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와 옐친이 지목한 동시통역사
요네하라풍 러시아론

 

  러시아 대통령에 취임한 옐친이 어느 러일 관계 행사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옐친은 일본인 기자단을 ‘쿠릴 열도 질문밖에 하지 않는 단세포 녀석들’이라 생각하는 듯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요네하라 마리를 발견하고는 “마리, 마리” 하며 기쁜 듯 웃으며 러시아 식 키스와 포옹을 나누었다.(요네하라 마리 『미녀냐 추녀냐』 중 저널리스트 나고시 겐로의 해설에서)
  요네하라 마리는 고르바초프와 옐친이 직접 지목해서 통역을 부탁한 일급 동시통역사였다. 소련 시절에만 100여 회, 소련 붕괴 후에도 수십 차례 러시아에 다녀온 ‘러시아통’이기도 하다.
  『러시아 통신』은 요네하라 마리가 본 러시아와 러시아인에 대한 탐구집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두 실험을 감행한 러시아를 객관적인 눈으로 보고, 러시아 체제를 움직이던 유명 인사와 그 체제를 살아가던 일반인을 가까이서 접한 그였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러시아에서의 다양한 경험과 요네하라 마리만의 국제인적 사유, 톡톡 튀는 발상과 문체가 만나 완성된 ‘요네하라풍 러시아론’. 저자는 “수수께끼 속 수수께끼 같은 나라” 러시아를 우리에게 새롭게 보여준다.

 
 

“세상에 추녀는 없다. 다만 보드카가 부족할 뿐”
─러시아의 국민 술, 통화로도 사용된 보드카

 

“시베리아에서 400킬로미터는 거리도 아니다. 영하 40도는 추위도 아니다. 영상 40도는 더위도 아니다. 그리고 보드카 4병은 술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러시아인은 술을 좋아한다. 정도가 지나쳐 업무에 방해가 되자, 1985년 3월 고르바초프가 절주령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절주령 이후 오히려 보드카 소비가 급증했다.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그 수요가 증가한다는 것은 인간 심리의 기본이다. 또한 시장화, 민영화라는 미명하에 빠르게 추진되는 국가 재산의 사유화를 둘러싼 분배 싸움은, 사회주의 시대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스트레스를 만들었다. 이를 치유하는 전통적인 수단이 보드카였다.
  반 알코올 캠페인은 2년쯤 지나 종식되었다. 이는 고르바초프의 자국 내 인기가 추락하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어중간한 경제 개방 정책은 불법적인 경제에 활기를 더했고, 물건이 부족해서 잘 팔려고 하지 않는 현상이 만연했다. 절주령 무효화 이후 선거전에서 표를 얻기 위해 돈이 아닌 보드카를 돌리는 일이 빈번했다. 화폐의 신용, 즉 교환가치가 땅에 떨어진 시기에 보드카가 통화 역할을 한 것이다.
  요네하라는 “세상에 추녀는 없다. 다만 보드카가 부족할 뿐”이라는 러시아의 관용구를 인용하며 ‘추녀’를 ‘추한 현실’이나 ‘추한 사회’로 치환해보라고 한다. 그는 보드카가 값이 싸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1917년 10월 사회주의 혁명 이후의 무리한 체제가 74년이나 계속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씁쓸히 말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하는 한계치에 대한 자각이 보드카 때문에 상당히 둔해지거나 늦어졌다는 말이다.

 

 

“경제 발전이나 혁신은 그 주체인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
─거대한 역사적 전환의 이면, 그 안의 삶과 사람


  1991년 8월 쿠데타와 그 실패 이후 소련 연방은 괴멸했다. 요네하라는 혁명 전야인 1990년 러시아를 방문해 많은 사람을 만났다. 루블 대신 말보로 담배로 계산하자는 택시 운전사에서, 아들이 군에 징병되어 순종하는 가축처럼 개조되었다는 어머니들, 사회주의가 낳은 공포와 노예근성을 비판하고 추악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영화화한 감독, 예전에는 정치의 심복이었던 학문이 이제 돈 전쟁에 굴복하려 한다며 생계에 쫓겨 학문에 소홀해진 학자들의 실태를 보여준 재소련 한국인 일본문학가 등 다양한 분야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렇듯 격동의 시기를 살던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요네하라는 전체주의를 내부에서 서서히 붕괴시킨 힘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준다.
  74년 만에 경험한 자본주의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녹록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전 인민적, 사회적 소유였던 토지나 건물, 생산 설비의 사유화를 둘러싼 사투가 극렬히 반복되었다. 승자가 된 사람이나 집단에는 유산계급으로서의 안락한 생활이 보장된다. 그렇지만 패자는 무산계급으로서 전자에게 착취를 당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천국와 지옥의 차이, 당시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불안을 생산함으로써 움직이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역사적 전환의 이면, 그 안의 삶을 들여다보면 “경제 발전이건 혁신이건 그 주체인 인간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요네하라의 말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지루함을 모르는 이야깃거리의 보고
─러시아인의 국민성


  요네하라가 경험한 러시아인은 스케일이 크다. 그들에게는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히지 않고 장대한 꿈에 몰두하는 습성이 있다. 우주 개발이나 발레, 서커스 등 예술에 나타나는 상상력, 그것을 현실화하는 열정과 강한 근성, 완벽주의에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러나 이 뛰어난 러시아인의 능력이 냉전과 전체주의라는 환경 속에서는 각종 무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허황된 일에 완벽을 기하는 만큼 일상적인 분야는 엉망진창으로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러시아인은 때로는 격정적이고 때로는 무심하다. 덧붙여 그들은 지루함을 모른다.

