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 커리어도 모국어도 버리고
낯선 땅에서 새로이 시작하다


한때 인정받는 커리어우먼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평범한 직장인, 영어가 능숙하지 못해 딸에게 핀잔 듣는 신세, 집세와 각종 생활비에 벌벌 떠는 소심 싱글맘…… 그래도 삶은 날마다 새롭고 흥미진진하다!


저자 김미경은 일간지 기자와 편집장을 지낸 전직 언론인이다. 그가 2005년 돌연 사표를 내고 뉴욕으로 떠났다. 『브루클린 오후 2시』는 그가 낯선 땅 뉴욕에서 정착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다. 안정적인 직업과 한 몸 같은 모국어, 익숙한 땅을 버리고, 솔직하고 유쾌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인생 2막을 열어 보인다.


1960년생인 저자가 속한 ‘베이비붐 세대’는 서서히 은퇴를 준비하는 나이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니며 이데올로기를 무겁게 짊어지고 살았던 세대, 시대와 국가를 고민하느라 개인의 욕망과 자유는 스스로 옭아맸던 세대다. 저자는 그러한 시대를 통과하며 내면화한 자아상을 이제야 재확인했다고 고백한다. 자신에게 솔직하게 사는 법, 자유로워지는 법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깨달음은 이민과 이혼이라는 과정을 겪으며, 10대 청소년인 딸을 통해, 그리고 새로운 문화를 접하면서 찾아왔다.


누구나 한 번쯤 ‘다 때려치우고 떠나기’를 꿈꾸지만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과감히 떠났고, 이렇게 말한다. “인생이 뭐 항상 맨땅에서 시작하는 거 아닌가? (…) 세상엔 영원한 실패자도 영원한 성공자도 없다.” 늘 일상에 휘둘리면서도 끊임없이 자기다운 길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사회의 잣대보다 자신의 잣대로 인생을 꾸리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따뜻한 조언자가 되어줄 것이다.



떠나서 살다 보니 비로소 내가 보이더라
인생의 오후 2시


저자는 지금이 인생의 오후 2시쯤에 온 것 같다고 말한다. 책 제목 『브루클린 오후 2시』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하루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간, 태양이 가장 뜨겁게 느껴지는 시간. 겉으로는 초라해 보일지라도 속으로는 가장 풍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브루클린이라는 배경은 그리 중요치 않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말보다 실천으로 살아가는 중년 여자의 이야기란 점이 중요하다.


뉴욕에 살다 보면 자주 듣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저 사람이 저래 보여도 여기 오기 전엔 잘나가는 뭐뭐였다더라” 하는 소리라고 한다. 저자도 한국에서 이른바 ‘잘나가는’ 기자였으니 그중 한 사람인 셈이다. 그는 브루클린에 자리를 잡으면서 뉴욕 한국문화원에 취직했고, 그곳에서 리셉셔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다. 건물 입구 좁은 공간에서 손님들을 안내하는 일이, 처음에는 창피했다고 털어놓는다. 자신의 백그라운드이자 존엄성의 근거로 작용했던 것들이 완전히 사라진 뉴욕 땅에 서면서, 그는 비로소 자신의 존엄성을 깊이 생각하게 됐다.


나의 존엄을 지켜주는 듯 보였던 외형적인 것들은 이제 이곳에 하나도 없다. 오히려 나의 존엄을 결정적으로 방해할 서투른 영어 억양이 추가돼 있을 뿐이다. 이제 새롭게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 가사 도우미 내 친구가 존엄했듯, 아파트 관리원 아버지가 존엄했듯, 존엄한 리셉셔니스트 김미경 속 존엄성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23쪽에서


첫 장 「나 지금, 뉴욕에서 철학한다」는 여기서 출발한다. 거창한 철학이나 이념이 아니라, 생활인의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생활철학의 근본이다. 결혼에 대해 자신만만했던 자신이 이혼을 거치면서 깨달은 점을 고백하고,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면서 걸레론에까지 다다르며, 사회적 지위와 외모에 대한 세상의 고정관념을 비틀어보기도 한다.



자녀 교육에서 영어까지,
유쾌함 속에 뼈가 있는 이야기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은 사춘기 소녀 ‘린이’다. 싱글맘으로 딸 린이와 함께 살면서 겪는 에피소드들을 보면, 고개를 끄덕일 부모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성(性)에 대한 린이의 질문에 당황하고 고민하기도 하며, 독서 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할지, 고등학교 선택에서 연예인이 되려는 자녀 진로 문제에 이르기까지, 엄마이자 친구 같은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철부지 같아 마음 졸이게 하지만 때로는 엄마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지는 딸 린이. 자녀와 부모가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이 엿보인다.


린이는 큰 소리로 통곡하기 시작했다. 노래 딱 한 소절 듣자마자 심사위원이 “그만!” 하고 소리쳤나 보다. 몇 달을 연습했는데 한 소절밖에 못 부르고 땡! 했으니. (…) 린이는 인턴기자 기간 한 달을 거쳐 정식 기자가 됐다. 살짝 들여다보니 사이트에 벌써 린이가 쓴 기사가 가득하다. (…) 이걸로 린이의 셀러브리티 되기 열망은 잠잠해지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도 한몫한다.
“린아, 이거 너무 잘한 것 같다. 너무 잘됐어. 마린 기자 탄생!”
“엄마, 인생 너무 쉽게 살려고 그러지 마. 애 너무 쉽게 키우려 그러지 마. 나 이거 연예인 되려고 하는 거야. 나 셀러브리티 될 거야.”
“엉?”
―96~98쪽에서


저자의 에피소드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살짝 깨진다. 그는 쉰 살의 나이에 고등학생 자녀를 둔 엄마로, 뉴요커란 명색에 비해 형편은 결코 넉넉하지 못하다. 그러나 새를 수집하고 그림 그리는 취미가 있으며, 시간 나는 대로 미술관을 찾아 작품을 감상하고 아트 딜러를 시도해보기도 하고, 못 알아듣는 영어도 몸으로 익히려 애쓴다. 그 이야기들 대부분은 재미있게 술술 읽힌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찔리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여운을 남긴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말, 즉 나이나 직업이 진짜 중요한 게 아니란 사실을 그의 삶 자체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보너스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