아.”
드라마로 영화로 연극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넓혀가면서도 공부하기를 멈추지 않아 중앙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고려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 학위를 받으며 이론과 실전의 연기 경력을 겸비한 연기자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10년 넘게 대학 강단에 섰으며 후배들에게 흠모받던 그녀의 여정이 마냥 승승장구, 탄탄대로였을까?
『배우는 삶 배우의 삶』은 배종옥의 인생 분투기이자 배우 고민기라고 할 수 있다. 신인 시절 연기를 못해 항의 편지를 받고, 매일 연기를 그만두고 무엇을 할까 궁리하던 그녀가 자신만의 길을 찾고 주변에 휘둘리지 않으며 하나의 세계를 갖게 되기까지의 여정이자, 끝까지 ‘배우는 배우이기를’ 원하는 한 강단 있는 배우의 진솔한 고백이다.


연기를 못해서 항의 편지를 받던 나, 매일 연기를 그만두고 뭘 하고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나, 늘 누군가에게 선택받아야 하고 평가받아야 하는 나, 나라는 한 배우의 고민에 관한 책이라 해도 좋다. 그 고민을 통해 배워왔던 것들의 기록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고 이 책이 내 고민의 최종 매듭은 아니다. 다만 오랫동안 연기를 해온 나의, 배우라는 직업인으로서 또 사적인 한 인간으로서의 말쯤으로 여겨주길 바란다.
-「책을 내면서」에서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갖는다는 것, 끊임없는 고민의 여정


이 책은 고군분투하는 인생 가운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한 배우의 고민의 여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확립해간, 노희경 작가의 말대로 “노력하는” 한 사람의 발걸음이다. 배우 배종옥은 신인 시절 이후 30대 중반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한다. ‘기대감 없는 배우’ 배종옥이라는 틀에서 <거짓말>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배우로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현실에 안주하고 누군가 나에게 으레 바라는 것들을 이행하면서 안정적인 이미지의 세계로 갈 수 있었지만 다시 도전을 한다. 그 도전을 통해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혼란의 시기인 때 터닝포인트를 꿈꾸는 이들에게 배종옥의 행보는 생각할 거리를 준다.


작업하는 동안 그 시간 전부를 작품에 쏟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날 설득하지 못하는 작품은 죽어도 할 수 없다. 욕을 먹더라도 하고 싶지 않은 건 안 한다. 돈벌이가 안 되어도 하고 싶은 건 한다. 하고 싶어서 선택해야 어떤 순간이 와도 후회가 없다. 미련도 없다. 그게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었다.
-67쪽에서


1부 「그렇게 배우가 된다」에서는 연기자를 꿈꿨던 계기와 데뷔기, 멜로드라마 공포증을 극복한 드라마 <거짓말>에 얽힌 이야기, 모든 걸 버리고 떠났던 뉴욕 유학 시절, 한 작품 한 작품 “새로운 것, 다른 것, 내가 하지 않았던 것, 했어도 좀 다른 것”(53쪽)을 추구했던 필모그래피, 노희경 작가와의 운명 같은 인연,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등 진진한 에피소드를 통해 배우로서의 분투기를 기록했다.
2부 「지금의 삶을 다시 한 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에서는 인간 배종옥의 진솔한 고백이 펼쳐진다. 오랫동안 인생을 함께했던 엄마의 죽음,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진 방황을 극복하게 도와준 ‘길벗’ 모임, 다른 사람에게 쓰임 있는 사람이기를 꿈꾸는 봉사 활동 이야기, 끊임없는 마음공부를 통해 콤플렉스를 극복했던 시절, 여배우로 산다는 것의 고단함, 아름다움의 의미, 박사 학위 공부를 통해 얻은 것 등 배종옥의 삶에 대한 태도와 자세 등이 솔직하다. 
3부 「배우의 배우 이야기」는 평소 배우가 흠모하고 존경하던 국내외 배우의 작품과 행보를 통해 자신의 지난 걸음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엿본다. 메릴 스트립에게서는 나이에 국한하지 않은 대체 불가의 존재감을, 제프리 러시에게서는 배우의 정확한 언어를,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서는 자신의 인생에 충실한 평정심을, 케이트 블란쳇에게서는 배우의 개성을, 이순재에게서는 ‘연기하되 연기하지 않는 연기’라는 화두를, 나문희에게서는 타고난 배우와 노력하는 배우 사이의 완전함을 가늠한다. 윤여정에게서는 배우로서의 의연한 태도를 생각한다.
4부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30년여 실전의 연기 경력을 자랑하는 배우로서의 자존심과 일터에 대한 애정 어린 탐구가 함께한다. 진짜 배우가 되는 길, 자신만의 연기론, 현장과 사람에 대한 애틋함, 한류에 대한 현장의 당사자로서의 소신 등을 털어놓는다.  