 

러시아인은 지루해하지 않는다. 한결같이 붙임성이 있는 데다가 인종적인 편견이 적다. 날것 그대로의 자신을 확연히 드러낸 채로 직접 상대의 영혼에 말을 거는, 젠체하지 않는 타입이 많다. 어른들은 취미로 한 사람당 평균 500개 정도의 재담을 축적해놓으며 끊임없이 갱신하기 때문에 걸어다니는 이야깃거리의 보고寶庫이자 유머의 보고 같은 인종이다.
-282쪽, 「작가의 말」에서

 

  이 책에 담긴 수많은 재담과 기발한 관용구는 모두 그 ‘보고寶庫’에서 나왔다.

 

 

참치뱃살 마니아 로스트로포비치, 장광설 고르바초프, 고집쟁이 옐친…
─역사적 인물들의 맨 얼굴


  요네하라 마리가 동시통역사로서 접한 인물들에 대한 증언은 이 책의 압권이다. ‘말’을 통역한다는 것은 사상과 가치관은 물론, 언어 이면에 숨은 뜻까지 읽어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네하라는 로스트로포비치, 고르바초프, 옐친 등과의 일화를 소개하며, 우리에게 일종의 ‘이미지’로만 존재하던 역사적 인물들의 맨 얼굴을 보여준다.
  요네하라에 따르면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는 참치뱃살을 너무나 좋아해 일본에 방문할 때마다 쓰키지 시장에 꼭 들르는 사람이었다. 스모 선수의 이름과 기술에도 정통해 좋아하는 스모 선수 앞에서는 넋을 잃었다. 모든 사물에 생생한 호기심을 품으며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어린아이 같고,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좌우 세력의 균형 잡기에 노심초사한 고르바초프와, 극좌파를 넘어 아예 소련을 붕괴시킨 불도저 성향의 옐친은 서로를 향한 애증만큼이나 여러모로 상반되는 인물이었다. 우선 고르바초프의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장광설과, 옐친의 단도직입적이고 짧은 연설이 그러한데, 요네하라는 어찌 보면 옐친이 고르바초프의 안티테제로서 ‘과묵함’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또한 고르바초프가 국민의 신임을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던 데 반해, 옐친은 어떤 실수를 저질러도 마지막에는 국민의 신임을 물었던 것 또한 상반된다. 국민의 직접선거로 당선된 옐친과 달리 의회를 통해 당선된 고르바초프는 본질적으로 자국민과 소원했다. 자국민과의 심리적 친근감이 있느냐 없느냐가 옐친과 고르바초프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었다는 요네하라의 지적은 적확하다.


 

가슴으로 살아온 러시아,
체험으로 풀어낸 역사

 

어느 민족에게나 성역이 존재한다. 언뜻 보면 이해할 수 없지만 그 공동체 구성원에게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게 된 원인에는 많은 역사적 우연이 겹쳐 있으며, 각각의 역사적 우연에도 또한 이유가 있고, 현재의 논리로 설명하려면 하염없이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 당연해 결국에는 습관, 전통, 문화로 총칭된다.
-191쪽, 「로스트로포비치를 말하다」에서

 

  요네하라 마리는 “러시아는 알면 알수록 의문이 깊어지는 나라”이며, “글로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흥미롭다”라고 말한다. 그는 기존의 일부 평론가처럼 서구 선진국의 눈으로 ‘느리고 야만적인’ 러시아를 내려다보며 평가하기에는 너무나도 깊이 러시아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스러져버린 소비에트에 대한 회상과, 이상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던 공산주의에 대한 회한이 곳곳에 비친다. 가슴으로 살아온 나라를 통찰력 있게 바라보고 분석하지만, 예리한 시선의 바탕에는 애정이 담겨 있다. 요네하라는 이 책에서 그 애정과 사명감으로 오늘의 러시아를 있게 한, 러시아의 전통과 문화로 총칭된 역사적 우연과 그 우연의 이유를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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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고대하던 책이 나왔다! 요네하라풍 러시아론. ‘유쾌한 지식여행자’ 이전에 러시아어 동시통역사였던 저자가 들려주는 ‘리얼 러시아’ 이야기다. 고르바초프와 옐친과도 막역했던 그녀의 눈으로 읽으면 러시아조차도 ‘유쾌한 나라’로 탈바꿈한다. 누가 내게 러시아는 어떤 나라인가 묻는다면, 이 책을 내밀 수밖에 없다. 당신도 보드카만큼이나 러시아를 사랑하게 되리라.
이현우, 한림대학교 연구 교수, 『책을 읽을 자유』 『로쟈의 인문학 서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