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영화사의 거장, 완벽주의자 스탠리 큐브릭의 목소리
스탠리 큐브릭에 관한 국내 첫 책

 

영화를 하는 사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거의 모두가 경배해 마지않는 몇 명의 연출가가 있다. 현대 영화문법의 기틀을 마련한 천재 감독 오슨 웰스, “서스펜스의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 그리고 총체적 완벽주의자 스탠리 큐브릭. 이 중에서 세기가 바뀐 지금도 독보적인 편집과 영상미, 영화적 체험을 안기며 작가주의 감독군의 정점에 선 스탠리 큐브릭에 대한 세간의 애정은 남다르다.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코세이지, 코언 형제, 쿠엔틴 타란티노, 리들리 스콧, 라스 폰 트리에, 데이비드 핀처,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명장들이 하나같이 스탠리 큐브릭의 자장 안에 있음을 밝히며 그의 영화 자산을 입 모아 칭송한다. <룩(Look)> 매거진 사진작가로 시작해 20대 초반 짧은 다큐 <시합날>(1950)을 만들며 영화감독 길에 들어선 스탠리 큐브릭. 별다른 영화제작 수업도 받지 않고 영화계 시스템과 자본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신의 거의 모든 연출작을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은 공력은 어디에서 비롯할까?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거장 스탠리 큐브릭의 목소리를 담은 국내 첫 책이다.(스탠리 큐브릭만을 다룬 책은 국내에서 이 책이 유일하다.) ‘글’이 편하다며 인터뷰를 꺼리던 그의 몇 안 되는 ‘말’들이 이 책에 온전히 담겼다. 제작부터 시나리오 집필, 연출, 촬영, 조명, 편집, 홍보, 심지어 극장 시설에 대한 정정 요구까지, 영화제작의 전 과정을 통제하고 통솔한 스탠리 큐브릭 생전의 면면이 책 곳곳에 담겼다. 일명 ‘미래 3부작’으로 불리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시계태엽 오렌지>(1971)뿐 아니라 <로리타>(1962), <배리 린든>(1975), <샤이닝>(1980), <풀 메탈 자켓>(1987) 등 전설로 남은 걸작들의 제작 전후 과정을 세세히 보여주고, ‘스탠리 큐브릭은 외골수에 고집불통’일 거라는, 지금까지 계속되는 억측이 얼마나 큰 오해인지 그 스스로 해명한다.

 

“내 문제의 일부는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그런 근거 없는 통념들을 없앨 수가 없다는 겁니다. 누군가 어떤 글을 쓰면, 완전히 정신 나간 그 글이 하나씩 쌓이기 시작해서는 세상 사람 모두가 그걸 믿을 때까지 반복돼요. 예를 들어, 내가 차에 타면 미식축구 헬멧을 쓴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344쪽

 

스탠리 큐브릭은 1999년 <아이즈 와이드 셧>의 최종 편집본을 워너 브러더스에 넘기고 나흘 뒤 세상을 떴다. 1950년 첫 단편인 <시합날>을 시작으로 반세기 동안 장편과 단편을 통틀어 16편의 영화만을 남겼다. 그만큼 그의 영화제작은 더뎠고, 준비성은 철저했으며, 장인 정신은 치밀했다. 이 책에 담긴 16편의 인터뷰에서 스탠리 큐브릭은 그의 영화들에 관한, 그리고 좀처럼 밝히지 않던 그의 사생활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그가 거장일 수밖에 없음을 입증한다. 당연한 것이지만, 그의 사후 개봉된 <아이즈 와이드 셧>의 후일담은 이 책에 없다.

 

 

원작자들이 칭송하는 감독
가장 영화다운 영화를 만드는 감독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인류의 첫 도구인 뼈가 하늘로 치솟은 뒤 뼈 모양의 우주선 디스커버리 1호로 디졸브(장면 전환 기법)되고, 이내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 강>에 실려 우주를 유영하는 장면은 유명하다. 소설이었다면 단 몇 줄로 묘사되었을 이 장면은 영화라는 종합 매체의 특성 덕분에 아무런 설명 없이도 그 자체가 경이로운 체험이 되었다. 스탠리 큐브릭은 이렇게 말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비언어적인 경험입니다. 영화의 러닝타임 2시간 19분 동안, 대사가 나오는 시간은 40분이 채 안 됩니다. 나는 시각적인 경험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의미의 분류는 우회하면서 정서적이고 철학적인 콘텐츠로 잠재의식에 직접 침투하는 경험을 창출하려고 애썼습니다. 마셜 매클루언을 인용하자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메시지는 미디어입니다. 내 의도는 영화가 관객의 의식 깊숙한 곳에 도달하는 강렬한 주관적 경험이 되게끔 만드는 거였어요. 음악이 그러는 것처럼 말이죠.”
-92쪽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정확히 인지하고, 영화가 보일 수 있는 미학의 극한을 추구했다. <배리 린든>에서는 인공조명 대신 자연광과 촛불을 이용해 18세기 유럽의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샤이닝>에서는 당시 갓 발명된 스테디캠을 이용, 보다 역동적이고 무서운 장면을 연출해냈다. 영화를 위해서라면 그는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어떤 환경이든 기꺼이 받아들였다.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들은 대개 소설이 원작인데, 스탠리 큐브릭과 함께 작업한 원작자들이 그를 칭송해 마지않는 건 내용에 대한 통찰과 매체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를 위해서라면 이미 높은 평가를 받은 원작도 과감히 비판하고 뜯어고치길 마다하지 않았다. <로리타>의 원작자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는 이런 일이 있었다.

