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두 번 수상한 일본 감독
영화감독 이마무라 쇼헤이의 첫 산문집


과거사 문제와 사회적 반감 때문에 음성적으로 향유되던 일본 대중문화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받아들여진 건 겨우 1998년 10월, 제1차 일본대중문화개방 조치가 시행되면서부터다. 하지만 이때도 영화, 비디오, 출판물 등에서 부분적인 개방만 허용됐는데, 영화의 경우 한일 공동 제작 영화이거나 세계 4대 영화제 수상작에 한한다는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단 네 편의 영화만이 극장에 걸릴 수 있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가게무샤>,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 박철수의 <가족 시네마>, 그리고 이마무라 쇼헤이의 <우나기>.
1997년 <우나기>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기 전에도 이마무라 쇼헤이는 1983년 일본판 고려장 이야기인 <나라야마부시코>로 먼저 같은 상을 받고 이미 세계적 거장의 위치에 올라 있었으며,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두 번 수상한 유일한 일본 감독이라는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이런 성취를 이루고도 화려하고 밝은 주목을 누리기는 어색해했다. 대학 시절부터 문학도답지 않게 신주쿠 암시장 등을 돌며 뒷골목 문화를 익히고 비주류인 사람들 속에서 갖은 고생을 한 까닭에 어떤 저항심 내지 반골성을 띠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오가며 건달, 창부, 재일조선인, 그 밖에 외면당한 사람들에게 자주 눈길을 쏟았고 대중의 기호에 아랑곳하지 않는 길을 걸었다. 일본 영화계의 스튜디오 시스템에 안주하며 예술적 성취를 이루거나 돈 되는 영화를 만들겠단 일념을 간직하기보다는, 자금을 모으려 집을 저당 잡히고 주변에 아쉬운 소리를 하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해야 할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게 그만의 주제와 영화 기법을 지켜 <복수는 나의 것> 등 지금껏 영감을 주고 인용되는 걸작을 남겼다.
『우나기 선생』은 영화감독 이마무라 쇼헤이의 국내 첫 산문집이다. 그가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41편의 산문, 오직 이 책을 위해 사흘 동안 진행된 인터뷰 전편, 그리고 그의 모든 영화를 다룬 상세한 필모그래피로 이루어져 있다. 쇼치쿠 영화사의 조감독으로 입사해 오즈 야스지로 같은 거장 밑에서 일하다 닛카쓰 영화사로 옮겨 감독 데뷔를 하고, 더 자유로운 제작을 위해 ‘이마무라 프로덕션’을 차려 독립하고, 후학을 키우고자 일본영화학교(지금의 일본영화대학)를 세우고 운영하기까지, 배우론, 연출론, 제작론, 교육론을 포함해 영화판에서 그가 겪은 수많은 일화가 한 편 한 편 유머와 우수를 간직한 채 그려다. 나아가 영화 바깥의 이마무라 쇼헤이도 섬세하게 보여주는데, 태평양전쟁 전후의 개인사며 추억,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쑥대밭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에 대한 관찰과 자신의 별별 생활법 등 따뜻하고 쾌활한 예술가의 일화들이다. 대학 시절 문학을 끼고 살았고 사실을 채집하는 데 능한 감독답게 이마무라 쇼헤이의 글은 문학과 다큐멘터리의 중간에 있어, 자신의 일들을 영화처럼 생생하게 전한다. 탁한 삶을 그리면서도 인간적 정서를 놓지 않았던 그의 영화들처럼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삶에 열심이었던 현실의 이마무라 쇼헤이를 만날 수 있는 첫 책이다.


관찰자 이마무라 쇼헤이의 인류학 입문
독하고 따뜻한 산문에 담은 인간 군상의 희비극


<돼지와 군함>이 끝나자 역시 300-400만 엔쯤 예산이 오버돼 프로듀서는 시말서를 쓰고, 나는 이후 3년 정도 작업 배당을 못 받고, 근소한 계약금을 받기는 했어도 밀려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아내와 나이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도카이도의 미시마에 옮겨 가 살았다.
-232쪽


