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백작의 거리에서
근현대 여성 공간을 발견하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사이의 명동을 떠올리면 이봉구의 명동, 박인환과 김수영 등 남성 문학인들이 다방이며 술집에서 어울려 세상을 논하고 문학을 탐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이들은 ‘생활’과 동떨어진 낭만을 꿈꾸며, 한국전쟁 후 폐허나 다름없는 서울 한복판에서 자조 섞인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당시의 명동은 그들만의 거리가 아니었다. 낭만의 거리, 데카당의 거리가 아닌 삶이 살아 숨 쉬는 거리였다. 명동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삶과 황폐해진 서울을 되살리는 희망의 거리였다. 현재 서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 명동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명동은 문화예술의 거리이기 이전에 쇼핑의 거리이자 대한민국의 생동하는 삶을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역동적인 공간이다. 이러한 명동의 모습은 이미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만들어졌고, 그 중심에 여성이 있었다. 여성학 연구자 김미선은 당시의 명동 거리를 여성의 소비문화 중심지로 새롭게 바라보며, 지금의 명동이 있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쳤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숨은 목소리를 되살려낸다. 
   지금까지 명동의 공간성을 탐사한 연구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 명동의 건축물을 논하거나 남성 문인들의 근거지로 바라보는 데 그쳤으며 ‘명동’ 그 자체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남성의 시각으로 명동을 공간화하는 데 그쳐 그 공간의 의미를 온전히 부각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명동 아가씨』에 집약된 저자의 연구는 명동의 공간성을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보되 그 역사적 의미를 성별적인 시각에 제한하지 않고 왜곡 없이 드러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나 1970년대 이후 민주화, 산업화에 대한 연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받은 한국전쟁 직후의 대한민국 모습을 그렸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여원>을 비롯한 여성지와 각종 일간지 자료들과 더불어 당대를 경험한 ‘명동 사람들’의 생생한 구술 인터뷰까지 어우러져 근현대 여성의 공간, 명동을 조명한다.

  

 

근대적 소비 공간과 여성의 자리
“정녕 봄은 명동의 진열장으로부터 오는가?”

 

   이 책에서 다루는 명동의 범위는 을지로입구역에서부터 충무로 1가와 2가를 아우르는 명동역까지로 식민지 시기에는 명치정과 본정으로 불린 지역이다. 본정은 현재의 충무로 1가와 2가 일대를 가리키는 곳으로 일본인의 거류지가 생기며 발전했다. 명치정은 행정 구역상 명동 1가와 2가 일대를 가리키며 본정의 배후지 역할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가난한 양반이 모여 살던 이 지역에 일본인이 모여들고 이들의 행정적, 상업적 중심지가 만들어지면서 현재의 명동 지역은 대한민국 역사의 중심에 들어섰다. 일제강점기 당시 미츠코시 백화점, 조지야 백화점, 미나카이 백화점, 히로다 백화점 등 대형 상업 지역이 조성되었고 지금의 명동에도 그 모습이 신세계 백화점과 롯데 백화점으로 각인되어 있다.
   명치정과 본정으로 분리된 이들 지역이 ‘명동’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인식된 것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르러서다. 재건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이 일대가 격자형으로 통일성을 갖추었고, 두 지역에 비슷한 상업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이 지역을 ‘명동’이라는 이름으로 인식했다.
   한국전쟁으로 피난 갔던 이들이 하나둘 명동으로 모여들면서 명동은 서울에서 가장 먼저 활력을 찾았다. 식민지 시기의 상업 지역 성격을 이어받아 양장점과 미용실 등 소비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상점들이 명동에 들어섰다.

 

“환락과 허영의 거리 명동 (…) 마치 산불 끝에 돋아나는 고사리순같이 (…)
명동은 다시 차츰 잊어버렸던 분위기 속으로 돌아가고 있다 할까.”
— 59쪽에서

 

“빠리의 번화가 샹제리제 거리, 뉴욕의 5번가, 동경의 긴자 한다면 서울은 명동 거리.”
— 60쪽에서

 

  한 양장점을 시작으로 국제 양장사, 송옥 양장점, 보오구 양장점 등 수십여 개의 양장점이 명동 거리에 자리 잡았으며, 허바허바 미장원, 백난 미장원, 스왕 미용실, 버그 미용실 등 미용실이 들어섰다. 이렇게 양장점과 미용실이 자리를 잡아가자 이들에 인력을 공급하기 위한 학원이 생겨나 양재학원과 미용학원, 기술학교 등 교육 시설이 명동을 중심으로 확장해나갔다. 양복점과 귀금속상이 즐비한 종로에 비해 양장점과 미용실 등 여성의 소비 공간이 집중적으로 들어선 명동은 이로써 여성의 생활 중심지가 되었다.