 

“이 소설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 내러티브의 주요 관심사가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된다는 거예요. ‘험버트는 로리타를 침대에 끌어들일까?’ 소설은 멋들어지게 집필됐음에도, 읽어보면 후반부에 그가 그런 후부터 내러티브의 흥미가 급격히 떨어진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영화에서는 이 문제를 피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도입부에서 험버트가 퀼티를 아무 설명도 없이 쏘게 만든다면 영화 내내 관객들은 퀼티가 왜 총에 맞은 건지 궁금해할 거라는데 나보코프와 뜻을 모았죠. 물론, 퀼티를 죽이는 걸로 영화를 열면 멋들어진 엔딩을 희생시켜야 하는 게 명백했지만, 그렇게 하는 게 영화의 제작 목적에 부합하는 결정이라고 생각했어요.”
-158~160쪽

 

시사회에서 <로리타>를 감상한 나보코프는 큐브릭이 “위대한 감독이고, 그의 <로리타>는 훌륭한 연기자들이 출연하는 1급 영화였다”는 걸 알게 됐다고 나중에 밝혔다. 그가 쓴 시나리오의 상당 부분이 활용되지 않은 채로 날아갔는데도 말이다.
-254쪽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도 스탠리 큐브릭은 원작과는 달리 설명과 대사를 많은 부분 영상으로 대체하며 여백을 두었다. 원작자이자 SF문학계의 전설인 아서 C. 클라크는 이런 그를 “놀라운 사람”이라며 훗날 원작의 서문을 그에 관한 경험들로 빼곡히 채웠다. 여타의 명성에 기대지 않고, 영화를 군더더기 없이 그 자체로 완벽한 종합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은 스탠리 큐브릭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완벽주의자의 속사정
스탠리 큐브릭에 대한 오해를 풀다

 

<풀 메탈 자켓>이 한국에서 개봉했을 때, 스탠리 큐브릭이 홍보용 자료를 모두 보내라고 요구한 뒤 한국 유학생을 고용해 그걸 영어로 번역, 모두 검토한 뒤에 승인했다는 일화가 있다.(「옮긴이의 말」) 그의 이러한 완벽주의적 기질은 그가 고집 세고 독단적이며 편집광일 거라는 편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대중에 나서기보단 책과 영화 작업, 체스에 매몰되길 좋아하던 성향이 이를 부채질했다. 『스탠리 큐브릭』은 그에 대한 이러한 편견이 오해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스탠리 큐브릭이 자기 영화를 상영할 극장까지 선택하는 ‘월권’을 행사하려 했다는 소문의 진위는 이렇다.

 

“어떤 사람들은 경악하죠. 하지만 나는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들이 걱정됩니다. 극장에서는 내가 정신이 나가서 불안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루커스 필름이 극장 조정 프로그램(Theater Alignment Program)을 실행했습니다.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극장을 확인한 후, 1985년에 우리가 품은 최악의 의혹들이 사실상 사실이라는 걸 보여주는 보고서를 발간했죠. 예를 들어, 프린트의 50퍼센트에 하루 안에 스크래치가 생깁니다. 뭔가가 망가지는 게 보통이죠. 앰프는 쓸모가 없고, 그래서 사운드는 형편없습니다. 조명은 균일하지 못하고……. (…) 많은 극장주가 영화 품질의 최소 기준을 무시하는 끔찍한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346~347쪽

 

스탠리 큐브릭이 독단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그의 ‘배우론’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는 감독이란 “배우에게 연기를 가르치거나 배우가 연기하게끔 속임수를 쓰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 출연한 스털링 헤이든의 연기를 독려하는 스탠리 큐브릭의 방식은 무척 인간적이다.

 

스털링 헤이든은 큐브릭을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 출연했을 때 큐브릭이 그를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던 걸 회상한다. 촬영 첫날에 헤이든은 대사에 있는 기술적인 전문용어들을 자신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다. “무척이나 창피했습니다. 그런데 스탠리가 말하더군요. ‘당신 얼굴에 떠오른 두려움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딱 그런 감정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뭐, 잊어버려요. 어쨌든 촬영은 마칠 수 있을 거예요.’ 그는 멋졌습니다.”
-258쪽

 

『스탠리 큐브릭』에는 평소 볼 수 없었고 이제는 편견으로 굳어버린 스탠리 큐브릭의 진실한 면모를 곳곳에 담고 있다. 영화 ‘괴물’이기보다는 그저 꼼꼼하고 세심했던 명감독이 스스로 밝히는 드문 속내는 이 책을 읽는 큰 재미 중 하나다.