이마무라 쇼헤이는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은 두 영화와 <복수는 나의 것>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지만, 그의 극영화들이 되도록 감정을 자제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다큐멘터리, 즉 관찰과 기록에 무척 능한 감독이었다. <돼지와 군함> <일본 곤충기> <인류학 입문> <인간증발> 같은 1960년대의 작품들은 다큐멘터리이거나 혹은 다큐멘터리에 버금가는 조사가 뒷받침된 영화이고, 그 뒤에는 1979년 <복수는 나의 것>을 내기 전까지 11년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극영화를 쉬면서 아예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그는 영화 만들기의 재미를 다음의 한마디로 압축한다. “인간이 재미있다.”(「후기를 대신하여」)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관찰과 고찰에서 그의 예술은 이루어졌다.
이런 면은 그의 산문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영화를 만들 때 “감정을 조장하는 음악은 필요 없다” 잘라 말하는데 그의 글도 다르지 않아, 억지스럽게 꾸미기보다는 그저 겪은 일들을 사실 위주로, 과잉된 감정 없이 편안하게 풀어놓는다. 그것도 예술가인 자신의 심미적인 자아를 천착하는 법은 거의 없고, 자신이 직접 겪었던 태평양전쟁 전후의 도쿄라든지 그 쑥대밭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이야기, 전쟁 전의 평온했던 가족 이야기, 대학 시절 신주쿠 암시장을 드나들며 인생 공부를 한 이야기, 일상에서 스치거나 로케이션헌팅을 다니며 만난 사람들 이야기 등이다. 그의 눈은 대부분 타인을 향해 있다. 그에겐 자기 외부의 모든 게 글감이자 영화 소재였다.
그가 타인의 삶, 특히 소외당한 사람들의 삶을 주목하게 된 계기는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지만 그의 산문 곳곳에는 태평양전쟁 전후로 크게 달라진 삶이 때로는 자신의 일화로, 때로는 타인의 일화로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본성을 억누르고 사는 범상한 일본인을 주목하는 대신 더없이 솔직한 하층민과 서민을 주목하며, 큰 역사의 이면에서 실핏줄처럼 무시되다가 때로 통증으로 다가오는, 일본 사회의 모순이라 할 삶들을 요리조리 따지고 기억한다. 과한 동정 없이, 하지만 애정은 듬뿍 담아, 산전수전을 겪어본 사람답게 의젓한 웃음을 동반해 쓴 그의 글에서 거장의 배포며 어른의 너그러운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많이 조사하느라 너무 나가서 탐정 회사같이 됐어요. 조수 일을 하는 사람들은 호적등본을 떼다놓고 “시나리오네요”라더군요. 호적등본을 보니 굉장히 재미있어요. 어떤 사람의 과거를 조사하려고 호적을 보고, 그 사람이 정착한 발자취를 제1고에서 제2고로 끝도 없이 계속 작업했습니다. 이걸 “호적 놀이”라고 부르고 있죠. 기층 사회를 계속해서 조사해요. <일본 곤충기> 때는 매춘부와 매춘 알선업자의 관계를 취재해서 썼더니 대학 노트 세 권이 됐어요. 듣고 기록하는 취재가 무척 재미있는 거죠. 그런데 이걸 캐스팅해서 영화로 만들려고 하면 전혀 다른 기분이 돼버려요. 이 취재한 것이 영화화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생각은 합니다만. 줄거리를 쓰지 않아도 제대로 기층사회를 맞닥뜨리니까요.
-231쪽


조감독, 감독, 제작자를 거쳐 선생이 되기까지
이마무라 쇼헤이가 영화계에서 살아가는 법


쇼와 32년(1957년) 매춘방지법이 성립한 해, 요코스카를 무대로 <돼지와 군함>이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 때 당시 아직 건강했던 오즈 야스지로와 노다 고고 선생이 입을 모아 “그대들 뭘 일부러 좋아서 버러지만 그리나?”라고 말씀하셨지. 그때 결정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버러지만 그린다.’
-218쪽