 

 

여성의 공간, 명동을 기억하다
“서울이라 명동 거리 파라다이스”

  

기꺼이 매혹당하다, 소비 공간이 생활 공간으로

 

“친구들이랑 명동으로 나가는 거야. 명동을 나가면 그건 최고의 하이클래스지. 배우들도 많고. (…) 전부 양장을 맞춰서 해 입었어요. 정싸롱을 간다, 송옥 양장점을 간다, (…) 명동을 가면 말쑥하게 아주 서양 여자가 돼서 나오는 거야.”
— 100쪽에서

 

  수십 개의 미용실과 양장점이 모인 거리를 활보하며 여성들은 최신 유행을 따라했다. 언론 매체에서는 계절마다 달라지는 명동 거리를 기사화하며, 그 화려한 모습을 통해 한국 사회가 소생하고 있음을 알렸다. 양장점을 찾는 고객은 주로 여대생이나 직장 여성, 중년 부인들로 정기적으로 옷을 맞춰 가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1950년대만 해도 아직 양장과 한복이 혼용될 때였기 때문에 양장을 하는 여성은 ‘양공주’로, 한복을 입는 여성은 ‘여염집 여자’로 통할 정도로 사회적 인식이 개방적이지는 않았다. 한편, 수도 시설이 잘 갖춰 있지 않아 머리 관리가 어려운 시기였으므로 사람들이 미용실을 이용하는 횟수는 오늘날보다 훨씬 많았다. 직장을 다니는 여성들은 출근 때마다 미용실에 들러 ‘고데’를 하고 갈 만큼 미용실 이용은 대중화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새 옷을 해 입고 머리를 매만지며 자신을 치장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때는 정말 하늘에 날아가는 새도 잡을 수 있다는 그런 기분으로 살았어. (…) 나로서는 아무튼 내 형편에 최선을 다해서, 멋도 부려보고 싶고 그랬어요.”
— 101쪽에서

 

   1950년대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여성계> <여원> <여상> <주부생활> 등의 잡지는 여성의 외모와 관련된 소비문화를 더욱 촉진했다. 이들 잡지는 미국 문화로 대변되는 서구의 최신 유행을 소개하며 피부 기초 손질법에서부터 때와 장소에 알맞은 옷차림에 이르기까지 생활에 필요한 여러 정보를 제공했다. 여성지는 거리를 지나는 여성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평가하기도 했으며 유명 여성들의 화보를 실어 여성 독자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여성지뿐 아니라 일간지에서도 최신 유행을 생활 정보처럼 기사에 실었다. 여성의 소비 시장이 커지고 서구식 유행을 따르는 경향이 심화되자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들의 소비를 사치와 허영으로 치부하면서 경제 발전이 시급한 사회를 외면하는 행위로 비난했다. 이러한 비난은 식민지 시기에 일제강점 현실을 부정한 채 신식을 따라한다며 신여성에게 가해진 비난과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서양의 근대적 발전상을 따라가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그 근대적 경제 발전의 부산물인 자유와 쾌락, 상상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은 외양만 표방한 경제 발전 구호의 전근대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생활을 문화로 만들다, 매혹의 공간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

 

“지금의 세대에 맞는 여성이 되어 생존경쟁이 심한 오늘에 뚜렷한 자기를 자신이 발견할 수 있도록 자기의 특기를 살려 결혼 후 가정의 행복과 자신 있는 삶의 길을 용기 있게 (…) 이러한 여성으로서 지닌 특기는 그 어느 백만금어치의 혼수보다 값있고 영구한 것으로 빛날 것이다.” 
— 130쪽에서

 

  명동에는 소비하는 여성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을 고객으로 상대하는 상점 역시 여성이 만드는 공간이었다. 양재 기술과 미용 기술은 여성성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쉽게 배울 수 있는 기술이었다. 전쟁 기간을 지나며 남성의 부재를 채워야 했던 여성들은 밥벌이 수단으로 양재 기술과 미용 기술을 배웠다. 물론 여성성과 양재‧미용 기술을 연관 지어 여성에게 적합한 직업으로 권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생각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양재업과 미용업이 여성에게 적당한 분야로 인정받았고 양장점과 미용실이 명동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은 명동이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였으며, 여성들이 명동을 어떤 식으로 의미화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처음 출발할 때와는 달리 인내성이 없는 여성이나 결혼을 하게 되면 도중에 그만두는 사람이 많다. 다만 기술을 수반하는 특수 직업이기 때문에 조금만 남보다 뛰어나면 경제적으로 충분히 독립할 수 있는 점이 매력이다.”

