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용하고 수집한 물건이 나를 말한다

─미술평론가의 사물에 대한 독특한 시선

 

  우리는 수없이 많은 물건에 둘러싸여 있다. 개인이 소유한 물건이란 자본주의의 표상이지만 단순히 소비 차원에서만 볼 수는 없다. 대량생산된 획일적인 기성품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의 물건에 자신을 투영해 개성을 드러내줄 수 있는 것을 선호한다.
『수집 미학』의 저자 박영택은 일상적이지만 개성적인 물건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다. 10년간의 큐레이터 생활을 거쳐 대학 강단에서, 미술평론가로 지내며 수많은 작품을 감상하고 평가하며 살아왔다. 그에게 사물이란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은 미술평론가, 교수, 생활인으로서의 면모와 취향을 보여주는 물건 하나하나에 얽힌 이야기를 담았다. 심슨 캐릭터 인형부터 일상에서 흔히 쓰는 귀이개와 손톱깎이, 와불이나 꼭두 같은 작품까지, 그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미술평론가의 심미안으로 고른 물건들을 엿보고 그에 깃든 이야기들을 전해 듣노라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 어느새 독특한 무엇이 되고, 내 주변의 사물에 새삼스레 눈길을 주게 된다.
 

나는 매일 무언가 수집하고 바라보고 좋아하면서 은밀한 시간을 보낸다. 이 자폐적인 사물과의 독대는 그것들이 발화하는 음성을 듣는 일이자 그 생김새와 색채, 질감을 편애하는 일이다. 미술평론가로서 작품을 보러 다니고 마음에 드는 이미지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일이 일과지만 실은 틈틈이 골동 가게와 서점, 문방구, 온갖 가게들을 들락거리면서 마음에 쏙 드는 그 무엇을 찾아 구입하는 것이 주된 일인 것도 같다.

— 「책을 내면서」에서

 

 

71개 사물과의 은밀한 독대
─심슨 인형에서 존재를 깨우치는 와불까지

 

  저자 박영택은 고백한다. 물건이 말을 건다고. 미술관 숍이나 문구점, 인사동의 화랑들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물건이 그에게 다가온다고. 온종일 그 물건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그것을 사지 못해 힘들어하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그 정도의 미감을 지닌 물건은 사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안경을 만났고, 지우개를 발견했고, 등잔과 인연이 닿았다. 교수, 미술평론가라는 직업 덕분에 선물 받은 물건도 많다. 청색을 좋아하고, 귀엽고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좋아하는 취향이 어느새 지인과 학생들에게 알려져, 인어공주 탁상시계와 스파이더맨 인형, 피노키오 줄자를 비롯해 많은 물건들을 선물로 받았다.
이러한 사물들과 나누는 교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 못지않다. 유독 청색을 좋아하는 그는 청색 사물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제자가 쓰던 블루 오일의 청색에 반해 뺏다시피 얻은 이것으로 두통에 시달리는 자신의 몸을 이완하고, 파란 연필깎이에 사각사각 깎이는 연필을 보면서 “늘 뭉툭하고 한없이 닳는 자신을 매 순간” 긴장시킨다. 책상 위에 놓아둔 자그마한 와불과 함께 속악한 하루를 보내면서 부처의 미소에 마음을 내려놓고, “죽은 영혼 대신 산 영혼을 독대하면서” 자신을 지켜주는 동자석과 함께 고요히 늙어가고 있다. 또한 피노키오 줄자를 대하면서도 거짓을 일삼는 자신을 돌아보고, 조그만 플래시 불빛에 위안을 받는다.

 

빨간 스위치를 앞으로 밀면 하얀빛이 밝게 쏟아져 나오는 광경은 볼수록 아름답다. 그렇게 밝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작은 몸체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훌륭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 밝고 하얀 빛에 의존해서 무엇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 빛만으로도 충만한 순간이 있다. 그저 조그마한 빛이라도 내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때가 있는 것이다.