이마무라 쇼헤이는 1951년 와세다대학교 서양사과를 졸업하고 그해 쇼치쿠 영화사 조감독부에 입사했다. 당시는 일본 영화가 막 최전성기로 발돋움하던 때로, 쇼치쿠 영화사는 오즈 야스지로, 가와시마 유조, 시부야 미노루 같은 명감독들을 보유하고 철저한 도제 시스템을 앞세워 영화 부흥에 큰 몫을 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으레 제자가 스승의 그늘 안에 안주하기 쉽지만 이마무라 쇼헤이는 탁월하게 주체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3년 만에 쇼치쿠의 시스템을 벗어나 닛카쓰 영화사에서 자기 영화를 일구어갔으며, 1960년대에는 쇼치쿠 소속인 오시마 나기사 같은 감독들과 일본 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끌었다. 일본의 영화사들이 줄도산한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에도 그는 자기의 작풍을 지키며 끝내 살아남았고 이후의 성과는 알려진 대로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아집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그토록 동경한 구로사와 아키라와 가와시마 유조뿐 아니라 존경과 애증이 공존했던 오즈 야스지로 같은 앞 세대 감독들이 하지 못한 일, 즉 ‘일본영화학교’를 만들어 젊은 영화인을 키우는 일에 자신의 힘과 재산을 모두 털었다. 앞 세대에 대한 반감에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교육은 거칠긴 해도 도제 방식과는 달랐고, 사제의 관계도 경직되었던 옛날과 달랐다. 그의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이 학교도 자기 혁신을 계속해 지금은 ‘일본영화대학’으로 개편되었다. 현재 일본 영화업계 종사자 중 상당수가 이 학교 출신이며, 우리나라와 중국 등 해외에서도 학생이 끊이지 않는다.
『우나기 선생』에는 쇼치쿠 영화사의 조감독으로 시작해 세계적 거장이 되고, 거기서 번 돈으로 다시 비대중적 영화를 만드는 것도 모자라 영화학교 선생님이 되어 학생들과 티격태격하기까지의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빼곡히 담겼다. 일본 영화계 시스템의 부흥과 붕괴를 함께하면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강단을 지킨 감독의 호방한 면면을 만날 수 있다. 일본 영화사史의 굴곡을 지나와 끝까지 거장으로 남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낱낱의 삶을 그 자신의 글과 말로 전한다.


일본영화학교도 창립 후 얼마 되지 않았고 게다가 이사 측에 의지는 낮으나 투기심은 충분하다는 식의 멤버도 있고 나도 이치만 좇아서, 운영이 뜻대로 안 되는 시기가 있었다. 덤으로 내 조수가 감독 독립하도록 자금 마련도 도와야 해서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 같은 1년이었다. 상층부를 완전히 교체하고 일체의 책임을 혼자서 폼 나게 짊어졌지만 빌딩의 집세도 직원의 급료도 지불할 수 없어서 오랜 지인, 친구에게 기대어 곳곳에 돈을 빌리며 돌아다녔다. (…) 남 탓을 할 수는 없다. 학생들이 적으로 보이는 게 싫어서 죽을 만큼 지쳤지만, 몇 사람인가하고 뜻밖에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선생님, 영화 찍어주세요. 우리가 아르바이트해서 자금을 모을 테니까”라고 말해 “얼마 모이는데?”라고 물으니 “한 사람에 5만 엔씩 30명이라고 치고 150만은 모입니다”라고 말한다. 금액의 적음도 감동적이라 나도 모르게 눈물을 머금은 일도 있다.
-105쪽



추천사


2006년 칸영화제에서 <괴물>이 최초로 공개되었을 때 수많은 반응이 쏟아져 나왔지만 많고 많은 평론가와 기자 들의 그 어떤 코멘트보다 내 가슴에 강렬하게 새겨진 건 일본의 어느 나이 든 영화제작자의 코멘트였다. “이것은 마치 이마무라 쇼헤이가 만든 괴수 영화 같다.” 매우 가슴 설레고 영광스러운 코멘트였다. 이마무라 쇼헤이라는 거장의 이름은 내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살인의 추억>을 준비할 때도 그의 역작 중 하나인 <복수는 나의 것>, 실제 일본 연쇄살인마의 흔적을 그린 이 괴력의 작품에서 큰 영감과 자극을 받았고, <돼지와 군함>이라든가 <붉은 살의> 등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영화들을 오랫동안 존경해왔다.
그동안 마틴 스코세이지, 쿠엔틴 타란티노, 코언 형제 같은 거장들을 운 좋게 만나 영화 얘기를 나누는 행운의 순간들을 가졌지만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님은 없었다. 그분은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는데, 그 갈증을 해소해주는 게 바로 이 책이다. 사실상 한국어로 나온, 이마무라 쇼헤이에 관한 최초의 책이다. 그분이 쓰셨던 산문과 인터뷰 등을 보니 마치 가지런히 정리된 그분의 일기장을 들여다보고 귓속말을 듣는 느낌이다. 거장의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속 모습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그의 이름을 들어보았거나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꼭 넘겨볼 만하다.

봉준호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