— 143쪽에서

 

“손님들이 자기의 얼굴을 생각하지 않고 덮어놓고 유행 머리만을 해달라고 할 때에는 사무적으로 손님의 비위대로 해주면 그만이겠지만 그럴 수만도 없어 퍽 괴로워한다.”

—144쪽에서

 

   여성지에서는 유명 디자이너들의 글을 소개하며 미용실과 양장점을 개업하는 과정을 자세히 알려주기도 했다. 양장계의 노라노와 최경자, 미용계의 임형선, 권정희 등은 이 업계에서 일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멘토’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일본과 미국, 프랑스 등 패션 산업이 더 발전한 나라에서 유학하거나 외국 디자이너들과 교류하며 한국의 패션 산업 발전을 위해 힘썼다. 대중은 이들의 이름을 미스코리아 대회나 미스유니버스 대회 등을 통해 접하며 점차 친근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대중 강습회를 열고 패션쇼를 개최하면서 명동의 여성 소비문화는 패션 문화로 서울은 물론 전국에 퍼져나갔다.
   이처럼 명동에는 양장점과 미용실을 운영하는 여성들, 그 안에서 일하는 여성들, 이들이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받는 여성들 등 다양한 여성이 모였다. 각기 다른 입장에서 각기 다른 환경에 처해 있었지만 어느 하나가 빠지면 굴러가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이들은 하나의 명동을 만들었다.
 

 

 

같은 공간, 다른 기억, 명동에 ‘나’를 새기다

 

“모두 바쁘다. 활발하고 생기가 넘쳐흐른다. 나는 마음이 우울하다거나 할 때 M 거리의 이런 분위기에 젖어보려고 자주 찾아온다. 사람마다 옷 입은 것 하나하나에도 나무랄 데가 없다.”
— 197쪽에서

 

  명동은 여성들에게 소비 공간으로서, 노동 공간으로서, 문화 공간으로서 자신들의 일상과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YWCA와 가톨릭여성회관 같은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한 단체가 명동에 위치했고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여성들 사이에 네트워크가 형성되기도 했다. 특히 양장점과 미용실은 여성들이 돈독한 관계를 다지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남성들에 비해 사회적 기반이 약한 여성들이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었다. 

 

“대개 한 미용실에 열 명 이상 있는데 한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아요. 그러면 서로 힘을 합쳐서 그 사람의 고난을 덜어준다는 것, 또 큰일이 있을 때에는 모두 모여서 단체 행동으로 도운다는 게 즐거움이고.”
— 184쪽

 

  이외에도 다방과 제과점, 극장, 서점, 레코드점 등 다양한 문화생활 공간이 명동에 위치하여 여성들의 발길을 끌었다. 문화생활을 즐기는 계층은 중산층 지식인 여성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명동을 생활 공간으로 지내던 양재사와 미용사, 달러 장수, 술집이나 바에서 일하는 여성들도 명동의 문화를 향유했다. 이들은 시간을 내 영화를 보고 연극을 관람하며 명동을 ‘방문’한 이들과 다름없이 명동의 즐거움을 누렸다.

 

“옛날에도 우리는 <안나 카레리나> <마농> 그런 미국 영화만 봤어. 국도극장, 시공관, 명보극장, 대한극장, 뭐 그런 데 가서도 우리는 불란서 영화, 미국 영화, 영화도 외국 것만 봤지 국산 영화는 안 봤어. 우리가 아무리 달러 장사를 (…) 했지만 수준은 높았으니깐, 외국 영화만 봤지."

— 195쪽에서

 

 

명동, 다시 쓰기
“여성들의 해방구 명동”

  

 『명동 아가씨』는 명동에 관한 기억 모음집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과거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어떠한 과정을 거쳐 명동이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하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역사의 보고이기도 하다. 전국 최고 공시지가, 전국 최고의 상권, 최대 외국인 여행객 방문지, 최고 보행 밀집 지역 등 오늘날 명동을 수식하는 말들은 ‘명동 아가씨’가 거리를 활보하던 그때 배태되어 있었다. 명동이 역사의 주요 무대로 등장하는 과정에서 소비문화를 놓을 수 없다는 사실, 이런 명동의 공간성을 구성하는 데 여성이 수동적인 역할이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였다는 사실 기억하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본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다 할지라도 누구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되고 쓰이느냐에 따라 그 공간의 역사는 달라진다. 명동은 지금도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변화무쌍한 공간이며, (…) 이제 수많은 여성들의 명동에 대한 기억과 현재 진행형 이야기를 들을 차례다.”

— 210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