—본문 284쪽 「미니 플래시」에서

 

 

추억과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물건 이야기
─대량생산된 기성품이 의미 있는 사물로

 

  71개의 다양한 사물 중, 그에게 특별한 음성으로 말을 건넨 것은 심슨 인형과 이스트팩이다. 심슨은 그의 별명이기도 하다. 외모를 희화화하는 별명에 기분 나쁠 법도 하지만 그는 “강의를 할 때마다 내 입을 보면서 학생들은 심슨을 떠올리겠지만 어쩌겠는가? 심슨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구경하는 것처럼 수업을 듣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다”라고 말한다. 심슨 인형을 비롯해 심슨 캐릭터가 들어간 사물들을 모으고는 책꽂이 사이나 서랍 속에 넣어두고 흐뭇하게 바라본다.
대학 교정에서 박영택 교수 하면 이스트팩 배낭을 동시에 떠올린다는 소문이 있다. 지금 쓰는 가방이 벌써 세 개째, 강의를 나갈 때가 아니면 대부분 이스트팩에 지갑과 필통, 립밤, 노트북 등을 넣어 다니며 전시를 보러 다니고 여행을 다닌다. 이스트팩을 들어 “나의 늘어난 육신으로 나와 긴밀하게 밀착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그는 언제나 이 배낭과 함께 길을 나선다..

 

뭐든지 다 받아주는 이 가방의 포용력은 더할 나위 없다. 그래서 여러 가방이 있지만 이스트팩만큼 편리하고 실용적인 가방은 없다. 며칠간 여행을 떠날 때도 그만이다. 이스트팩이 없는 여정은 상상하기 어렵다.
본문 86쪽 「배낭」에서

 

25센티미터의 작은 망치를 바라보며 지난 큐레이터 생활을 떠올리고, 제자에게 받은 코끼리가 수놓아진 손수건과 인어공주 탁상시계, 청색의 미니카를 완상하며 그것을 준 제자와의 추억을 생각한다. 자연산 벌꿀을 주성분으로 하는 립밤을 바르면서는 궁핍했던 어린 시절 입안이 헐면 꿀을 발라주던 아버지를 추억한다. “사물은 그것을 건네준 이를 떠올리게 하고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추억하게” 하며 기억을 일깨우는 것이다.

 

 

소소한 물건에 깃든 예술성과 미의식
─물건 하나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다

 

  그의 수집은 흔히 말하는 골동품을 사 모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아날로그에 매료되어 과거에 매여 있지도 않다. 매일 스치는 일상의 사물들부터 책상 위에 자리 잡고 늘 그와 함께하는 문구들, 인사동 어느 화랑에서 구한 골동들, 혹자는 아동 취향이라고 흉볼지도 모를 귀여운 사물들, 오랜 추억이 깃든 물건들까지 종류도,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미술평론가로서의 심미안으로 하나씩 고르고 수집한 사물들은 희귀하다거나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손에서 함께 나이 들어가며 세월을 덧입는다. 그래서 더욱 의미 깊고 마음에 와 닿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 일상적인 사물에서도 자신만의 눈으로 매력을 찾는 그의 행위는, 물건 하나에도 의미를 두고 자신의 취향을 반영하고 싶어하는 미술 전문가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혹자의 눈에는 흔하디흔한 기성품이지만 그 안에 깃든 시간을 찾아가다 보면, 한 사람의 기억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이 읽힌다.

 

내게 이 지우개는 어떤 순간을 현재의 시간 위로 불러내고 추억하게 한다. 조금 다른 틈을 만든다. 지우개를 사용했던 어떤 순간들이, 어슴푸레하지만 떠오른다. 그리워진다. 동시에 지우개라는 존재가 의미 있는 사물이 되어 다가옴을 느낀다. 나는 주체가 되어 이 세상의 모든 것과 교호(交好)한다. 그것은 놀라운 체험이다. 말 없는 것들과 소통하고 사물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것들과 분리될 수 없는 삶을 사는 어떤 관계의 장을 연상해본다.

—본문 112쪽 「지우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