“끝까지 배우이길”
삶에 대한 애정 어린 탐구가 함께하는 진짜 드라마


이론과 실전의 여배우가 현장에서 또 끊임없는 공부를 통해 자신을 담금질하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흔히 알고 있는 화려한 배우의 이미지에서 신인의 우여곡절, 30대의 터닝포인트, 슬럼프, 흥행에 대한 좌절, 비난과 욕설, 콤플렉스 등 그 이면의 불안과 초조함 등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배종옥이라는 배우는 담담하게도 이 일의 희비를 응시한다.
 
조용히, 다만 고요히 일만 하고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게 여배우의 운명이다. 일단 조용할 수가 없다. 일이라는 것이 TV나 영화에 언제나 노출되는 시끌벅적한 것이니 말이다. 작품이 성공하면 말이 많다. 실패하면 말이 없다. 우리는 성공하는 길로 가고 싶다. 그 길을 선택했는데 홀로 좋은 말만 듣겠다는 건 뭔지 어폐가 있는 것 같다. 칭찬만 듣고 싶다면 이 일을 하지 않는 게 맞다. 성격에 맞지 않아 중도에 그만두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데브라 윙거도 젊어서 배우를 그만뒀다.
그럼에도 이 일을 하는 것은 배우가 좋기 때문이다. 좋아서 하는 일에 장사는 없다.
-110~111쪽에서


배우와 연기에 대한 무수한 고민을 통해 배우 배종옥이 깨닫게 된 것은 배우를 꿈꾸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각자의 인생을 설계하는 우리 모두에게 큰 울림을 준다. 자신이 일하는 곳인 현장과 함께 일하는 사람을 아껴야 한다는 것, 모르는 것은 배워야 한다는 것, 배우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뭔지 죽을 때까지 물으면서 가야 한다는 것, 꿈에 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어떻게 하면 진짜 배우가 될 수 있을까 다시 스스로 대답해본다. 꿈을 소중히 가꿔야 한다. 꿈에 지지 않았으면 한다. 비록 그 시간이 지난하더라도 산 한가운데 물을 주는 심정으로 간절히.
-184~185쪽에서


이 책은 배우 배종옥을 이루고 변화시킨 고민에 대한 기록이다. 지금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것인지 내 인생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투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애정 어린 위로인 셈이다.


그게 그러니까, 끝없이 고민하다 보면, 공부하고 배우다 보면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뭔지 어렴풋하게 보인다는 말이다.
이 책을 그 고민에 관한 연대기라 하면 어떨까.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여기까지가 최선의 나인 것 같다. 그렇게 또 나의 배우로서의 삶은 이어질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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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참 괜찮은 인간이다. 내 인생에 당신 같은 친구를 동료를 만난 것은 행운을 넘어선 축복이고, 감동이다. 서로 잘나서 인내심이 많아서 서로의 옆에 있어준 게 아니라, 많이 모자라서 늘 너무도 예리한 칼날 같아서 얼음처럼 냉정하고 야멸차고 이기적이어서 하지만 그게 들켜도 쪽팔리지 않아서, 우린 서로 곁에 악착같이 남았다.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우린 서로에게 일말의 기대심이 없으니, 실망의 두려움도 없지 않은가. 멋지고 통쾌한 관계다.
살면서, 정말로 교만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는데, 끝없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배우는 겸손은 친구의 덕목이지, 내 덕목은 아니었다. 이제라도 교만한 수준을 알아채서 다행이다 스스로를 위안하며, 나는 지금 멋지게 백기를 펄럭인다. 내가 작가로서 전에 쓴 글에 안주하지 않아야겠다 생각한 건 분명 친구 덕이다. 친구에게만은 쪽팔리고 싶지 않았다. 대결이 아니라, 친구의 친구로서 동료로서 경건한 예의였다.
약속건대, 친구, 친구 곁에 차갑지만 그대를 존경하고 흠모하는 내가 있다. 이젠 길지 않아서 더욱 막막해져버린 인생이란 길 위에 바로 곁에 있어줄 순 없겠지만 친구 뒤에 혹은 앞에 친구의 다급한 목소릴 들을 수 있는 그 거리에 내가 있다.
노희경 (드라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