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언어와 문화의 차이와 사이
—호방한 입담이 살아 있는 강의를 만난다

 

『차이와 사이』는 요네하라 마리가 1998년부터 2005년까지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그간의 저서에서 깊게 다루지 않았던 남녀 관계나, 번역과 통역, 언어와 문화를 통한 나라간 커뮤니케이션에 관하여 요네하라 마리가 전하고자 했던 것들을 담았다. 방대한 영역의 지식과 날렵한 필치로 한국에서도 많은 독자를 가진 그의 호방한 입담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남자는 샘플이다
—요네하라 마리, 성과 사랑을 말하다

 

제1장 「사랑의 법칙」은 남녀의 성과 사랑을 다룬다. 어린 시절 마리는 동서고금의 베스트셀러 소설에서 묘한 공통점을 발견한다. 하나는 소설 속에서 이상형으로 꼽히는 인물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유목사회에서는 날쌔고 건강한 육체와 강한 결단력을 가진 인물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반면, 정주형인 농경민족의 경우 다른 농민을 착취하여 일하지 않아도 되는, 즉 뽀얀 피부에 볼이 통통한 남자가 부와 권력의 상징이다.  마리는 『겐지 이야기』나 시바 료타로의 소설 등 다양한 예를 통해, 이성에 대한 취향은 여러 사회적, 환경적 요인으로 결정된다고 말한다.
또 하나는 여성 편력이 심한 남자 주인공이 나온다는 점이다. 저자는 여자(암컷)는 남자(수컷) 없이 존속할 수 있으며 ‘남자는 샘플’이라는 설을 재미있게 풀어간다. 그 근거로, 남자는 환경의 격변기에 많이 죽는다는 것과, 수컷 없이 번식하는 생물의 예가 있다는 것을 든다.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이나 가장 무거운 사람, 성격 이상자나 흉악범 가운데 남자가 많다는 것도 샘플로서 폭이 넓기 때문이라고 한다. 샘플이라면 가능한 한 다양한 유형이 있는 것이 좋다는 의미다.

 

환경이 크게 변할 때 수컷이 많이 죽고 많이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이 바로 샘플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인류는 종種으로서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남기 위해 적응할 수 있는 타입인가, 적응하지 못하는 타입인가. 후자는 적응하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자신의 유전 형질을 다음 세대에 남길 수 없다. 살아남는 타입만이 유전 형질을 전해줄 수 있다. 살아남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선별하기 위한 샘플로서 남자가 필요한 것이다.
-39쪽, 제1장 「사랑의 법칙」에서

 

암컷은 유전 형질의 보수와 유지를 담당하며 종의 과거를 대표한다. 수컷은 환경 변화에 따라 유전 형질에 쇄신을 일으키는 역할을 맡는다. 미래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런 역할을 맡기 때문에 다양한 변화의 특징은 여자보다는 남자에게서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악조건 속에서 가장 먼저 죽는 것은 수컷이다.
-45쪽, 제1장 「사랑의 법칙」에서

 

세계 명작과 다양한 통계 자료, 생물학적 지식까지 망라한 가설이 기발하다. 그 진위 여부가 핵심은 아니다. 마리가 주목한 것은, 사람들이 잠재적으로 ‘여자가 남자의 지류支流’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는 점이다. 그는 이 뿌리 깊은 고정관념의 허를 찌른다.

 

 

소통의 메신저가 꿰뚫어본
언어, 사람, 세계의 모든 관계들

 

제2장 「이해와 오해 사이」와 제3장 「통역과 번역의 차이」는 ‘언어란 무엇인가’, 나아가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를 다룬다. 요네하라 마리가 깊이 천착했던 주제이다. 그는 언어란 하나의 기호로, 그 자체는 어떤 동일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재치 있게 설명한다.

 

나라면 제일 먼저 “미인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내가 생각하는 미인과 신이 생각하는 미인이 완전히 다르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옛날 풍속화의 미인처럼 볼이 통통하고 실처럼 가는 눈으로 만들어버리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런 미인이 되느니 차라리 지금 이대로가 좋다. 모나리자 같은 미인도 조금 곤란한데, 가장 무서운 것은 피카소 식의 미인이 되는 것이다. 신이 피카소와 같은 미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62쪽, 제2장 「이해와 오해 사이」에서
 
또한 프라하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일류 동시통역사가 되기까지의 자전적인 내용과 경험을 바탕으로, 통역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과 외국어를 잘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실질적인 조언도 덧붙였다.

 

내가 지금 모국어인 일본어와 제1외국어인 러시아어를 그럭저럭 자유롭게 구사해 그 사이를 오가며 돈을 벌고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언어로 다독多讀과 남독濫讀을 한 덕분이다.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고 유지할 때도 독서는 가장 고통스럽지 않은 학습법이라고 생각한다.
-118쪽, 제3장 「통역과 번역의 차이」에서

 

제4장 「국제화와 글로벌리제이션 사이」에서는 미국인이 말하는 ‘글로벌리제이션’은 자신들의 기준을 강요하는 개념이고, 일본인이 생각하는 국제화는 세계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행위라는 예리한 분석을 펼친다. 이는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더욱 눈길을 끈다.
마리에 따르면 진정한 국제화란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접할 때 직접 그 문화와 관계를 쌓는 것이다. 그는 영어를 통해서만 세계를 알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지배당하고, 책과 기사 등 각종 정보원源의 대부분이 영어 중심인 경우, 고정된 프레임에 갇혀 오히려 한정된 세계를 접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
—차이를 알고 사이를 좁히다

 

인간은 누구나 끊임없이 소통하려 한다. 하지만 완벽한 소통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쩌면 우리는 “네 말을 이해해”가 아니라, “네 말을 오해해”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요네하라 마리는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원原발언자가 갖는 이미지와 같은 이미지를 상대방이 갖게 해주거나, 적어도 그 이미지에 가장 가깝게 전달하고 싶은” 통역사로서의 바람을 놓지 않는다. 또한 다른 사람, 다른 문화, 다른 나라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잃지 않는다면 “모두가 동시에 웃고 함께 감동할 수 있다”라고 하며,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우스운 장면에서는 같이 웃고, 슬픈 대목에서는 같이 눈물을 흘린다. 사람이 느끼는 마음의 진동은 다른 사람의 진동과 공명하면 더 깊고 커진다.
-108쪽, 제3장 「통역과 번역의 차이」에서

 

다양한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고, 언어와 언어 사이의 다리 역할을 천직으로 삼은 그였기에 가능한 커뮤니케이션론이다.
마리는 저서 『마녀의 한 다스』에서 “의미는 서로 다른 문화가 교차하는 순간에 비로소 생긴다”라는 바흐친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다양한 이異문화를 체험하고 일류 동시통역사로 활약했던 그가, 의미란 곧 차이라는 언어학의 기본 명제를 자신의 신념으로 삼은 것은 자연스럽다. 차이를 알면 사이를 좁히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거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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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팬시하지 않고도, 소녀적 감수성이 이리 살아남을 수 있다니.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마침내 해석해내고 마는 그의 통찰은, 그 지점과 만나 그렇게 드물게 귀엽다. 내가 그의 생각들을 '지적 앙탈'이라 부르기로 결심한 이유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