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은 창조와 정신의 통로
작가 50명이 바라본 50가지 세계

 

누구나 자기만의 방을 원한다. 글쓰기를 위해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는 작가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들은 단독자이길 원한다. 그러나 완전하게 고립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건축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마테오 페리콜리는 작가들의 이러한 태도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뉴욕에 대한 책을 위해 자료 조사를 하는 동안
 작가들도 나와 비슷한 처지에 종종 놓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몇 시간이고 쉼 없이 책상 끝에 앉아서는,
 가능한 많은 풍경을 담기 위해 최대한 창에 가깝게 앉거나
 그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멀리 떨어져 앉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그 풍경을 묘사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그림에 담아온 모든 요소가 그들의 말 덕분에
 완전해(아니, 어쩌면 한층 더 나아)진 것이다.
 -12쪽

 

이 경험을 통해 페리콜리는 작가들이 창밖 세계를 궁금해하는 동시에 경계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안정적으로 내면을 유지하면서도 끊임없이 외부와 소통하길 원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이런 모순적 태도가 글과 그림이라는 상이한 표현 방식이 일으키는 시너지 효과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원하면서 원하지 않는, 같으면서 같지 않음이 주는 아이러니. 이렇듯 미묘한 감정, 차이, 진폭의 순간을 페리콜리는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래서 자신이 그린 작가 50명의 창밖 풍경과 그에 해당하는 글을 모아 <파리리뷰>에 연재했다. 『작가의 창』은 2010년에서 2014년까지 이루어진 이 연재를 하나로 묶은 책이다. 오르한 파무크, 무라카미 류, 보르헤스의 부인인 마리아 코다마 등이 참여했고 뉴욕, 파리 등 메트로폴리탄부터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나이지리아 라고스까지 세계 곳곳의 창밖 풍경을 담고 있다.
 
 이건 작가의 얼굴이 아닌 작가의 시각 또는 그것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지점이다.
 물론 다른 이의 창, 작업 공간의 외부를 본다고 해서
 그의 글에 대해 알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특별함, 낯섦, 친근함 때문에 공간은
 창조적 정신을 위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은유다.
 -8쪽

 

 

작가는 세계와 끊임없이 조우한다
창밖 풍경으로부터 오는 글쓰기

 

『작가의 창』 속 작가들의 태도는 각양각색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네이딘 고디머는 감옥이나 다락방에서도 글을 쓸 수 있으므로 “작가에게는 풍경이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하는데, 이스라엘의 젊은 작가 에트카르 케레트는 “글을 쓸 때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요소가 내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라고 말한다. 즉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삶, 주위 환경이 글의 재료가 된다는 것이다. 한편 인도와 미국, 잉글랜드를 오가며 글을 쓴 소말리아의 작가 누르딘 파라는 “물리적인 것보다 정신적 환경에 더 오래 머무르는 작가의 삶”에 걸맞게 자신은 기억을 통해서만 글을 쓴다고 밝힌다. 즉 지나온 곳, 과거가 되어버린 풍경에 관해서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작가들의 의견은 조금씩 엇갈린다. 그러나 공통점은 있다. 그들이 필요와 무관하게 창밖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 어느 작업실에나 창문은 있으므로, 그들은 언제나 저 너머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상태로 글을 썼다. 이 글이 자신을 대신하여 저 밖으로 나아가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할 것을 직감하는 상태로 글을 쓴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창밖 풍경과 꾸준히 소통한 것과 같다. 그가 창밖의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글을 썼기 때문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건물의 지붕을 언제나 좋아했다.
 아침에는 굴뚝에 황새가 한 마리 찾아와서는 내 방을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고 또 이해했다.
 그는 내 하늘이고, 나는 그의 땅 친구였다.
 그에 대해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48쪽

 

 

“풍경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우리를 빚고 성장시키며 완성되는 언어

 

『작가의 창』을 살펴보면 마테오 페리콜리가 제안한 작업(자신의 작업실 창밖 보기)으로 인해 작가들이 새삼 어떤 것을 발견하거나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페리콜리가 밝혔듯 “일상의 일부로 자리 잡은 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잃을 예정이거나 잃은 직후에나 그것이 곁에 있었고 내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깨닫지 않는가. “풍경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저 건물이 아니라 나무나 흘러가는 배를 보았더라도 나는 똑같은 사람이었을까” 같은 질문은 언제나 뒤늦게야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은 늦었기에 가능한 깨달음일 것이다. 시간의 끄트머리에서만 가까스로 거머쥘 수 있는 숭고함이다. 그러므로 창밖 풍경은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빚고, 성장시키고, 마지막 순간에야 완성되는 삶의 은유이다.

 

 바로 이번 주, 이 집을 떠나게 되었다.
 이제 창밖 풍경도 바뀔 것이다.
 새로운 언어의 집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이 창에게 감사와 안도의 작별 인사를 건넨다.
 삶의 다음 장을 위한 준비를 끝냈다.
 -110쪽

 

 

추천사

 

“내 방 창문을 떼어갈 수 있다면 여행도 할 만하다”라고 했던 건 작가 에리히 캐스트너였다. 나는 반대다. 내 방 창문으로 매일 다른 풍경이 보였으면 좋겠다. 나는 가만히 있고, 세상의 풍경들이 내 방 창문 앞으로 줄 서서 지나갔으면 좋겠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마테오 페리콜리 덕분에 가능해졌다. 이 책의 창문 그림을 오려서 내 방 창문에 붙이면 된다. 매일 다른 그림을 붙여서 전 세계 작가들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함께 바라보고 싶다. 풍경에 대한 글을 그림과 함께 읽으면 수십 개의 창문을, 풍경을, 새롭게 가지게 되는 셈이다. 저절로 글이 써질 것 같다.

김중혁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